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화 - 기습공격(1)
42. 기습공격
“충성!”
군인들이 빳빳한 자세로 누군가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걸로 보아 높으신 양반이 방문한 것인가 했으나, 군인들 앞에 있는 인물은 연륜 있는 간부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 그래. 수고들 해.”
민성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저지선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가벼이 인사해주었다. 그리곤 그들이 열어준 통로로 아무렇지 않게 진입했다.
“인간, 이제는 얼룩덜룩한 인간들이 인간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게요.”
‘허참. 별일을 다 겪네.’
민성은 티노의 말에 호응해주며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사건의 발단은 저지선을 순찰 돌던 군인들을 맞닥뜨린 것에서 비롯했다. 민성을 목격한 그들은 헐레벌떡 다가와 저지선까지 안내하겠다고 자청했다. 그 덕에 새로이 얻은 투명 스킬을 사용해 조용히 진입하려던 그의 계획도 전부 무산되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민성 님을 발견하거든 필요한 것에는 최대한 협조하라는 상부의 명이 있었습니다.”
“나한테서 떨어져주는 게 협조해주는 건데?”
물론 민성은 슬며시 대검을 들어 보이며 거절의 뜻을 보였다. 한 달 전만 해도 총부리를 겨누던 놈들이 갑작스레 태세변환을 보이니, 거절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징계로 한동안 식량배급을 받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니 부디 민성 님의 목적지인 안전지대까지만이라도 호위를 맡게 해주십쇼…….”
“내가 너희 사정까지 일일이 신경 써줘야 하나?”
민성의 차가운 말투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듯이 애절하게 외쳤다. 결국 그들의 간청을 수락한 민성은 고위 장성급 대우를 받으며 안전지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 그 자식…… 쓸데없이 귀찮은 짓을 하고 있어. 뭐, 덕분에 쓸데없는 마나 지출은 아꼈으니 상관없지만.’
상부의 명이라 함은, 필시 박정후가 민성이 다시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 안전지대를 방문할 것을 예상하고 내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왜 굳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괴수들을 잡아주니 그 대가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조건 없는 친절 따위는 없다. 더욱이 상대가 상대인 만큼 같잖은 수작질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분명 숨겨둔 꿍꿍이가 있겠지. 원체 음흉한 새끼니까……. 부하나 상관이나 똑같은 것들이니…….”
저도 모르게 박정후와 이종범의 상판이 떠오르자 민성은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한쪽 입가를 위로 세웠다. 박정후가 제공해준 코트 덕에 그의 전력은 한껏 수직상승했다. 그런 이로운 수작질이라면 언제든 환영할 일이었다.
“뭐라 했나, 인간?”
“아니에요. 것보다 얼른 가죠.”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티노가 되물었으나 민성은 고개를 젓곤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는 타워를 향해 걸었다.
“예전보다 인간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인간.”
안전지대 안으로 들어서자, 티노는 내부를 빠르게 한 바퀴 돈 뒤, 민성에게 돌아와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이제 조금은 안정됐으니 다들 집으로 돌아간 거 같은데요. 생각보다 피해가 없기도 했고…….”
민성은 끝말을 흐리며 죽은 눈을 한 난민들을 바라봤다. 녀석의 말대로 안전지대 안은 예전과 달랐다. 여전히 수많은 난민들이 몸을 움츠린 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으나, 난민수용소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던 과거와 달리 확연히 그 숫자가 줄어든 듯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언론 플레이도 한몫하는 것 같고요.”
민성은 난민들 앞에서 연설중인 박정후를 노려봤다.
“수많은 사병들과 능력자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저희는 재해가 벌어진 지 두 달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서울 한강이남 지역의 탈환을 목전에 둔 상태입니다!”
협상할 때의 무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온화하면서도 강철 같은 강직함이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민성은 알고 있었다. 저 얼굴 이면에 숨겨진 그의 추악한 욕망을.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니…….’
그간 박정후가 알려준 정보를 따라 도시들을 배회하며 느낀 점이 있었다. 괴수들이 등장한 것치곤 생각보다 피해가 적다는 점이 그러했다. 다수의 인명피해야 그러려니 했지만, 거대한 괴수들이 출현한 것치곤 멀쩡한 건축물들이 많았다. 또한 방대한 숫자의 괴수들이 등장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놈들의 모습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보의 요지에 접근해 있는 혜정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통신해봤으나,
“미안하네. 나 역시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구먼. 그저 놈들이 북쪽, 북쪽으로 도망치듯 움직인다는 것 정도가 전부야. 좀 더 자세한 정보가 나오면 알려주도록 함세.”
돌아온 것은 나지막한 사과뿐이었다.
‘후……. 모르겠다. 어차피 모두 남 일이니 내 알 바도 아니고. 빨리 퀘스트만 끝내고 파업하자.’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민성은 고민거리를 저 멀리 던져버리곤 빙긋이 웃었다.
“이제 얼른 갑시다. 그놈의 도박장이랑 투기장 구경하러 가야죠.”
“그 전에! 언론 플레이가 뭐냐, 인간?”
“저기 저 사람들 보이시죠?”
민성은 난민들의 뒤에 서서 박정후의 연설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물건에 자기한테 유리한 말만 담아서 TV에 전송하는 걸 언론 플레이라 해요.”
민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티노는 안광을 번뜩였다.
“오! 그럼 저 인간들이 TV를 관리하는 건가! 아주 바람직하고 훌륭한 일을 하는 인간들이군! 좋아! 내가 직접 칭찬해주면 앞으로 더욱 양질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겠군, 케케케케!”
“……아니, 그게 아니고……. 어디 가!”
TV라는 말에 신이 난 티노는 민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설장으로 날아갔다.
“에휴…….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한숨을 내쉬며 홀로 타워로 몇 발자국 이동한 민성은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칭찬이랍시고 박정후의 머리를 꼬리로 쓰다듬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늦으면 혼자 들어갈 거니까 알아서 해요!”
민성은 티노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를 내지르곤 뒤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것은 단순한 시작일 뿐입니다! 조속히 서울의 완전한 탈환을 끝낸 뒤…….”
민성의 목소리가 컸던 탓일까, 그의 존재를 눈치챈 박정후는 멀어지는 민성의 등을 보며 미세할 정도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덜컥-
타워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오자 익숙한 광경이 민성들을 반겼다. 여전히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공간과 도화지 같은 공간을 이질적인 분위기로 변화시키는 검고 붉은 두 철문들이 민성의 눈에 들어왔다.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쓸모도 없는 걸 괜히 보상으로 줬겠어?’
타워로 들어오기 바로 전, 공헌도 랭킹에 든 대가로 받았던 땅에도 잠시 들렀다. 아직은 마땅한 용도가 없으나 언젠가 필요한 시점이 오리라.
“얼른 들어가자, 인간! 도박장! 투기장!”
“자꾸 재촉하면 줄 떡도 사라져요.”
금세 뒤따라 날아온 티노가 독촉하자, 민성은 나지막하게 대꾸하며 검은 철문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익숙하게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한기를 녹여주는 따듯한 온기가 민성의 몸 구석구석 맴돌았다.
‘일단 곧바로 7층에 가서 스킬이랑 소모품 상자를 사자.’
그 외의 남은 시간은 티노의 응석대로 투기장이나 도박장을 가면 될 것이었다.
“응?”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뒤, 이동하려던 민성은 얼떨떨한 얼굴로 내부를 살폈다.
“오늘은 한가한 날인가 보다, 인간.”
“이건…….”
티노의 말대로였다. 차원들에 평화의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왁자지껄하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유독 손님이 없었다. 평소의 3분의 1 남짓한 손님들만이 널찍한 1층을 배회하니, 더 썰렁하게만 느껴졌다. 수상쩍은 느낌에 민성은 곧장 광장으로 내달리듯 걸었다. 하지만,
“두터운 철갑 스킬이 2천 코인!”
“자, 전투에서 여벌 목숨 역할을 해주는 보험용 하급 엘릭서가 1천5백 코인밖에 안 합니다! 한번 보고 가요!”
일부 장사치들이 벌여놓은 좌판들과 스킬 북, 아이템을 힐끗 쳐다보며 스쳐가는 손님 몇이 보일 뿐이었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나?’
당황한 민성은 빠른 속도로 1층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랜덤 박스를 파는 좌판대도, 강화를 할 수 있는 빛 근처도. 확연히 줄어든 숫자의 손님들이 1층을 거닐 뿐이었다. 좀처럼 이유가 나오지 않자 민성은 광장으로 돌아가 한 좌판대 앞으로 다가갔다.
“이봐요.”
“잘 오셨습니다! 어떤 걸 보고 오셨습니까! 혹시 이 창을 보고 오신 겁니까? 그렇다면 현명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이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파리만 날리던 와중, 간만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에 신이 난 좌판 주인장은 윤택이 도는 창을 흔들어 보이며 설명에 열을 올렸다.
“좋아 보이기는 한데…….”
“손님. 아시다시피 3성 매물이 흔하지 않은 것, 아시잖습니까? 그런데 가격은 겨우 5천 코인! 상황이 상황인지라 저도 눈물을 머금고 파격할인 중인 물건입니다!”
민성이 망설이자 주인장은 재차 창의 장점을 설명하며 판매에 열을 올렸다.
‘겨우 3성 아이템을 진열해놓고, 뭐? 좋다고?’
주인장이 건넨 창을 들고 정보를 살핀 민성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창에는 미미할 정도의 스텟 상승효과가 붙어 있었다.
“것보다 평소보다 손님들 숫자가 많이 준 것 같은데. 상점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민성은 슬며시 창을 내려놓으며 질문했다. 적어도 관심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손님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켰다고 여겼다.
“……젠장. 손님인 줄 알았더니 풋내기였어?”
민성이 구매 의사를 보이지 않자, 주인장의 말도 자연스럽게 짧아졌다.
“지금 2층에서 기습공격하고 있으니 손님들이 없지.”
‘기습공격?’
뜬금없는 주인장의 말에 민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름 꽤나 상점을 자주 이용했다 자부하고 있었건만, 그런 단어는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습공격이 뭡니까?”
“엉? 그것도 몰라? 자네, 진짜 초심자였어? 어쩌다 운 좋게 살아남은 모양인데, 너랑은 전혀 무관한 일이니 신경 꺼.”
주인장은 툴툴거리며 거대한 팔로 조심스럽게 좌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3성 아이템 살 능력도 없는 놈이 들어서 뭐 하려고, 쯧…….”
민성이 재차 질문하자, 주인장은 귀찮다는 티를 내며 꺼지라는 듯 팔을 휘적거렸다.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여기 죽치고 있으면서 장사 못 하게 할 건데도?”
“…….”
민성이 싱긋 웃으며 좌판 앞에 주저앉자, 말을 잃은 주인장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점에선 가끔 가다 특수한 이벤트를 벌여. 상점을 이용하는 자들은 그걸 통칭해서 기습공격이라 부르고. 그래서 너같이 첫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초짜들은 모를 만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