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91화 - 기습공격(6)
재활용 휴지통. 사용자가 원할 경우 필요 없는 아이템을 버려 코인으로 바꿀 수 있는 5성 아이템이자, 아이템 창에 자동으로 부착되어버린 반귀속 아이템이기도 했다. 아이템 박스를 개봉하며 얻은 괜찮은 아이템 중 하나였다.
“그…….”
“이보게.”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묵직한 중저음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민성의 어깨를 붙잡았다. 민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5m가 넘는 장신에 근육으로 덮인 다부진 몸, 그리고 얼굴이라 짐작되는 곳에는 거대한 눈동자가 자리한 외눈박이 괴물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뭡니까? 어차피 조금은 개평으로 남겨두고 갈 생각이었으니까 알아서 챙겨가요.”
민성은 그의 손을 가볍게 쳐내며 그를 올려다봤다. 어차피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에 현혹된 거지들 중 하나일 게 뻔했다. 하지만 민성의 예상과 달리 외눈박이 괴물은 간절한 표정과 함께 무릎을 꿇어 보였다.
“부탁이 있네. 어차피 버릴 아이템, 나한테 줄 수 있나? 많이도 필요 없어! 소생단 조각! 그거면 족해! 내 딸이……. 내 딸이 병마로 죽어가고 있어! 그러니 제발…….”
‘소생단 조각?’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민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괴물을 올려다봤다. 설마하니 조각을 모으는 이가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조각으로 온전한 소생단을 만들기 위해선 80개가량의 조각이 필요하다. 더욱이 5성 아이템인지라 모으기도 쉽지 않을 터.
“어차피 버리고 갈 거라니까요? 알아서 주우면 되죠.”
민성은 귀찮다는 티를 내며 등을 돌리려 했다. 몸이 허할 때 먹으려고 챙겨놓은 소생단 수십 개가 아이템 창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딸을 위한 그 노력은 가상할지 몰라도 그에게 하등 이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네가 소유권을 포기하면 당장이고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해! 혹시라도 조각을 얻지 못하면 난…….”
퍽-
외눈박이 괴물은 바닥에 머리를 처박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금세 피 같은 붉은 액체가 맺혀갔다.
“아, 거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요.”
민성이 질렸다는 듯 손을 흔들자 외눈박이 괴물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민성을 바라봤다.
“주는 건가?”
“설마요. 세상에 공짜 없는 거 알죠? 당연히 대가를 지불하셔야죠. 아니면 제 흥미를 돋울 만한 뭔가를 내놓으시든가.”
민성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외눈박이 괴물을 훑었다. 헐벗은 상체와 기묘한 무늬가 새겨진 거죽으로 겨우 하반신만 가리고 있는 놈의 모습은 초라하다 못해 볼품없어 보였다. 섣불리 외관으로 판단하면 안 됐지만, 아무리 봐도 놈은 잡템 선점을 위해 딸을 팔아먹은 거지,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없죠? 그럼 전…….”
“자…… 잠시만 기다려! 있어! 있다고!”
민성이 차갑게 등을 돌리자, 외눈박이 괴물은 다급히 민성을 제지하며 미세한 빛이 맴도는 거대한 헬버드를 내밀었다.
“흠…….”
민성은 괴물이 공개한 정보창을 빠르게 읽어 내리곤 고개를 저었다. +1 강화된 3성 무기. 부가 옵션으로 낮은 확률로 치명타가 적용되는 무기였다.
“내가 애용하던 무기야! 다른 놈들한테 팔아도 좋은 값을 받을 거야.”
민성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애가 탄 괴물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민성의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좋은 무기네요.”
‘쯧. 시간만 날렸네.’
아마 헬버드가 놈이 내민 최고의 한 수일 터. 괜히 잔챙이를 상대한 탓에 시간만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치? 내가 그놈으로 날린 모가지만 수백이라고!”
민성이 활짝 웃자, 괴물 역시 누런 이를 보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잘 파셔서 좋은 값 받으시고, 그 코인으로 꼭 소생단 조각 구하셨으면 좋겠네요.”
“뭐……뭣? 자…… 잠깐만! 제발 잠시만 기다려!”
민성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등을 돌리곤 자리를 뜨려 하자, 괴물은 우람한 나무 같은 팔로 민성의 주위를 감싸듯 가로막았다.
“하……. 사연 있는 인생이 한둘입니까? 그쪽만 불쌍한 거 아니니까 그만 좀 질척거려요!”
민성은 매몰차게 쏘아붙이며 잡템들을 휴지통에 넣으려 했다.
“명예석! 명예석은 어떤가!”
‘명예석? 그건 또 무슨 잡템이야?’
“더 할 말 없으니까 알아서 잘 챙겨요.”
보나마나 별 볼 일 없는 템이라 생각한 민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가로막고 있는 팔을 넘기 위해 도약하려던 찰나,
“어! 야, 미친! 저거 스벤 아니야? 투기장의 미친개가 무릎을 꿇고 있어!”
“헐……. 진짜네? 대체 무슨 일이래?”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에휴……. 아무리 가족사가 중요하다 해도 피 같은 명예석을 조건으로 걸다니…….”
일부 손님 사이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바짝 엎드려있는 외눈박이 괴물과 민성을 번갈아 쳐다봤다.
‘호오……. 그냥 벌렌 줄 알았는데 꽤 유명인산가 보네.’
호기심이 동한 민성은 다시 몸을 돌려 스벤을 내려다봤다. 거대한 몸 곳곳에 새겨진 상흔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왠지 놈이 제시한 명예석이라는 것도 예사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기장 네임드인 것 같은데, 부려먹기엔 적당하겠어. 정보도 없으니 이참에 정보도 좀 수집할까.’
이용가치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민성은 스벤을 투기장 안내원 파트 타이머로 부리기로 맘먹었다. 아르바이트 비용으로는 소생단 조각 제공! 원하는 물건도 지급하니 악덕 고용인은 아닌 셈이다.
“부탁이야! 제발 소생단 조각을…….”
“좋습니다.”
민성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소생단 조각을 따로 빼놓아 챙겼다. 그리곤 기타 잡템들은 개평으로 지급할 것을 제외하곤 모조리 휴지통에 부어넣었다.
‘그나마 휴지통 덕에 어느 정도 자금 회수했네.’
190여개에 달하는 잡템들은 35만 코인이 되어 민성의 주머니로 되돌아왔다.
“정말인가?”
마침내 민성의 승낙이 떨어지자, 스벤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감동에 젖은 눈빛을 보냈다.
“일단 움직입시다. 여기는 듣는 귀가 많아서 좀 부담스럽네요.”
민성은 휴지통에 넣고 바닥에 남은 부스러기 아이템들과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던 손님들을 번갈아 보며 히죽이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민성이 자리를 벗어나자,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손님들은 악귀처럼 잡템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템이다! 최소 3성짜리야, 무조건 챙겨!”
“비켜! 이 새끼야! 내 거야!”
“미친 새낀가! 나와, 이 시발 것들아!”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는 간헐적으로 상점의 천벌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님들은 일말의 양보 없이 잡템을 확보하려고 사투를 벌였다.
“가…… 같이 가게! 이런 거지새끼들이! 비키지 못해!”
그리고 스벤이 손님들의 물결을 헤치며 민성의 뒤를 쫓았다.
*
“여기라면 대화 나누기도 편하겠네요.”
은은한 푸른빛이 맴도는 거대한 방 안. 민성은 마주 앉아 있는 스벤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라벨이 붙어 있는 고급스러운 술병들이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이런 곳을 이용하는 자가 있을까 싶었는데, 오늘 의문 하나를 해결하게 됐어.”
스벤의 몸집을 생각해 제일 큰 방으로 자리 잡았건만, 스벤은 위축되어 방 안만 두리번거렸다.
“코인은 쓰라고 있는 거니까요.”
민성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 잔을 들었다. 예전에 검마와 커피를 마시며 들었던 잔 정보를 이렇게 활용할 줄은 몰랐다. 상점 안, 휴식처들이 모인 곳의 룸 술집. 그들이 이동한 장소였다. 직원의 말에 따르면 방에는 사일런스 마법이 걸린 덕에 외부로 대화가 새어나갈 일도 없다 했다. 기본 이용료로 1,000코인이 든다고 했을 땐 조금 놀랐지만, 어차피 푼돈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지출은 아니었다.
구태여 장소를 이동한 이유이자 목적. 일부 손님은 스벤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명예석에 관해서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헌데 강함의 척도인 코인을, 그것도 거액의 코인을 지른 민성이 명예석을 모른다? 분명 쓸데없는 의심을 낳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리를 이동함으로써 의심의 눈길을 최소화한다. 민성의 노림수였다. 물론 대화하는 와중 스벤의 의심은 피할 수 없겠지만,
‘어차피 목줄은 내가 쥐고 있으니까.’
민성은 빙긋 웃으며 거대한 외눈을 응시했다.
“그런가? 어쨌든 난 소생단 조각만 얻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 얼른 거래를…….”
“잠깐만요. 거래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명예석이 정확히 뭡니까?”
“뭐?”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스벤의 외눈에서 묻어나왔다.
“명예석이요. 용도가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아이템인지 알아야 거래에 응할지 말지 정하죠. 아무리 따님 일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시다 하더라도, 설마 보잘것없는 물건으로 거래하자고 하시진 않았을 거고. 뭣하면 직접 꺼내서 보여주셔도 됩니다.”
민성이 얼른 꺼내보라는 듯 손을 까딱이자 스벤의 동공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몰라서 묻죠. 알면 묻겠습니까?”
“……정말 당황스럽네, 당황스러워. 거액의 코인을 운용하기에 투기장의 숨은 랭커라 생각했건만, 투기장의 화폐조차 모른다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투기장에서도 일부 강자들은 그 정보가 베일에 싸여 있다. 당연히 민성도 그 부류일 줄 알았건만 투기장의 화폐조차 모르는 애송이라니. 스벤은 자리를 박찰 듯 일어나며 민성을 노려봤다.
‘호오…… 코인만 있는 줄 알았더니 투기장용 코인도 있었어?’
당장이라도 거대한 몸뚱이가 압사시킬 듯 지척에서 꿈틀거렸지만 민성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테이블에 놓인 웨하스를 하나 집었다.
바삭-
딸기를 농축시킨 것 같은 달달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뭐?”
민성은 피식 웃어 보이며 반쯤 남은 웨하스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당신의 제안은 지금 저 과자나 다를 바가 없어요. 당장 갖다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제안. 당신은 지금 최대한 저한테 어필을 해야 하는 처지예요. 추궁을 할 게 아니고. 안 그러면…….”
콰직-
“…….”
스벤은 웨하스를 밟아 짓이겨버리는 민성의 모습을 보며 몸을 흠칫거렸다. 아차 싶었다. 그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부디 아량을…….”
스벤은 다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한순간의 치기 때문에 기껏 얻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풀 죽은 개는 도움이 안 돼.’
“이제 좀 흥분을 가라앉히신 모양이네요. 자, 일단 앉으세요. 아버지의 이런 초라한 모습을 따님이 보게 된다면, 기껏 조각을 모아 소생단을 들고 간다 해도 기뻐할 것 같진 않군요.”
민성은 상냥한 말투로 스벤을 달래며 입꼬리를 올렸다.
“고맙다…….”
“별말씀을. 것보다 듣자하니 투기장에 대해 빠삭하신 것 같던데, 일단 투기장에 대한 정보부터 들어보죠.”
스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자, 민성은 깍지를 낀 채 가느다랗게 눈웃음 지으며 외눈의 먹잇감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