# 193
193화 - 투기장(1)
46. 투기장
“몸담을 진영은 생각해뒀나? 노파심에 다시 말해두지만 좌측이 라이든, 우측이 컴퍼니야. 진영을 바꾸려면 명예석이 필요하니까 잘 선택해.”
선택의 시간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라이든 진영과 자연보단 발전과 번영을 우선시하는 컴퍼니 진영. 솔직히 어딜 들어가든 명예석만 얻으면 상관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진영이 있었다.
“이미 정해놨어요.”
민성은 스벤을 뒤에 두고 당당하게 카운터 앞으로 걸어갔다.
“어서 오세요. 또 하나의 전쟁터 투기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용무로 오셨는지요?”
“진영 가입 좀 하려고 하는데요.”
안내원의 화사한 미소에도 민성은 무뚝뚝하게 답하며 주변을 힐끗거렸다.
“저……. 지, 진영 가입을 좀…….”
첫 방문에 고백을 앞둔 소녀처럼 우물쭈물하는 손님부터,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엉?
10번 넘게 생존한 것이 훈장이라도 되는 듯 들먹이며 거드름 피우는 이들도 존재했다. 민성은 그런 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라이든과 컴퍼니의 랭커들이 적힌 전광판을 쳐다봤다.
“진영 가입을 하시려는군요. 진영은 라이든과 컴퍼니 중 한 곳을 선택해주시면 됩니다.”
안내원의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민성의 눈앞에 영상이 나타났다.
[푸르른 대지와 초목들. 살랑이는 바람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종족들의 연합, 라이든. 그들은 과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자연과 화합하는 법을 터득하고 이어나갔다. 하지만 라이든 앞에 컴퍼니가 나타나고 나서 그들의 평화는 깨진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났다.]
대자연과 그 사이로 지어진 자연친화적인 구조물들, 그리고 라이든의 주민으로 보이는 귀가 뾰족한 이들을 비추던 영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어느 날, 패잔병처럼 추레한 모습으로 그들의 진영에 찾아온 컴퍼니. 그들은 고향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던 민족이라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런 그들을 딱하게 여긴 라이든 측은 컴퍼니 연합을 따듯하게 맞이했다. 의식주를 공급하고 그들이 정착할 영토를 일부 제공하기까지 했다.]
영상은 라이든의 대표로 보이는 늙은 왕이 컴퍼니 대표로 보이는 안드로이드가 내민 기계 팔을 맞잡는 모습을 비추었다.
‘쯧쯧. 필요 이상의 친절은 독인데.’
민성은 A진영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계속 영상을 주시했다.
[그러나 라이든의 호의는 머잖아 그들에게 치명적인 독으로 되돌아왔다. 영토를 제공받은 컴퍼니는 영토 위에 그들만의 문명을 세우기 시작했다. 때 묻지 않았던 광활한 자연은 생존을 위해 자원을 채집한다는 명목 하에 파괴되고 파헤쳐졌다.]
영상은 B진영이 숲을 불 지르고 땅을 파헤쳐 광물을 캐내는 모습을 비추었다.
‘멍청한 새끼들. 그럴 줄 알았다.’
민성은 파괴된 자연 위에 들어서는 거대한 공장과 설비시설들을 보며 혀를 찼다. 라이든의 이타적 행위는 결국 배신의 칼날로 돌아온 셈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라이든의 주민들은 늙은 왕에게 상소했고, 평화를 사랑했던 왕은 성난 주민들과 컴퍼니를 중재하고자 했다. 하지만,]
“너희가 평화에 취해 허덕일 동안 우리는 모든 준비를 끝냈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라이든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자원을 제공한 점을 높이 사! 크라노스 님께서 친히 아량을 베풀어 너희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셨다! 우리 컴퍼니에게 복속해라. 그러면 너희의 목숨만은 보전시켜주마.”
“이…… 파렴치한 놈들이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전쟁이다!”
“전쟁? 좋지.”
[늙은 왕이 컴퍼니의 터무니없는 제안을 거절하자, 컴퍼니는 곧장 준비해두었던 군세를 이끌고 경계선을 넘어갔다. 전쟁은 해를 넘고 수 세기에 걸쳐 계속되었고, 기나긴 전쟁 속에 남은 것은 수많은 전사자들과 주민들의 눈물뿐이었다. 그러나 이 길었던 전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신의 중재로 전쟁은 막을 내리는 듯했다.]
“…….”
‘잘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웬 중재? 그리고 중재가 아니고 장소만 옮긴 거 아냐?’
두 진영의 병력들이 섞여 전투를 벌이던 와중, 갑작스럽게 영상이 끝나자 민성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정 중재하고자 했으면 상점에 이곳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중재를 가장한 신의 농간이 분명했다.
띠링-
[진영을 선택해주십시오. 단, 한 번 진영을 선택하시면 진영교체를 위해 명예석이 소모되오니 신중하게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영을 선택하실 경우, 10시간 동안 해당되는 진영의 보호를 받아 전투를 피하실 수 있습니다. 단, 해당자가 원하실 경우 곧바로 전투를 진행하실 수 있지만 진영의 보호는 효력을 잃게 됩니다.]
갑자기 메시지와 함께 라이든과 컴퍼니로 나뉜 화면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들었던 내용이었기에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념에 잠겼다.
‘어디로 한다.’
스벤의 말에 따르면, 최근까지는 백중세를 유지했으나 얼마 전 진영과 진영이 총력전을 벌이는 대전투 ‘리세마라’에서 라이든이 패배해 컴퍼니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형국이라 했다. 당연히 컴퍼니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지만, 불리한 진영에는 불리해질수록 특수한 메리트가 발생한다고 했다. 고심하던 민성은 슬쩍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라이든! 라이든으로 선택하겠어!”
“더러운 새끼들이 밥 주고 옷 주고 땅까지 줬는데 통수를 제대로 후려쳐? 이건 무조건 라이든이지!”
같은 영상을 봤는지 분개하며 안내데스크를 두들기는 손님들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들은 하고 선택하는 건지…….’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선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위도 없을 것이다.
‘컴퍼니를 선택하는 게 유리할 것 같긴 한데…… 역시 안전빵보단 기회가 득실거리는 곳이 낫겠지.’
고심을 거듭하던 민성은 결정을 내리곤 안내원에게 다가갔다.
“결정하셨나요?”
“라이든으로 하겠습니다.”
“네, 축하드립니다. 라이든 소속이 되셨습니다. 라이든의 일원으로서 큰 활약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바로 능력의 방으로 이동시켜드리겠습니다.”
안내원의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민성의 왼쪽 어깨에 라이든을 나타내는 큰 나무 문양이 박혔다. 동시에 민성은 그의 몸이 어디론가 전송됨을 느꼈다.
“흠…….”
갑작스러운 이동에도 불구하고 민성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작은 방. 방 안은 촛대에서 일렁이는 불꽃이 내부를 은은하게 밝혀주었고. 끝에는 커다란 거울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투기장을 이용하기 전 사용자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랭크를 부여하는 능력의 방입니다.]
허공에서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랭크 부여에 앞서, 저희 투기장은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철저히 보장하고자 이 같은 시스템을…….”
“설명은 됐어. 거울 앞에 서면 되는 거잖아.”
스벤에게 들은 대로 목소리가 긴 설명을 시작하려 하자, 민성은 말을 자르고 거울 앞에 섰다.
[……그럼 바로 랭크 확인을 시작하겠습니다. 거울을 주시해주세요.]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거울을 빤히 쳐다봤다. 반쯤 망한 현실 덕에 자르지 못해 덥수룩해진 머리와 표정이 없는 얼굴이 그대로 거울에 비쳤다.
‘그간 쏟아 부은 루비가 얼만데. 못해도 B는 나올 거고…….’
스벤은 사용자가 보유한 아이템과 스텟, 스킬 등을 종합해 D부터 S까지의 랭크를 적용시킨다 했다. 민성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곧 나타날 그의 랭크를 기다렸다. 투기장 역사상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다는 30명의 S급 랭커. 그 급은 아니더라도 최소 B는 나와야 정상이라 생각했다.
‘잘만 하면 A도 나올 것 같은데.’
투기장에서도 0.1% 정도의 극소수만이 존재한다는 A랭크. 솔직히 랭크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여길 수 있었지만, 정보를 접한 이상 좋은 등급을 얻기 원했다. 랭크에 따라 처음 기본으로 제공되는 명예석의 수량도 달라질 뿐더러, 랭크가 높을수록 선택한 진영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늘어난다니 높은 등급을 원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면 좀 더 높일 방법이…….”
작게 중얼거리던 민성은 곧 눈을 빛내며 아이템 창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와 동시에,
두둥-
작은 북소리와 함께, 민성의 모습이 사라진 거울에 커다란 글자 하나가 새겨졌다.
[쯧……. 축하드립니다. 귀하의 등급은 A. A랭크에 배정되셨습니다.]
목소리는 민성이 받은 등급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설명을 이어갔다.
[A랭크에 배정됨에 따라 해당 랭크에 따른 기초보상이 제공됩니다. 명예석 300개가 기초보상으로…….]
“아, 잠깐 기다려봐.”
[…….]
민성은 목소리를 제지하고 들고 있던 타원형의 보랏빛 물체, 강화석을 지그시 바라봤다.
‘뽑은 건 좋은데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명확한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는 것 역시 아이템의 매력 중 하나였다. 잠시 고심하던 민성은 등에 이고 있는 대검을 빼내, 강화석에 갖다 댔다.
띠링-
[‘모두의 강화석’을 ‘피에 젖은 충의의 길’에 사용하시겠습니까? 진행시, 강화석 1개를 소모합니다.]
[강화 성공률: 100%]
원하던 메시지가 앞에 나타나자 민성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돌처럼 단단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강화석이 흐물흐물 녹아 대검을 코팅하듯 부드럽게 감쌌다.
[축하드립니다. 강화에 성공하셨습니다.]
이윽고 강화석이 대검을 완전히 덮자, 안내음과 함께 대검에서 희미할 정도로 옅은 흰빛이 흘러나왔다.
‘강화꾼들이 봤으면 게거품 물었겠어.’
무사히 강화가 끝나자 민성은 입꼬리를 올리고 검자루를 쥐었다. 그간 강화에 실패해 터져나간 장비들과 그 흔적들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손님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그러나 민성은 달랐다. 바늘 틈 같은 극악의 강화확률도 그에겐 다른 나라의 뜬소문 정도에 불과했다.
[오……, 세상에…….]
민성의 행각을 계속 지켜봤는지, 허공에선 경악한 목소리가 울렸다.
“크……. 때깔 죽이네.”
그러나 민성은 아랑곳 않고 달라진 대검을 매만지며 낮은 탄성을 질러댔다. 그리곤 입맛을 다시며 아이템 창에서 강화석을 줄줄이 꺼내 대검에 바르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강화에 성공하셨습니다.]
.
.
.
민성의 강화대란은 대검에서 붉은 빛이 선명하게 뿜어져 나올 때까지 진행됐다.
“정보 확인.”
[피에 젖은 충의의 길+5]
등급: ★★★★★★ (귀속)
공격력: 677~843(+2110)
특수능력: 내장스킬 ‘수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장검법 ‘현무검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큭…….”
정보를 확인한 민성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대검을 어루만졌다. 영롱한 붉은빛은 마치 루비로 만든 장식물을 연상케 했다. 한참을 실실 웃던 민성은 곧 표정을 정리하곤 남은 강화석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