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183화 - 잔업처리(1)
“너희와 양놈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 홀로 남아 있던 청년이 임금 같은 것과 뭔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김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년은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바싹 붙였다.
“대화 내용은? 그는 뭐라고 했지?”
냉정함을 유지하던 소년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김도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모른다.”
“뭐?”
“모른다고 했다. 우리 역시 곧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현장에서 이탈해버렸으니까. 크어어억!”
김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찍이 다시 그의 목을 강하게 옥죄어 들었다.
“버릇없는 새끼. 감히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해! 내가 당장…….”
“대…… 대장의 말은 사실입니다! 함께 있던 제가 증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디 형님의 목숨만은…….”
호흡곤란에 김도진의 동공이 붉게 충혈되자, 곁에 있던 수하들은 여인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했다.
“백야 님. 어쩔까요?”
“그래……. 같은 놈이었어. 예지를 벗어난 존재가 둘씩이나 있을 리 없지. 그렇다면 열쇠 역시 그의 손에 들어갔겠어.”
의견을 구하는 여인의 물음에도 백야는 상념에 잠겨 홀로 중얼거렸다. 평소 무표정한 모습과 달리 백야의 얼굴에는 미세한 균열이 나 있었다.
“……백야 님?”
“더 이상 그들에게 볼일은 없다.”
소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은 채찍을 들고 있던 손을 홱 잡아당겼다.
푸확-
그러자 무릎 꿇고 있던 세 남자의 목에서 피분수가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그보다 백야 님. 구태여 열쇠의 행방을 찾으실 필요가 있으셨나요? 이미 문은 열려 있지 않은지요?”
여인은 몸과 분리되어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을 툭 밀치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부릅뜬 망자의 눈이 원통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년이 또 정신 못 차리고 딴죽 거네. 언제 백야 님이 쓸데없는 곳에 투자하시는 것 봤어?”
“대가리가 텅텅 빈 새끼라 생각조차 못 하는 놈이 말만 많네.”
남자의 도발에 발끈한 여인은 그를 사납게 노려봤다.
“아직 완벽하게 열린 것이 아니다. 열쇠를 이용했다면 지금처럼 작은 소란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그 말씀은…… 이번 일이 백야 님의 예지와 저희의 의중과는 무관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소년은 대답 대신 허공에서 낡고 허름한 종이 한 장을 꺼내 여인에게 넘겼다.
“이…… 이놈은!”
종이를 읽어 내리던 여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꽤나 익숙한 인물이 종이 안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로써 확신했다. 열쇠는 놈의 손에 있다.”
“예? 하지만 놈의 동료만 보였을 뿐, 놈이 던전에 들어온 걸 보진 못했는데…….”
소년은 당황한 여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와 네스트가 보스를 상대할 때 갑자기 나타난 놈과 종이 속의 인물, 동일인물이다. 아마 아이템을 사용해 얼굴만 바꾸고 들어왔던 게 틀림없다.”
“예?”
여인은 믿기 어렵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며 들고 있는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백야 님. 그 부분은 저 역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제 대검조차 받아내기 힘들어하던 애송이입니다. 헌데 그런 놈이 보스를 죽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 역시 놀랍다는 듯 물었다. 처음 자각사에서 대면했을 때만 해도 호승심 넘치는 피라미라 여겼건만, 그들조차 버거워하던 보스를, 그것도 홀로 잡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납득가지 않았다.
슥-
“그러니까 지금도 멀쩡히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갑작스레 소년의 그림자에서 상냥한 음성과 함께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마…….”
“어머, 자하라는 예쁜 이름도 있는데 굳이 무명으로 부르실 필요가 있나요?”
그림자에서 걸어 나온 여인은 조용히 중얼거리는 남자에게 미소를 던졌다. 그리곤 곧바로 소년 앞에 부복했다.
“그간 강녕하셨나요, 백야 님? 오랜만에 존안을 뵈오니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하의 나긋한 음성에도 소년은 고개를 한번 까딱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자하는 싱긋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계약에 성공해, 계약자끼리 간접적으로 위치를 알 수 있는 점을 이용. 민성이 자주 오가는 지역에 혈령대를 대기시켜 정보를 얻은 것까지 상세히 설명했다.
“문을 이용한 도주 스킬이라…….”
“네. 놈이 문 안으로 들어갈 경우 간접적인 위치조차 잡히지 않으니 나와 있을 때 죽여야 합니다.”
자하의 설명이 끝나자 잠시간 고심하던 소년은 손가락을 펴 남자를 가리켰다.
“이제 탐색은 됐다. 우천을 붙여주겠다. 가서 열쇠를 회수해 와라.”
“예? 제가 말입니까?”
소년은 느닷없는 지명에 당황해하는 우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했는지 우천은 쥐고 있던 대검마저 놓쳤다.
“시간의 흐름을 타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다. 자하만으로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자각사 시절의 놈이라면 자하와 혈령대만으로 차고도 넘쳤겠지만, 지금은 다를 게 뻔했다. 더욱이 네스트와 그들이 합세하고도 획득할 수 없었던 열쇠를 얻은 놈의 능력. 얕잡아봤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당할 확률이 높았다.
“훌륭하신 판단이에요, 백야 님. 그 아이, 볼 때마다 불쑥불쑥 커버려서 저도 가끔 놀란답니다.”
자하는 예의 상냥한 웃음을 치며 슬며시 우천에게 다가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물론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긴 하지만요.”
“한동안 미친년 하나만 상대해서 좋았는데…….”
자하를 노려보며 혀를 끌끌 차던 우천은 이내 소년 앞에 다가가 부복했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우천은 채찍을 든 여인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괴수들이 판치는데 백야 님의 신변을 저년에게만 맡기기에는 좀…….”
“뭐야?”
우천의 말에 발끈한 여인이 채찍을 쳐들었으나, 소년의 잔잔한 음성에 가로막혔다.
“걱정 마라. 나는 교주님의 명을 따라 당분간 본교에 가 있을 생각이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우천은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열쇠의 회수에만 전념해라. 열쇠를 회수하는 날, 우리가 그리던 이상적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충!”
소년의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 있던 이들은 소년을 향해 고개 숙이고 바닥에 엎드렸다.
***
50. 잔업처리
*
서울의 도심지의 한 대로변.
깡-
인적이 없어 황량하기 그지없는 거리에서 쇠 마찰음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빌딩 사이, 4차선 도로를 점령한 거대한 몸집을 가진 뱀을 상대로 누군가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야! 잠자코 좀 뒈져라!”
“샤악!”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대검을 휘둘러댔다. 코끼리와 개미의 전투. 누가 봐도 남자가 불리해 보였다. 하지만 도로 주변에는 떨어져 나간 뱀 대가리 8개가 축 늘어져 있었다. 오히려 몸집과 달리 뱀은 머리를 틀어대며 남자의 공격을 피해내기 바빴다.
“야, 이 새끼야! 아까처럼 해! 아까처럼! 몸집은 산만 한 새끼가 왜 이리 도망만 다녀!”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분통을 터트리며 뱀의 몸체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 순간 뱀의 머리에서 걸쭉한 녹빛 액체가 쏟아져 나와 남자의 진로를 막았다.
치이익-
“아오!”
남자가 몸을 피하자 액체가 떨어진 도로는 금세 구멍 뚫린 치즈처럼 변해버렸다.
“샤아아악!”
민성은 약 올리듯 독니를 보이며 혀를 날름거리는 대가리들을 죽일 듯 노려봤다. 처음 상대할 때만 하더라도, 당장 몸을 삼킬 것처럼 대가리를 디밀던 놈이었다. 그러나 단숨에 머리 몇 개가 날아간 뒤론, 지금처럼 방어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머리 날아갈수록 민첩함.”
“이럴 줄 알았으면 저 큰 머리부터 먼저 잘라낼 걸 그랬어.”
뒤에서 들려오는 신의 음성에 민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잘라낸 머리들과 다르게 독액까지 뿜어대는 탓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일 놀라운 점은, 세트 아이템 효과로 극도로 상승한 그의 움직임을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스킬. 쿨타임?”
신의 물음에 민성은 재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거대한 뱀을 마주치기 전, 이미 앞서 상대한 괴수들 덕에 스킬들을 거의 소모한 상태였다.
‘쿨타임 줄여주는 아이템이나 스킬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수월한 전투가 가능했으리라. 민성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광전사의 외침이 남긴 했는데, 그것만으로 부족할 것 같은데.”
“쿨타임 돌아옴. 내가 움직임 제한. 곧바로 타격 개시.”
“좋아. 얼른 마무리하고 쉬자고.”
신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활시위에 세 대의 화살을 걸었다. 각각의 화살 끝에는 서늘해 보이는 푸른 기운이 맺혀 있었다.
“아이스 애로우.”
핑-
화살이 쏘아짐과 동시에 민성도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며 화살 뒤를 쫓았다.
“샤악!”
뱀의 얄팍한 두 눈은 세 대의 화살에 고정됐다. 놈은 몸을 좌우로 요동치며 기민하게 화살들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칠 민성이 아니었다.
“한눈팔면 훅 가는 거 모르냐, 새끼야! 광전사의 외침!”
민성의 입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오자, 뱀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뒈져라!”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놈의 머리 위에 올라탄 민성은 괴성을 지르며 높이 쳐든 대검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치익-
“키아아아아아!”
대검이 놈의 매끈한 비늘을 뚫고 살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순간에 5%의 생명력이 빠져나가자 놈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민성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갈라진 놈의 살 틈 사이로 반쯤 소화된 아이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 몇 명이나 먹은 거야! 뒤져! 뒤져!”
치익-
민성의 대검이 닿을 때마다 마나와 체력 타는 소리가 대로변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키아아아…….”
길게 째진 노란 눈동자가 스르륵 감기며, 놈의 육중한 머리가 힘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후우……. 망할 새끼…….”
놈의 머리를 완전히 베어 확인사살까지 한 뒤에야, 민성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대검을 내렸다. 그리곤 아이템 창에서 자그마한 귀걸이를 꺼내 걸었다.
“오오, 인간! 엄청나게 강해졌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도 포식자 다마크를 죽이다니! 굉장하다, 인간!”
“그렇게 굴렀는데 이런 파충류 따위는 당연히 이겨야죠.”
전투가 끝나자 허공에서 관전하고 있던 티노는 호들갑을 떨며 그에게로 날아왔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그가 상대한 괴수는 서쪽 지역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라 했다.
“고생. 스킬 있었을 시 너에게 손쉬운 상대라 생각.”
신이 활을 등에 이며 그에게로 다가오자, 민성은 중얼거림을 멈추곤 그에게 가벼운 미소를 던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늘 할당량 종료?”
“응. 주력 스킬도 전부 쿨타임이고 날도 거의 저물었으니까. 아, 잠시만.”
민성은 양해를 구하곤 퀘스트 창을 열어 진척도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