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89화 - 기습공격(4)
‘이거였나?’
영문 모를 자세를 취한다 싶더니 뜬금없이 숨기고 있던 핵심을 찔러온다. 강화석을 뽑는다는 생각에 부풀었던 마음이 빠른 속도로 식어갔다.
‘젠장. 여기서 뽀록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평생 가는 비밀은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 루비를 이용한다고 떠벌린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상황이 더욱 당황스럽고 곤란하게 느껴졌다.
‘그래. 아무도 이용 않는 7층도 결국 상점에 포함돼 있는 층이야. 놈도 모를 리가 없겠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민성은 슬며시 검 자루에 손을 갖다 대며 에드워드를 바라봤다. 상점의 중요한 관계자인 만큼, 마찰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루비가 있어도 상점을 이용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최악의 상황은 생각해두어야만 했다.
“루비? 그게 무슨 소리지?”
민성은 아무렇지 않게 시미치를 떼며 에드워드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바쁘게……. 예? 무슨 소리냐니요! 당연히 코인 대신 사용하고 계시는 루비를 말한 겁니다만…….”
창백한 낯빛으로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드워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성을 바라봤다. 그리곤 곧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오랜만에 들르셔서 그런지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놀라게 됩니다. 허허허.”
“난 농담한 적 없어. 코인 대신 루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민성이 담담한 자세로 대꾸하며 찻잔을 들자, 에드워드는 초탈한 듯 웃으며 민성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진담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진짜라니까 그러네.”
“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에드워드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수염을 실룩이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드워프의 중얼거림이 계속될수록, 숙이고 있던 그의 허리도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민성은 생각에 잠겨 있던 탓에 미묘하게 변해가는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놈은 내가 7층을 이용하는 걸 알고 있었어.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으면 진작 그랬을 거야. 하지만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지? 놈도 루비의 출처에 관심 있는 건가? 아냐, 그건 아닐 거야. 놈은 상점 주인이잖아?’
수많은 고민들과 추측이 머리를 오갔지만, 이렇다 할 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실례되는 행동인 건 알고 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정보 확인.”
샐쭉한 얼굴로 민성을 바라보던 에드워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민성의 정보가 담긴 네모난 창이 나타났다.
‘아, 설마 그건가!’
동시에 민성의 눈도 번쩍 빛났다. 의심이 일상이 된 탓에 등잔 밑을 보지 못했다.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과거부터 존재했던 상점. 수많은 손님들이 이용했을 것이고, 그 중에는 루비를 이용하던 손님도 있을 게 분명했다.
‘이 새끼……. 적당히 사용하라고 부른 거구나.’
7층을 이용하던 옛 손님들 역시 루비를 사용해 단기간에 강해졌을 것이고, 그러한 손님들을 지켜보는 코인 사용자들은 상실감이 컸을 게 뻔했다. 손님들 사이에 격차가 심해져 상점 내 불화를 초래하자, 결국 상점에서는 루비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손님에게 나름의 제재를 가하기로 한 것이다. 꽤나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놈이 저자세를 취하는 이유까진 밝히지 못했다.
“그 루비 말인데…….”
민성은 조용히 읊조리며 차와 곁들인 과자를 집었다. 놈의 목적을 알았으니 남은 것은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뿐이었다. 그때,
“음, 음……. 그런 거였습니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 루비 사용자시면서 그렇게 오리발을 내미신 겁니까?”
정보 창을 쭉 훑은 드워프는 손바닥을 탁 치곤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지?’
일순간 달라진 분위기에 민성은 살짝 긴장한 채 에드워드를 노려봤다.
털썩-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농담에 맞장구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쇼!”
드워프는 우렁차게 소리치며 바닥이 이마에 닿을 정도로 바짝 엎드렸다.
“…….”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민성은 과자를 입에 넣는 것도 잊고 얼빠진 얼굴로 드워프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설마 기억마저 지워버리고 유희를 즐기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유희를 즐기기엔 최고의 방법이죠! 역시 위대하신 분다우십니다!”
에드워드는 방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거듭 사죄했다. 무엇이 그리 두려웠는지 반짝이는 그의 머리에는 땀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유희? 위대하신 분? 설마…… 이 자식, 날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것보다 기억을 지웠다는 건 또 뭔 소리야?’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상황을 유추해내던 민성은 이윽고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눈을 번쩍였다.
“일단 좀 일어나지? 계속 바닥에 엎어져 있으면 대화가 안 되니까.”
“예!”
민성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에드워드는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으니 설명을 듣고 싶다.”
“예, 뭐든 하문하십쇼!”
민성은 계속 눈치를 살피는 드워프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기억을 지웠다는 말과 유희. 그건 무슨 뜻이지? 그리고 위대하신 분은 지배자를 가리키는 건가?”
“지배자라니요! 위대하신 분께서 한낱 미물 같은 놈들과 동급이실 리 없잖습니까?”
“…….”
‘지배자가 벌레 같다니……. 이 자식 도대체 날 뭘로 착각하고 있는 거야.’
방 안을 울리는 에드워드의 우렁찬 함성에 민성은 당혹스러움을 속으로 삭이느라 힘써야만 했다.
지배자.
회생불능이라 생각했던 그의 눈도 감쪽같이 살렸을 뿐더러 타워 주변을 안전지대로 만든 존재. 그의 차원을 통솔하는 통솔자이자 수장 격인 인물이었다. 헌데 그런 존재를 벌레 같다하다니.
‘이거 잘못하다간 훅 갈 수도 있겠는데. 루비 이거, 도대체 어떤 양반들이 사용했길래 그런 착각을 하는 거야?’
놈의 착각을 적절하게 이용하려 했지만, 오히려 지뢰를 밟은 기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놈의 착각을 이끌어 루비의 정체가 미치도록 궁금해졌다.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위대하신 분께서 유희를 즐기신다 하지만 최소한의 정보는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고로 제가 유희에 방해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드워프가 막중한 임무를 받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두들기자, 민성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드워드의 설명이 시작되자, 민성의 표정도 점차 놀라움으로 굳어져갔다.
“……설명은 여기까집니다.”
“…….”
민성은 긴 설명을 끝내고 테이블에 놓인 차를 물 마시듯 들이켜는 에드워드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제 이해가 되셨습니까?”
“후…….”
‘개소리도 듣다 보니까 그럴듯하게 들리네. 이래서 한 번 사이비에 빠지면 정신 못 차리는 건가.’
워낙 장대한 이야기였기에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민성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에드워드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태초에 일곱의 신이 존재했고, 그들은 신의 고유권능인 창조를 이용해 가지각색의 차원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곤 신들은 그들만의 규율을 만들었는데, 차원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그 후, 창조를 끝낸 신들은 각기 거느리고 있던 하위 신들에게 원하는 종족을 창조할 것을 명했고, 하위 신들은 각자의 입맛에 따라 다양한 종족을 만들어냈다.
피조물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하위 신들은 일곱 신의 지시에 따라, 각 차원에 속해 있는 생명체들 중 가장 강대한 이를 지배자로 선별해 차원을 관리하게 했다.
일곱 신들은 피조물들이 만들어가는 사회와 문명을 보며 즐거워했지만 그것도 잠시. 단순한 구경으로 만족하지 못한 일곱 신들은 피조물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원했다. 결국 신들은 각 차원에 맞는 피조물로 변해 그들의 삶을 느끼며 유희를 즐겼다. 와중 좀 더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일곱 신들은 뜻을 모아 어떤 차원에서건 편안하게 유희를 즐길 수 있도록 모든 차원과 연동된 거대한 타워, 상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대충은. 그럼 루비는 유희 나온 신들을 위한, 신의 재화라는 거네. 난 신이라는 소리고? 일말의 재미를 위해 기억까지 지우고 유희를 나온 신?”
말하면서도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몽상가 놈이 상점 점장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상점도 망할 것만 같았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에드워드는 다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곤 낮은 자의 자세를 보였다.
“그럼 내 거지같은 과거도, 루비 모으려고 뺑이 친 것도, 전부다 유희의 일환이겠네? 나는 고통을 느낄 때마다 희열하는 변태 새끼인 거고? 그치?”
민성의 싸늘한 빈정거림에 드워프의 굵은 손가락 사이에서 땀방울이 새어나왔다. 사실 에드워드는 억울했다. 차원전쟁을 연 뒤, 유희는 거들떠도 안 보고 전쟁에만 열광하던 신들이다.
“계속 전쟁에나 몰두할 것이지. 젠장할…….”
“뭐라고?”
에드워드의 중얼거림을 들은 민성이 매섭게 바라보자, 드워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것보다 저는 아무래도 일개 관리인이다 보니 그 이상의 내용은 모릅니다. 다만 그냥 얻으면 재미가 없다 하여 유희 때마다 랜덤한 방식으로 루비를 수급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랜덤이라는 말에 민성의 표정이 굳자, 드워프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 탓에 위대하신 분께서도 찾으시느라 고생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기억까지 지워버리셨으니까요. 역시 위대하시고 위대하신…….”
“하아…….”
민성은 재차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감당 못 할 정보를 들은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려 짜증이 났다.
“근데 내가 누군 줄 알고 자꾸 위대하다 하는 거냐?”
“예?”
“신이 일곱이라며. 그중에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는 거냐고.”
민성의 날카로운 말투에 에드워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침묵했다.
“됐다. 이제 나가게 상자나 내놔.”
민성은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찜찜하고 불편한 마음, 강화석을 얻어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자, 민성의 시선이 싸해졌다.
“설마…… 물량 없는 건 아니지?”
“여, 여기 있습니다!”
민성은 다이아로 덮여 영롱한 빛을 내는 상자를 보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달랑 한 개? 나랑 장난하고 싶다고?”
“절대 아닙니다! 보기에는 한 개처럼 보일지 몰라도 1,200개가 겹쳐 있습니다! 받아보시면 압니다!”
“그래. 알았으니까 빨리 내놔.”
민성이 손을 내밀자 에드워드는 상자를 감싸듯 꼭 껴안았다.
“바람직한 유희를 위해서라도 계…… 계산은 확실히 해주셔야 합니다!”
“…….”
할 말을 잃은 민성은 픽 웃으며 에드워드의 손을 콱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