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184화 - 잔업처리(2)
[현재까지 구한 인간: 89,213명]
‘젠장. 아직도 10만 명이 안 됐어?’
민성은 혀를 차며 메시지를 닫았다. 현무승천 퀘스트 제한시간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탓에, 시련의 숲에서 돌아오고 나서 한 달간 쉴 틈도 없이 미친 듯이 서울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집을 나서며 했던 기대와 달리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갔다.
‘첫날만 해도 그렇게 많던 놈들이 안 보일 줄 누가 알았겠어.’
퀘스트의 요건은 구출. 즉, 괴수에 의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야만 수치가 올라간다. 그러나 정작 위험에 처한 사람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확실한 정보통이 있었기에 빠르게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후……. 지난 일 생각해서 뭐 하냐. 집에나 가자.”
민성이 홀로 중얼거리며 신에게 향하려던 찰나,
[잘 들리나?]
그의 머릿속으로 낮고 무거운, 익숙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민성은 고개를 쳐들고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전투복을 입은 군인무리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여튼 귀신같네요. 이번엔 또 뭡니까?]
민성은 아이템 창에서 물빛이 도는 메달을 꺼낸 뒤,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우리가 사소한 연락 하나 주고받지 못할 사인가?]
무감정한 말투가 머릿속을 울리자 민성은 픽 웃었다. 뻔히 연락한 이유가 보이는데도 수작질을 부리니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네. 못할 사인데요. 용건 없으면 끊을게요.]
[……잠시만 기다려보게.]
‘진작 그럴 것이지.’
상대방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 민성은 웃음을 꾹 누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어쩐 일로 또 연락하셨습니까, 각하?]
[……방금 자네가 뱀 괴수를 죽였다는 소식을 접했지. 자네가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별 탈 없이 발전소를 탈환할 수 있었어. 깊은 감사를 표하네. 자네의 뜨거운 애국심을 다시금…….]
얼른 다음 행선지만 얘기하면 될 것을,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려 한다.
‘나중에는 절까지 하겠네,’
정치가라 그런지, 대형 괴수 몇 번 잡아주고 나니 태세변환도 남달랐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마시고요.]
서서히 피곤함이 몰려오자 민성은 단칼에 말을 자르며 본론을 요구했다.
[강서구로 이동해주게. 그곳의 대형 전력 발전소를 다시 탈환해줬으면 해. 자세한 사항은 그곳에 있는 병력들에게 들을 수 있을 거야. 보상으론 5성 스킬을 준비했어. 어떤가? 이번에는 승낙…….]
박정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성은 메달을 다시 아이템 창에 넣었다. 정보를 얻었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멍청한 새끼.”
계약은 하지 않되, 당장 필요한 정보는 쏙 빼먹는다. 그리곤 늘 그렇듯 끝은 발신차단. 그의 확실한 정보통의 정체였다. 그러나 이제 퀘스트 완수까지 1만 명 남았으니, 아마도 이번 정보교신이 마지막이 될 듯했다.
‘아이템이었으면 조금 더 들어봤겠지만…….’
코트를 얻고 난 후론, 아이템이라는 말에 몸이 절로 반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새로이 증가한 민첩 덕에 ‘속도를 올려라’에 다시 적응하는 시간을 겪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만족스럽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었다.
“것보다 강서구라…….”
민성은 목적지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간간이 연락을 취하는 혜정의 말에 따르면 강서구와 강동구를 끝으로 한강이남 지역은 다시 인간의 손에 들어온다 했었다. 그중 혜정은 강동구로 이동한다 했으니 박정후가 그를 강서구로 보낸 듯했다. 자세한 건 항상 그랬듯이 가보면 알 일이었다.
“하여간 대단한 땡중이야.”
민성은 픽 웃으며 어딘가에 있을 혜정을 떠올렸다. 총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니 결국 자력사의 강대한 무력만으로 서울 남부지역을 다 수복했다는 말이 됐다. 하지만 민성은 몰랐다. 퀘스트 때문이긴 하지만 그 역시 수많은 괴수들을 죽임으로써 생존자들 사이로 은연중 이름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끝났으면 이동.”
“그래. 식량도 어제 잔뜩 비축했으니까 돌아가서 저녁이자 먹자. 아, 그전에…….”
민성은 신과의 대화를 잠시 중단하곤 다가오는 군인들을 바라봤다.
“충성! 대위 한시우, 각하의 명을 받고 괴수의 시체를 인계 받고자 합니다!”
무리의 선두에 있던 군인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민성에게 경례했다. 대위의 뒤편으론 정렬한 군인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민성을 응시했다.
“혹시 우리도 죽이진 않겠지?”
“나도 처음 봤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시발…… 개 떨리네…….”
“가져가요.”
뱀의 몸에서 뛰어내린 민성은 가져가라는 듯 가볍게 손짓해 보였다. 으레 그가 괴수를 죽일 때마다 군인들이 사체를 회수해가는 일은 이제 익숙한 일과 중 하나였다.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민성의 허락이 떨어지자, 군인들은 그제야 안도의 낯빛을 띤 채 죽은 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여럿이서 낑낑거리며 잘려나간 머리들과 몸통을 트럭에 싣는다.
“연구하려고 가져가는 거겠지?”
민성의 낮은 중얼거림에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에게는 쓰레기에 불과할지 몰라도 연구원들에게는 귀중한 연구대상일 게 분명했다.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들. 좋은 연구 자료 예상.”
“도대체 어디로 가져가는 걸까? 연구할 장소는 있나?”
“질문. 좋은 해답 나올 수도.”
신은 민성의 왼쪽 귓불에서 덜렁이는 귀걸이를 가리켰다. 그러나 민성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모르는 영역이야. 알아 봤자 도움도 안 될 것 같고. 그보다 이제 이동하자. 피곤하다.”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줄곧 대검만 휘두른 탓인지, 어깨가 무거웠다.
“휴식. 필수.”
“그래. 푹 쉬고 내일은 상점 좀 다녀와야겠어. 언제까지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단순한 느낌이지만, 조만간 상점 자유이용권 만기일이 올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지배자였다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무조건 다른 차원에 선전포고했다.’
총이 통하지 않는 대다수의 괴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반드시 능력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할 뿐더러 강한 능력자 역시 전무하다시피 한 현 상황. 결국 필요한 것은 능력자이고, 다수의 능력자를 양산해내기 위해선 타 차원과의 전투가 필요했다. 하지만 만약 지배자가 그러지 않는다면?
“다 때려치우고 집에서 농사나 짓든가, 아니면 어떻게든 이민 갈 방도를 모색해야지.”
“다시. 못 들었다.”
중얼거림을 들은 신이 되물었지만, 민성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음?”
갑자기 뒤통수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자 민성은 고개를 쳐들고 맞은편에 있는 빌딩을 노려봤다. 하지만 반투명한 유리 탓에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누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곧 빌딩에서 시선을 거둔 민성은 찝찝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분주한 군인들 이외에 보이는 이가 없었다.
“생존자?”
“……그렇겠지?”
생존자의 시선이 아니냐는 신의 물음에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신과 함께 정리되어가는 현장을 뒤로한 채, 거리를 빠져나갔다.
한편, 빌딩 안에서 민성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의 주인은 애매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힘 빠졌을 때 곧바로 가서 쳐 죽이면 될 걸 왜 뜸 들이는 건데?”
우천은 날카로운 말투로 옆에 있는 여인에게 쏘아붙였다. 놈과 뱀의 사투가 끝나고 당장 뛰쳐나가려 했지만 여인이 제지해 그러지 못했다.
“저 아이. 아무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죽였어.”
“그런데?”
우천의 물음에 여인은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부복하고 있던 남자가 재빨리 의자를 가져다 그녀 앞에 놓았다.
“그런데라니? 네가 상대했다면 최소한 백호는 꺼냈어야 할 상황 아니야? 근데 저 아이는 아무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어. 내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
여인의 상냥하면서도 신랄한 비판에 우천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 한참 뜸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보다 강하다는 소린가?”
“말했잖아. 저 아이는 볼 때마다 달라진다고.”
단순히 스킬 쿨타임이 돌아 사용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 사실을 모르는 두 남녀는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도 열쇠는 회수해야 한다. 늦기 전에 당장…….”
“멍청하긴! 저 아이의 스킬이 빠지면 그때 들어가자는 소리잖아! 자꾸 이해력 부족한 것 티 낼래?”
“끙…….”
자하의 음성이 올라가자 우천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평소 나긋한 모습만 보이던 그녀가 화를 낼 땐 입을 꾹 다무는 것이 정신에 이로웠기 때문이었다.
“급할 것 없잖아? 문은 우리한테 있고 어차피 저 아이, 열쇠 사용법도 모를 테니까 말이야. 신속한 것도 좋지만 정확하면서 신속해야지.”
“난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라.”
우천은 더 이상 엮이기 싫었는지 문을 박차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자하는 다시 바깥을 바라봤다. 유리 너머로 도로를 빠져나가는 민성의 모습이 눈 속으로 뚜렷이 들어왔다.
“스킬을 사용할 땐 죽일 생각으로 사용하랬더니,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죽여? 죽이기 전에 제대로 교육시키고 죽여야겠어.”
자하는 단검 끝으로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퉤!”
다음날, 여의도의 한 폐건물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민성이 인상을 쓴 채 밖으로 나왔다.
“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왜 또 박살이 나 있는 건데.”
강서구로 이동하기 전, 상점 이용할 생각에 확 뛰쳐나간 것이 화가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 사용한 문은 폐쇄해야 할 듯했다. 민성은 코트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저 멀리 보이는 타워를 빤히 쳐다봤다.
‘거기서 그란칼 먹이로 1,000개. 보험용으로 500개 정도 더 빼놓을까…….’
퀘스트를 진행하며 틈틈이 모은 루비가 5,000개. 그나마도 1,500개를 제외하면 남은 건 3,500개뿐이다. 그 안에서 최대한 알차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편 민성이 알찬 쇼핑 계획을 세우는 와중 티노는,
“이번에 들어가면 10회 달성이다, 인간! 도박장! 투기장!”
민성의 귀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와……. 그걸 세고 있었어요?”
녀석은 첫 방문부터, 몇 차례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간 일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TV 채널도 그렇고, 예전부터 녀석은 쓸데없는 곳에서 탁월한 기억력을 보였다.
“당연한 것 아닌가! 관심사는 언제나 체크해야 한다, 인간!”
민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자, 티노는 우쭐해져 꼬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아니, 그런 건 기억 잘 하면서 왜 선생에 관해서 질문하면 기억하는 게 없어요!”
시련의 숲을 나오고 나서, 민성은 곧장 티노에게 선생에 관련된 정보를 얻고자 했었다. 하지만 티노는 선생이 주민들의 정보를 알려준 것 외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했다.
“에효……. 그건 그렇다 칩시다.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떻게 루비를 알차게 사용할지 고민을…….”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인간! 도박장! 투기장!”
녀석의 고함에 결국 민성은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일단 갑시다! 가야 도박장이건 투기장이건…….”
“도박장!”
“간다니까!”
간만에 녀석의 목을 잡고 시원하게 흔들어주고 나서야 티노는 잠잠해졌다.
“갈 테니까 얌전하게 따라와요. 알았죠!”
티노가 승낙하자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