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192화 - 기습공격(7)
*
상점 6층, 투기장.
스륵-
‘진짜 텅텅 비었네.’
원통에서 내린 민성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스벤의 말대로 보이는 것이라곤 우두커니 서 있는 철문과 그 주위를 배회하는 손님들뿐이었다.
“속았다. 재미있는 곳일 줄 알았는데……. 투기장은 꽝이다, 인간! 경매장이나 가자! 경매장!”
티노가 못마땅하여 틱틱대자,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야 나온다 했잖아요. 아까 졸았어요?”
“그럼 빨리 들어가라, 인간!”
스륵-
“알았으니까 얌전히 있어요.”
바로 옆 원통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민성은 티노의 턱을 꾹 누르곤 고개를 돌렸다.
“안 들어갈 줄 알았는데 잘 타셨네요.”
민성은 원통에서 내리는 스벤을 보며 싱긋 웃었다. 원체 스벤이 커다랬기에 원통이 수용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떻게 잘 타고 온 모양이다. 스벤은 그에게 투기장을 안내해주고 소생단 조각을 받은 후, 계약이 끝날 때 가지고 있는 명예석을 전부 넘겨주기로 약조했다. 혹시나 놈이 변심할까 싶어 재차 물어봤었지만,
“네가 보유한 조각만 건네받으면 소생단을 만들 수 있어. 소생단만 얻으면 이 바닥도 뜨려고 했었고. 그저 내 심장 같은 딸의 목숨을 고작 명예석 따위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할 뿐이야.”
호구 잡혀준다는데 놔줄 생각은 절대 없었다.
‘것보다 명예석으로 그런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니. 투기장. 괜히 있는 게 아니었어.’
민성은 그 외에도 추가로 얻은 정보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탑승자의 크기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형하니까. 후……. 그래도 불편하긴 하지.”
스벤은 몸을 쭉 펴며 기지개 켜곤 외롭게 서 있는 철문 앞으로 이동했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뭐 그리 급하게 움직여요.”
곧장 철문에 손을 뻗으려던 스벤은 팔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민성을 빤히 쳐다봤다.
“한시라도 빨리 조각을 받고 싶으니까. 약속은 꼭 지킬 것이라 여긴다.”
“약속만 지키면 보상은 확실히 제공하는 스타일이라서.”
민성은 싱긋 웃으며 거대한 철문을 응시했다. 문에는 다양한 인종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각인돼 있었다.
‘단순한 격투장이라고 예상했는데. 기대되는데?’
“케케케케! 빨리 문을 열어라! 몸집만 큰 한 눈 인간아!”
“…….”
고지가 목적인 탓인지 민성은 한껏 들뜬 티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 투기장으로 진입하는 입구이자 희망의 장소로 안내하는 문이기도 하지. 내 딸을 위한…….”
“기본사항은 아까 다 들었으니까 얼른 가봅시다.”
스벤이 아련하게 문을 바라보자, 민성은 손을 까딱이며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감정이 메마르다 못해 가뭄이라도 들었나…….”
스벤은 민성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문에 슬며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스벤의 육중한 몸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흠……. 괜찮은 것 같네.”
민성은 스벤이 사라진 뒤에도 잠시간 다른 손님들의 동향을 관찰하고 나서야 문에 손을 뻗었다.
[또 하나의 전쟁터. 투기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투기장에 입장하시기 위해선 상점 10회 입장 조건을 충족하셔야 합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투기장으로 진입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민성은 연달아 나타나는 메시지를 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덜컥-
그러자 열린 문 사이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빛을 응시하던 민성은 이윽고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투기장으로 진입합니다.]
“호오…….”
민성은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장소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앞서 스벤에게 들었던 것보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정말 양분화돼 있네.’
좌측으론 아기자기해 보이는 버섯 뚜껑이 달린 집과 커다란 나무에 계단과 구멍이 있는 자연친화적인 주거지가 있었고, 우측으론 현대의 도시처럼 거대한 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 마을 사이로는 웅대한 크기의 구조물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번엔 등급 높은 파티원 좀 구해봐!”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어?”
“오늘은 좀 괜찮은 경기 있으려나 모르겠네. 빨리 가자!”
민성이 꽤나 이색적으로 꾸며진 마을을 감상하고 있는 사이, 숙련자로 보이는 손님들은 앞 다투어 중심대로변으로 뛰어갔다.
“저…….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없나요?”
“투기장 초심자가 정보 구합니다! 고수분들, 좀 알려주세요!”
첫 방문으로 보이는 손님들은 철문 근처를 배회하며 정보를 구걸했다.
‘나도 그냥 들어왔으면 파악하느라 애먹었겠지. 불친절함이 모토인 곳이니까.’
스벤이 없었다면 그 역시 초심자 대열에 합류해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시간을 소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저나 이놈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안내원이면 안내원답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민성이 혀를 차며 움직이려는 찰나,
“케케케케케케! 투기장! 재밌겠다!”
고대하던 투기장에 도착한 탓인지, 티노는 원통에서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전방으로 날아갔다.
“적당히 둘러보고 돌아와요!”
민성은 멀어지는 티노의 꼬리에 익숙하게 소리치곤 스벤을 찾았다. 다행히도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몸집이 크니까 찾기도 편하네.’
중심대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동상처럼 앉아 있는 스벤을 발견한 민성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왔나?
헬버드의 날을 숫돌에 갈고 있던 스벤은 민성을 힐끗 보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양쪽 진영을 양분화한 중심대로를 가리켰다.
“이동하지. 일단 아까 말했던 대로 접수처에서 랭크 확인과 진영 등록부터 하자.”
“가죠.”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곤 스벤을 따라 중심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중심대로에는 상점 밑층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손님들이 거닐고 있었다.
‘최소 열 번은 살아남은 놈들만 모여서 그런가.’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치 않은 놈들이 자주 보였다. 하지만 상점의 천벌 탓인지 다들 자연스럽게 대로를 누볐다.
“자, 두두리안 하나 잡숴보고 가세요! 저희 차원에서도 귀족들이나 맛볼 수 있는 고급 과일입니다!”
“번개의 맛을 담은 짜리몽 팝니다!”
“청염의 새, 마크니의 털로 짠 망토입니다!”
대로 양측에 늘어선 좌판들에선 손님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호객행위가 이어졌다.
“저 양반들, 진영에 임대비 내면 남는 게 있어요?”
민성은 질문하며 자연스럽게 좌판에 들러 50코인에 산 짜리몽의 껍질을 벗겨냈다. 가시 돋친 껍질을 벗기자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확실히 중심대로의 임대비는 진영 내의 점포들보다 비싼 편이지. 양쪽 진영을 상대로 장사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멍청하게 일말의 확률에 목숨 건 밑층 놈들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그 멍청이 중에 하나지만…….”
“그쵸. 초심자들이야 입장제한 탓에 어쩔 수 없다지만 확실히 상자에 올인하는 건…….”
스벤이 씁쓸하게 웃자, 민성은 가볍게 동의하며 손에 들린 짜리몽을 야성미 넘치게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맛 너머로 몰려오는 이색적인 느낌. 몸이 덜덜 떨리면서 감전된 듯 짜릿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미쳤는데?’
“워…….”
민성은 홀린 듯이 짜리몽의 하얀 과육을 바라봤다. 입안에 맴돌던 과육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자, 짜릿한 느낌도 씻은 듯 사라졌다.
“보통 한입 먹고 다들 버리던데…… 맘에 들었나 보네.”
스벤은 몸을 덜덜 떨면서도 과육을 입에 밀어 넣는 민성을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이거 중독성 있네요…….”
“얼른 가지. 한시라도 빨리 조각들을 받고 싶으니까 말이야.”
스벤은 독촉하듯 접수처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거, 급하시긴…….”
민성은 몸을 덜덜 떨어대며 스벤의 뒤를 따랐다. 잠시간 대로를 걸은 민성과 스벤은 곧 거대한 구조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큰 나무와 빌딩을 반씩 섞어놓은 기괴한 구조물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단체전 파티 꾸리실 C랭크 이상 파티원 구합니다!”
“배당금 내놔!”
“나한테 500코인 건다!”
“저기요? 진영 가입하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는지 아시는 분?”
갖가지 음성들이 섞여 시끌벅적한 내부가 보였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목조물과 콘크리트로 조성되어 분할된 모습을 지녔다. 또한 각 진영을 상징하듯 커다란 나무 문양과 골드바가 쌓인 문양이 양측 진영에 박혀 있었다.
“저것 봐, 초심자 학살자 스벤이야!”
“옆에는 못 보던 놈인데, 동료인가?”
“뭐? 설마? 솔로 플레이만 하던 놈이 동료라니? 아, 설마 놈도 드디어 파티 플레이에 진입하려는 건가?”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을 알아본 누군가의 외침 덕에 한순간 수많은 시선이 쏠림을 느꼈다. 두려움, 경멸 등 오만가지의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었다.
“초심자 학살자셨어요? 오기 전에는 전사 중의 전사라 들었던 것 같은데.”
“명예석 얻기에는 그보다 빠른 길이 없었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무기를 든 순간 다들 전사가 되는 법이니까.”
민성의 물음에 스벤은 헛기침하며 멋쩍게 허공을 응시했다.
‘초심자 학살자건 수행자건 계약만 잘 이행해주면 그만이지.’
“저건 뭡니까?”
민성은 그의 다리를 툭툭 건드려주곤 나무 문양이 박힌 진영의 카운터 위에 걸린 커다란 게시판들을 가리켰다.
“랭킹 게시판이야. 개인전, 단체전 등 투기장에서 운영하는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놈들의 이름이 머무르는 곳이지.”
“호오…….”
스벤의 말에 따르면 투기장에는 꽤나 다양한 종류의 전투 시스템이 있다고 했다. 그중 일부는 저렇게 랭킹 시스템을 도입한 모양이었다.
“아, 그쪽은 라이든 진영 측의 이름밖에 없으니까 저쪽을 보는 게 나을 거야.”
민성이 눈을 빛내며 게시판을 확인하려 들자, 스벤은 민성을 제지하며 내부 중심에 위치한 게시판을 가리켰다.
‘양측 진영의 랭킹을 합산한 게시판인가?’
게시판에는 상위 100위까지의 이름과 랭킹 그리고 소속 진영의 문양이 나열돼 있었다.
“랭킹은 명예석 보유 개수로 매긴다고 했죠?”
“보유한 숫자는 나오지 않지만 말이야. 아, 그리고 아쉽게도 내 이름은 없으니까 구태여 찾을 필요 없어.”
‘어느 정도 명성은 있지만 상위 랭커는 아니다? 뭐, 찾을 생각도 없었지만.’
민성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스벤의 안색은 어딘가 어두워졌다.
“강함에 순위를 매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누구든 급소를 맞으면 골로 가는 건 똑같으니…….”
“저건 뭔가요?”
민성은 홀로 주절거리는 스벤의 말을 자르곤 손가락을 들어 게시판 일부를 가려둔 검은 줄을 가리켰다.
“음……? 아, 30위까지는 정보가 없어.”
“왜요?”
“나도 잘 몰라. 소문에 의하면 과거에 투기장을 휩쓴 놈들이라던데 지금도 놈들이 보유한 명예석의 숫자를 넘은 놈들이 없는 걸로 봐선 엄청 대단했던 인물들인 모양이야.”
스벤의 답이 끝나자, 민성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게시판을 바라봤다.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그보다 일단 진영부터 고르지. 그래야 움직이기 수월해지니까 말이야.”
스벤은 중앙 게시판 밑 카운터를 가리키며 고갯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