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185화 - 외전
<외전>
그 남자의 하루
[자네 정말 할 생각 없나?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고급 아이템을 준비했네.]
“아, 그 고급 아이템 각하가 많이 쓰시면 되겠네요. 그럼 전 이만.”
[잠깐! 조건이나…….]
“거 아침부터 귀찮게 구네.”
통신이 끝나기도 전에, 민성은 아이템 창에 물빛 메달을 던지듯 넣곤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일어난 직후 다짜고짜 일거리가 있다며 통신하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이럴 땐 역시…….”
풍덩-
“어……. 좋다.”
민성은 눈을 감은 채 온천의 열기를 느끼며 낮게 신음했다. 뜨듯한 물의 기운이 몸 구석구석을 휘감아 돌자 작은 희열감마저 들었다. 박정후의 제안도 이미 뜨거운 물에 녹아 기억조차 나지 않는 듯했다.
“맥주만 있으면 딱인데.”
백화점을 털면서 몰래 가져놓은 맥주가 있긴 했지만, 아침부터 마시자니 묘한 거부감이 올라왔다.
“그럼 밤에 또 씻으면 되지! 아, 역시 집이 최고다.”
홀로 낄낄거리던 민성은 살짝 붉어진 고개를 슬며시 쳐들었다. 거대한 영겁나무의 가지들이 쉼터처럼 온천을 덮어주고 있었다. 비밀스러운 집의 카테고리에 포함된 텅 빈 공터를 활용해 온천을 얻고 나선, 언제나 기상과 함께 목욕하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가 돼버렸다.
[경고! 퀘스트 현무XX까지 제한시간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사용자께서는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나가볼까.”
“냥냥냥냥!”
한참 열기를 만끽하던 민성이 몸을 일으키자, 정장을 차려입은 조그마한 고양이들이 다가왔다. 집사 고양이 고용비로 100코인을 지불하고 얻은 고용인들이다.
“오. 고마워. 내가 이 맛에 거지같아도 루비 모으지.”
고양이가 내민 수건과 옷가지를 건네받은 민성은 재차 낄낄거리며 옷을 차려입었다. 그리곤 느긋한 걸음걸이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스러운 집 내부의 한 방 안. 기괴한 모형의 석상과 낡았지만 고풍스러워 보이는 도자기 등, 갖가지 수상쩍은 도구들이 8평 남짓한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흠……. 이건 여기로 할까…….”
천천히 방을 둘러보던 민성은 결심한 듯 아이템 창을 열었다. 그가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허름한 흔들의자였다. 방 끝에 의자를 배치한 민성은 곧장 흔들의자에 앉아 몇 번 몸을 움직여보았다.
삐걱-
“흠……. 좋은데?”
반동을 따라 의자에서 낡은 울림이 전해져왔다. 주워온 물건치곤 상당한 아늑함과 편안함을 제공했다.
‘역시 집이 있으니 꾸미는 맛도 남다르네.’
이제는 하루의 일과 중 하나가 된 조형물 감상시간. 의자의 흔들거림을 만끽하며 수집한 조형물들을 보는 맛은 꽤 신선했다. 집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리라.
생각의 방.
최초의 계획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방이었으나, 바깥에 굴러다니던 물건들을 하나둘 집어오다 보니 어느덧 창고에 가깝게 변해버렸다. 하지만 민성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마음에 들었을 뿐더러, 난장판이 된 현실에서 즐길 만한 여가생활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다들 제 목숨 부지하기 바쁘지 누가 영업하려 하겠어?’
소소하게나마 홀로 심야영화를 즐기던 생활도, 맛집을 찾아 움직이는 일도 이제는 꿈같은 이야기가 됐다.
“지금의 생활도 썩 나쁜 건 아니지만 아쉽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게 느껴진다 했던가.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됐을 때의 그 공백감은 생각 외로 컸다.
“후……. 이제 취미는 잠시 미뤄두고…….”
잠시간 방 안을 감상하던 민성은 천천히 눈을 감고 전날 동료들과 함께 했던 실험을 떠올렸다. 진행했던 실험은 총 2가지. 피에 젖은 블랙코트의 방어도와 새로이 얻은 세트 스킬, 그리고 코트에 내장된 스킬이 바로 그것이었다.
‘투명화는 확실히 엄청난 메리트야.’
실험결과, 코트는 신체뿐만 아니라 착용한 옷까지 완벽히 숨겨주었다. 기척은 감출 수 없었지만 그의 폭발적인 움직임과 함께 사용한다면 능력은 배가 될 게 분명했다. 더욱이 ‘유령 출몰’의 무서운 점은 투명화시킬 수 있는 대상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실험의 대가로 일행에게 스킬 출처를 속여야 했지만, 그 정도는 값싼 대가였다.
‘그리고 윈드 애로우는 좀 아팠었지.’
다양한 공격을 맞았지만 역시 제일 아팠던 것은 신의 스킬이었다. 부족한 마나를 이유로 전투에선 사용하지 않았던, 공기를 화살로 변형시키는 윈드 애로우. 화살을 필요로 하는 아이스 애로우와 달리 순수한 마나로만 이루어진 스킬이었기에 ‘바르타고의 피부’도 발동하지 않았다.
‘아이템 빨이 좋긴 하지만 아이템만을 의지하면 안 되지, 암.’
블랙코트 덕에 바늘에 찔린 정도의 고통만이 돌아왔지만 방어도가 높다고 무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속내와 달리 민성은 코트를 어루만지며 의자를 흔들어 재꼈다.
삐걱-
“그나저나 이거 은근히 잠 오네…….”
의자의 흔들거림에 취한 민성이 회상을 뒤로하고 잠에 빠지려는 찰나,
[어디?]
신의 무뚝뚝한 음성이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흡!”
민성은 잠깐 사이에 입가에 고인 침을 닦아내곤 퍼뜩 의자에서 일어났다.
[점심 준비 완료. 또한 할 이야기 있음.]
“그래.”
밥이라는 말에 민성은 씁쓸한 미소를 띤 채 방을 나와 거실로 이동했다. 그리곤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시바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하암. 또 가는 거냐, 싱싱한 주인?”
“그래. 빨리 열어줘.”
시바는 귀찮다는 티를 내면서도 어김없이 입을 커다랗게 벌려줬다. 민성은 감사의 뜻으로 녀석의 턱을 몇 번 긁어주곤 입속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임시 휴식처 안. 은은한 빛 아래, 두터운 털로 덮인 거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러게……. 햇빛 본 지 며칠이나 지난 건지…….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묘한 어두움이 공존하고 있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대화 속에서도 생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털썩-
“억!”
“형! 왔어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 얼른 식사하세요!”
민성이 허공에서 떨어지자, 기다리고 있던 진우는 잽싸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른 이들 역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민성을 맞이했다.
“왔어? 시장할 텐데 얼른 앉아.”
“바깥 상황은 좀 어때?”
민성은 살갑게 그를 맞이하는 지혜와 윤민수에게 인사를 건네며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제는 다들 익숙한가 보네.’
아이템의 효능이라 둘러대고 나선, 허공에서 떨어져도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다.
“거참. 먼저들 식사하시라니까…….”
손도 안 댄 통조림과 포장된 냉동식품을 본 민성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먼지 묻은 젓가락을 들어 통조림에 가져다 댔다.
“맛있네요. 이제 얼른 식사들 하세요.”
민성이 음식에 손을 대자, 그제야 사람들은 하나둘 식사하기 시작했다.
‘거참…….’
잠시 곁눈질하던 민성은 슬며시 젓가락을 내려놓고 거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와야만 식사를 시작한다. 어느덧 임시 휴식처의 암묵적인 룰이 돼버린 듯했다.
“왔나? 쓰레기 계속 착용? 잘 어울리긴 함.”
손을 털며 화장실에서 나온 신은 민성이 걸치고 있는 코트를 보곤 무미건조한 인사를 건넸다. 그의 목덜미에는 눈에 띄는 빨간 넥타이가 달려 있었다.
“어. 외관은 나름 쓸 만해 보여서 당분간 입고 다니려고. 것보다 몸은 좀 괜찮아?”
민성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전날, 그의 실험을 도와주기 위해 빈사상태까지 간 것치곤 꽤 멀쩡해 보였다.
“자고 일어나니 괜찮음. 네 회복스킬 덕.”
“……그래? 다행이네.”
실험을 끝낸 후에 사용한 ‘성자의 기적’이 확실히 제 몫을 한 듯했다.
“이 아이템. 상당히 유용. 감사.”
신은 빨간 넥타이를 툭툭 건드려 보였다. 수신자는 답할 수 없는 반쪽짜리 기능을 가진 물건이었지만 신은 나름 알차게 쓰고 있는 모양이다.
“뭘, 나중에 괜찮은 거 주우면 또 줄게. 그나저나 저 식사 방식 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매번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좀 그런데.”
민성은 힐끗 사람들을 쳐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신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사람들 나날이 불안감 증폭. 그걸 억제하는 것, 네 얼굴.”
“내 얼굴? 그게 무슨 말이야?”
민성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신을 바라봤다.
“네가 없으면 사람들 이곳에 영원히 갇힘. 고로 네 얼굴 보는 것만으로 안심가능.”
“…….”
확실히 신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 역시 임시 휴식처에서 생활했기에 더욱 신빙성이 높았다.
“안전한 장소 획득 전까진 필요한 행위. 아니면 내치는 것 역시 방법. 갈수록 분위기 부정적. 두 번째 방법. 상당히 합리적.”
“네가 데려온 양궁부원들도 있는데?”
“네 의사 더 중요. 집 주인 나가라면 나가는 것, 셋방살이 자의 숙명.”
신의 확고한 답에 민성은 허허로운 웃음만을 흘렸다. 신은 언제나 냉정하리만치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기계처럼 구는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기도 했다.
“최대한 빨리 안전한 장소를 찾는 편이 낫겠네. 아루는?”
민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조달했던 식량 바닥. 금일 식량 보충 계획. 그를 위해 숙면 중.”
신은 화장실 옆에 붙어 있는 방문을 슬며시 열었다. 커다란 새 옆에 딱 달라붙어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알았어.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이따가 출발하기 전에 불러. 문 열어줄게.”
밥을 먹으려면 밥값을 해라!
신의 모토 덕에 민성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식량 확보에서 배제됐다. 처음에야 반발했지만 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나야 그만큼 내 시간이 늘어나서 좋긴 하지만…….’
“고생.”
민성은 신의 인사를 뒤로한 채, 슬며시 임시 휴식처를 빠져나왔다.
‘이제 다시 자유시간인가.’
점심까지의 일정을 소화했으니 저녁식사 전까지는 온전히 그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민성은 곧장 비밀스러운 집으로 돌아와 짜둔 스케줄을 하나씩 소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쾅-
우람한 영겁나무에 머리를 처박고 나서야 민성은 괴성 지르는 걸 멈출 수 있었다.
“후……. 만만찮네.”
민성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어루만졌다. ‘죄악의 피로 얼룩진 세상’의 세트 효과 덕에 늘어난 모든 스텟 40. 비약적으로 늘어난 스텟만큼 그에 따른 적응기간도 필요했다. 특히 민첩의 영향을 받는 스킬 ‘바람을 타다’가 그러했다.
“상태창.”
이름: 강민성
나이: 23세
HP: 1,120
MP: 3,200
스텟:
체력: 56
근력: 57
민첩: 56(+37)
지능: 48
지력: 110(+50)
행운: 45
“큭…….”
빵빵해진 스텟들을 보니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스텟이 늘어나기 전에도 세상이 멈춘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정지한 정도가 아니라 역행하는 것 같네. 완전히 적응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세상에 무서울 게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전하던 상대들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
“좀 더 힘내볼까.”
적응시간을 끝내고 나면 그 뒤로 검술 연습과 버섯 탐방 등, 할 일이 많았다. 스산한 웃음을 흘리던 민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쾅-
“…….”
아직 스킬이 발동 중이란 사실을 깜박한 민성은 영겁나무 가지에 처박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