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88화 - 기습공격(3)
“당연히 승낙이지.”
그러자 네모난 칸으로 나뉜 커다란 창이 민성의 앞에 나타났다. 민성은 곧장 거래 창 하단에 있는 동전 모양의 아이콘에 손을 뻗었다.
띠링-
[5,000코인을 거래 창에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래.”
[보유하신 코인이 부족합니다.]
‘이제 여기가 관건이다. 제발…….’
민성은 떨리는 마음으로 원하던 메시지가 나타나길 소망했다.
[대체재화인 루비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좋았어!’
민성은 속으로 쾌재를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만 해오던 도박이 통했으니 기쁨은 배가 되었다. 다른 손님들과 거래할 때도 코인 대신 루비를 사용할 수 있을까? 마지막 관문이었던 그 질문에서 물음표를 뗄 수 있다.
‘짜식……. 기분이다!’
[3루비를 사용합니다.]
민성은 보장금액보다 1,000코인을 더 올리곤 거래완료 버튼을 눌렀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저……. 1,000코인이 더 들어온 것 같은데요?”
“응? 알고 승낙한 거 아니었어? 뭐, 내가 기분이 좋아서 1,000코인은 서비스로 줬다. 스킬 박스를 사건 아이템 박스를 사건 좋을 대로 사용하고, 이제 빨리 비켜.”
요정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민성은 싱긋 웃으며 손을 옆으로 휘휘 흔들었다.
“자……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요정은 복권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자리를 내줬다. 민성은 잽싸게 요정이 나온 자리를 차지하곤 남모르게 히죽거렸다.
“미친……. 진짜로 6,000코인을 준 거야? 제기랄! 내가 팔 수 있었는데!”
“저기……. 혹시 또 자리 필요하진 않나요?”
경매낙찰에서 밀려난 손님들이 민성 주위를 기웃거렸지만, 민성은 철저한 방관으로 대응했다. 정확힌 카운터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무슨 박스를 살까 고민하느라 하이에나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카운터까지 대기 손님은 불과 넷. 사야 할 박스를 미리 정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당연한 걸지 모르지만 박스 등급이 높을수록 강화석이 나올 확률도 높아. 아무래도 양보단 질로 가는 편이 낫겠지. 최상급 상자가 5,000코인이고, 내가 생각해둔 루비는 3,000개니까 이걸 코인으로 환산하면…….’
“네, 다음 분 오세요!”
어느덧 그의 차례가 되자, 안내원의 음성이 뚜렷하게 들려왔다.
“갑니다.”
생각을 갈무리한 민성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운터 앞으로 이동했다.
“최하급 상자로 드릴까요?”
악어 같은 모습을 한 안내원은 민성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더니 다짜고짜 주문을 받았다. 수많은 손님들을 상대한 탓인지 안내원의 음성은 어딘가 날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번 안내원이 더 귀여웠는데…….’
흰 털로 덮여 둥근 코를 씰룩이던 안내원을 떠올린 민성은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최상급으로 주세요.”
“……네?”
안내원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묻자,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재차 요청했다.
“최상급으로 달라고요, 최상급.”
“다, 다시 주문 받겠습니다. 최상급…… 맞으시죠?”
“예.”
최상급이라는 말에 민성의 주변 역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들었어? 최상급으로 달라 한 거?”
“코인이 썩어나기라도 하나 보지. 겉보기엔 별거 없어 보이는 놈인데 보기보다 잔뼈가 굵은 모양이야.”
“보아하니 이번 강화석 노리고 전 재산 투자하는 것 같은데. 저 최상급 상자 하나 사려고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을까? 어차피 안 나올 텐데…….”
간간이 최상급 상자를 구매해 가는 부류라 여긴 손님들은 시기와 질투, 그리고 묘한 안쓰러움이 담긴 시선을 보내며 민성을 주목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민성은 박스를 가지러 가려던 안내원을 불러 세웠다.
“네?”
“개수 말하는 걸 깜박해서요.”
“개…… 개수요? 개수라니요. 하…… 하나만 구매하시는 것 아니었나요?”
안내원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요동쳤지만, 민성은 아랑곳 않고 주문을 이어갔다.
“네. 1,200개 주세요.”
“…….”
민성의 말이 끝나자, 그의 주변으론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한 침묵만이 자리를 감쌌다.
“드…… 들었어? 1,200개? 저 새끼…… 완전 미친 거 아냐?”
“흥. 최상급 상자 주문할 때부터 알아봤어. 딱 봐도 거지새끼가 허세부리는 거잖아! 뭐? 1,200개? 재정신이 아닌 거지. 상점에서, 그것도 안내원한테 공갈쳤다가 좋은 꼴 못 볼 텐데.”
등 뒤에서 신랄한 비판이 들려왔음에도 민성은 꿋꿋이 거래를 이어나갔다.
“빨리 주세요. 현기증 나니까.”
“최상급 상자…… 1,200개…….”
털썩-
도합 6백만 코인에 달하는 물량을 주문 받은 탓인지, 안내원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서 업무를 보던 안내원이 황급히 쓰러진 안내원의 자리를 메웠다.
“죄송합니다, 손님! 저 아이 신입이라 서비스가 미흡했던 점 다시 사과드립니다.”
“죄송하면 얼른 갖다 주세요.”
“네,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새로이 민성을 응대하던 안내원은 뒤따라온 동료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넌 가서 빨리 점장님 모셔와.”
동료가 황급히 카운터 뒤편에 있는 창고 같은 건물로 뛰어 들어가자, 안내원은 다시 미소 지으며 민성을 응대했다.
“최상급 소모품 상자 1,200개라고 하셨죠, 손님?”
“네. 벌써 몇 번이나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1층에 계신 안내원분들은 빠릿빠릿하게 처리해주시던데. 이쪽 분들은 업무 경험이 부족하신가 봅니다.”
“호호호…….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민성이 불만을 터트리자, 안내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날카롭게 민성을 노려봤다.
“헌데 손님. 만약 고의로 영업을 방해했다 판단했을 시 그에 따른 처벌을 받으실 수 있는 점 알고 계신지요?”
“지금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민성은 픽 웃으며 안내원의 얄팍한 눈을 마주 노려봤다. 안 그래도 시선 쏠리는 것이 거슬리던 와중에 괜한 의심까지 받으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럼 상자 가져와서 확인해보든가. 내가 구매할 여력이 있는지 없는지. 근데 무고한 손님을 의심한 안내원을 처벌하지는 못하나?”
더 이상 존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민성은 한껏 빈정거리며 안내원의 성질을 돋우었다.
“뭐예요?”
발끈한 안내원이 목소리를 높이려던 찰나,
“거기까지!”
창고 같은 건물에서 나온 남성이 버럭 소리치며 안내원에게 다가왔다.
‘난쟁이?’
민성은 새롭게 등장한 남자를 주시했다. 짜리몽땅한 키와 얼굴을 덮은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매는 꽤나 박력 있어 보였다.
“그라니! 내가 손님들 응대할 때는 어떻게 하라 했지?”
“……친절하고 상냥하게요.”
“그걸 잘 알면서 손님과 마찰을 일으키려 해!”
난쟁이는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안내원을 혼내곤 그녀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저는 이곳의 점장이자 상점 관리 전반을 맡고 있는 드워프 에드워드라고 합니다. 저희 직원이 무례하게 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곤 민성에게 바짝 허리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게 민성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의 입장에선 푼돈을 사용한 것에 불과했지만, 상점 쪽은 아닌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이만한 일로 상점의 핵심인물이 나올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너무 경솔했나? 쯧……. 이럴 줄 알았으면 100개 정도만 주문할걸.’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조금 흥분한 탓도 있으니까요.”
민성 역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지금은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한 판매 업무를 맡고 있는 안내원과 점장은 다르다. 막말로 상점 블랙리스트에 올라 상자를 구매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물론 7층만 사용해도 무관했지만 이런 특수한 이벤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쓸데없는 다툼은 삼가는 편이 좋을 듯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손님. 주문하신 최상급 소모품 상자 말입니다. 물량이 물량인지라 잠시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어떠신지요?”
민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분위기를 살폈다. 호기심과 부러움 가득한 시선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죠. 저도 이 장소가 썩 유쾌하지는 않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작게 한숨을 내쉰 민성은 에드워드의 안내에 따라 창고 같은 건물 안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호오……. 창고가 아니고 집무실이었나?’
민성은 눈을 빛내며 작은 방 안을 살폈다. 자그마한 테이블과 소파 두 개, 그리고 벽 한편에 걸려 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점원들이 상자를 들고 들락날락하던 건물이기에 당연히 창고인 줄로만 알았건만, 이런 공간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자, 앉으시죠.”
에드워드는 이상하리만치 조심스럽게 자리를 권했다. 민성이 들어올 걸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테이블에는 김이 오르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혹시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에드워드는 슬며시 찻잔을 권하며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민성의 눈치를 살폈다.
“상점의 점장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생각보다 친절이 과하시군요. 제 집무실도 아닌데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어깨를 으쓱여 보인 민성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담화나 나누자고 따로 자리를 마련하셨을 리는 없고, 무슨 이유입니까? 대량으로 상자를 구매하려면 뭐, 따로 확인 절차라도 받아야 하는 겁니까?”
“물론 아닙니다! 다만 미리 방문하신다고 언질을 주셨더라면 제가 진작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말입니다, 허허허.”
호탕한 웃음과 달리 드워프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민성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천천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 새끼…… 뭐지?’
일단 호의를 베푸니 응해주고 있지만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함을 보인다. 분명 숨겨둔 꿍꿍이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말한 대로 상자를 구매하고 싶습니다만. 제가 시간이 없어서.”
하지만 그 꿍꿍이가 뭐건 상관없었다. 대량의 상자를 구매해 강화석을 확보한다. 그 외의 일은 전부 무시하면 그만이다.
“아, 그렇습니까? 역시 바쁘신 모양입니다. 유희를 나오셨다고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드워프는 송구스럽다는 듯 짤막한 허리를 펴지 못했다.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미친 새낀가?’
상점의 점장씩이나 되는 놈이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지껄이니 점점 미친놈이라는 가설에 무게가 실렸다. 그러나 민성은 꿋꿋이 미소를 유지했다. 상자만 구매하면 더 이상 난쟁이의 낯짝을 볼 일도 없을 것이다.
“이해하셨으면 얼른 상자를…….”
“혹시 루비를 캐시러 가시려는 겁니까?”
“……뭐? 지금 뭐라고 했어?”
아주 익숙한 단어가 낯선 이에게서 흘러나오자, 민성은 부릅뜬 눈으로 에드워드를 죽일 듯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