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화-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세운다(2)
“어머, 이제 시작하려나 보다.”
“…….”
그녀의 말대로였다. 괴성을 신호로 건물 뒤에 엄폐하던 요원들의 몸 주위로 시뻘건 막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리고 무서운 속력으로 바리케이드를 향해 질주했다.
탕- 탕-
“그어어어어!”
총포에서 연달아 불길을 뿜어댔지만 요원들은 두려움을 잊었는지 질주를 거듭했다. 삽시간에 총알이 그들의 사지를 뚫고 지나갔음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크게 괴성 지르며 바리케이드의 난민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한 명이 바리케이드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상황은 순식간에 종료됐다.
일방적인 학살. 난민들의 머리통은 야구공처럼 허공 여기저기로 날아다녔고, 그들의 뱃속에서 흘러나온 내용물들은 금세 바닥을 벌겋게 물들였다.
“저 정도 무력이면 어디서 쉽게 나자빠지진 않을 거란다. 어떠니? 만족스러워?”
“저것……. 스킬의 효과입니까?”
바리케이드에서 들려오는 절규와 비명소리가 그가 있는 곳까지 들려오자, 부장은 떨리는 손으로 쌍안경을 내렸다. 훈련이 종료될 때까진 비밀이라는 이유 탓에 부장은 여태껏 그녀가 제공한 스킬의 정보를 알지 못했다.
“일시적으로 회복력과 신체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스킬이란다. 굉장하지 않니?”
“……그렇습니까?”
부장은 전투를 관람하는 자하를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봤다. 분명 대단한 스킬인 것은 맞다. 인간을 괴물에 가깝게 바꿔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만한 스킬을 제공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당장 그 역시도 민성을 물 먹이기 위해 최소한의 패만 제시하지 않았는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얼굴이구나. 왜? 예상보다 스킬의 위력이 떨어져 보여 그런 거니? 아니면…….”
“혹시…… 스킬에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부장의 말이 끝나자, 자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입은 웃고 있지만 싸늘한 눈빛이 그의 목덜미를 스쳐갔다.
“그게 무슨 말이니?”
‘이년…… 날 죽일 생각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런 조건도 없이 강력한 스킬을 제공하는데, 누구라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덤덤한 얼굴과 달리 잔뜩 긴장한 부장은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간 그를 노려보던 자하는 이윽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간의 부작용이 있단다.”
그녀의 말문이 트이자, 부장은 그제야 안도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부작용이…… 있습니까?”
“그래. 약간의 부작용. 오랜만에 날 설레게 만들었으니 상으로 알려줄게.”
자하는 잠깐 눈길을 돌려 학살이 끝난 바리케이드 내부를 응시하곤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스킬의 지속시간 동안 이지를 상실한단다. 더불어 스킬이 풀리고 나서도 신체능력 저하도 오고. 짧은 시간 안에 방대한 힘을, 그것도 제3자에게 얻으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하지. 아니면 타워가 열렸을 때, 목숨 걸고 코인을 벌든가. 기왕이면 전자가 낫겠지?”
자하의 나긋한 음성에 부장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제 부하들도 전부 알고 있는 겁니까? 부작용이 있음을 알고도 승낙한 겁니까?”
“당연하지. 사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킬북에 전부 적혀 있는 내용들이란다. 난 싫어하는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아. 저번에 너에게 말했듯 나는 그림도구만 준비해줄 뿐이란다. 그림은 너희가 그리는 거야. 그리고 저 아이들은 화가이자, 너의 좋은 그림도구가 돼주겠지.”
“…….”
부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발길 정도의 힘, 그리고 총알에 뚫리고도 움직일 수 있는 회복력. 그에 비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부작용들이야. 하지만…….’
정말 그걸로 끝일까? 그것이 부작용의 전부라 말할 수 있을까? 왜인지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 속에 극독이 섞여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킬 순 없다. 부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뒤늦은 후회야말로 진정한 독이다. 대원들은 이미 스킬들을 배운 상태다.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만 하자.’
부장은 대원들이 현명한 판단을 했으리라 여기며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다.
“상위 능력자라는 자부심을 가지렴. 결국 너 역시 내가 준 스킬 덕에 혜정을 따라 현장에서 활약할 수 있는 것 아니겠니? 예전의 너였다면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말에 부장은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비밀리에 노승과 그의 휘하전력들과 함께 각하의 지시를 수행했건만 그녀의 눈은 피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역시나…… 알고 계셨습니까?”
“너의 그림자가 꺼지지 않는 한,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수 있단다.”
힐끗 살육이 마무리되는 현장을 살핀 자하는 부장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훈련이 끝났으니 저 아이들은 이제 좋을 대로 사용해도 좋아. 네 신념을 위해 사용해도 좋고, 아니면 네 복수를 위해 사용해도 좋고. 혹시라도 부족해지면 새 아이들을 보내렴. 언제든 교육해줄 테니까. 아.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가렴. 아이들이 이지를 상실했을 때 흔들면 언제든 네 명령에 복종할 거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저들을 데리고 가보겠습니다.”
부장은 여인이 내민 방울을 받으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참. 그보다 그 아이는? 별 소식 없니?”
여인이 묻는 아이. 아마 그놈일 게 분명했다.
“여전합니다. 각하께서 지속적으로 임무를 하달하시지만 놈은…….”
“아직도 거절하고 있나 보구나. 모처럼 계약서까지 건네줬건만 제대로 활용을 못 한 모양이네.”
“죄송합니다.”
부장이 고개를 숙이자, 자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큰 미끼를 던져주면 언젠간 승낙하게 돼 있단다.”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여인의 신영이 땅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가시는 겁니까?”
“그래.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자습시간을 줄 테니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하렴. 아이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돌아가거나, 시간이 남는다면 이 도시를 돌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그럼.”
눈웃음을 마지막으로 여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빌어먹을 년…….”
잠시간 그녀가 사라진 땅을 응시하던 부장은 이윽고 발을 들어 거칠게 짓밟았다. 한참 바닥을 뭉개고 나서 부장은 거친 숨을 몰아셨다. 그리곤 테라스에서 힘차게 뛰어내렸다.
*
서울의 한 건물 안.
“크륵…….”
채찍에 목을 휘감긴 남자는 비명조차 남기지 못했다. 순식간에 남자의 목과 몸을 분리시킨 채찍은 빠르게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목 없는 남자의 시체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목을 잃은 몸뚱이들이 널려 있었다. 배가 갈라져 따끈한 내장을 게워내는 사체들도 여럿이었다.
“대길아! 이 시부럴 새끼들아!”
또 한 명의 부하가 목숨을 잃자, 김도진은 절규하듯 소리 지르며 적들에게 총탄을 난사했다.
“소용없다니까. 하여튼 곱게 말해줘도 못 알아 처먹네.”
귀를 후벼 후후 불던 남자는 대검을 들어 날아오는 총탄에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대검에서 거친 돌풍이 쏟아져 나와 순식간에 총탄들을 뭉개버렸다.
“됐다. 더 이상 죽이지 말아라.”
“예, 백야 님.”
소년의 명령이 떨어지자 채찍을 든 여인이 대검을 높이 쳐든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거야?”
“백야 님의 명령 못 들었어? 나머지는 살려두라 하시잖아, 이 답답한 새끼야!”
여인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남자를 노려봤다.
“그럼 내가 상대하면…….”
“네가 상대했다간 전부 죽을 게 뻔하니 그렇지!”
“컥…….”
여인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찍을 휘둘러 김도진의 목을 옥죄었다. 그리곤 가볍게 홱 잡아당겨 그녀의 앞으로 끌고 왔다.
“대…… 대장님!”
“너희도 마찬가지야.”
뿐만 아니라 여인은 남아 있던 용병 두 명의 목을 포박해 그들의 앞으로 끌어왔다.
“깔끔하지?”
여인은 연신 쿨럭이는 용병들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히죽였다. 하지만 남자는 조용히 중지 손가락을 치켜 올려 그의 뜻을 대변했다.
“왜…… 왜 이런 짓을…….”
“묻고 싶은 게 있다.”
백야는 연신 기침해대는 김도진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의 눈을 주시했다.
“네가 적절한 답변을 내놓는다면 네 수하들과 함께 풀어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니미, 좃까!”
“백야 님!”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도진의 입에서 걸쭉한 타액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소년의 곁을 지키던 남자가 빠르게 검면으로 막은 탓에 수포로 돌아갔다.
“이 새끼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그만.”
격노한 남자가 쳐든 대검으로 김도진의 목을 내려치려는 찰나, 소년은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하지만 백야 님!”
“괜찮다. 그보다 일의 마무리가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약간 거리를 두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소년의 동의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남자는 슬며시 소년과 김도진의 사이를 벌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나마 남은 부하와 네 목숨 줄 건지고 싶거든, 잘 처신하는 게 좋을 거다.”
“…….”
남자의 조용한 으르렁거림에 김도진은 구레나룻만 씰룩였다.
“유적지에서 보스가 나타났을 때, 나는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곳에서 죽을 것이라 예지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기껏 살아남았으니까 다시 뒈지기라도 하라는 거야? 엉?”
김도진의 걸쭉한 욕설에 소년의 양옆에 서 있던 남녀가 몸을 움찔거렸다.
“사전경고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보를 원한다 했고, 우리의 정중한 권유를 무시한 건 너다.”
“정중한 권유? 하하하. 젊은 새끼가 벌써 노망이 들었나! 갑자기 찾아와선 다짜고짜 목에다 검을 디미는 걸 권유라 하냐! 부하들까지 죽여 놓고 뭐? 권유? 이 시펄새끼들……컥!”
백야의 담담한 음성에 발끈한 김도진이 눈이 뒤집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여인의 채찍이 날아와 순식간에 그의 목을 포박했다. 백야는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하는 김도진의 눈을 무감각하게 바라봤다.
“지금 네 분노의 원인은 부하들의 죽음이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도 결국 네 판단 실패로 인한 책임이자 결과물이다. 왜 우리한테 역정을 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백야는 정녕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여인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여인은 채찍을 쥐고 있던 손에서 슬며시 힘을 풀었다.
“쿨럭, 쿨럭…….”
숨통이 트이자 김도진은 연신 헛기침해대며 백야를 죽일 듯 노려봤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정보다. 분명 죽었어야 할 너와 수하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걸 말해라. 네 수하들과 빛을 볼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
김도진은 입술을 악다문 채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조금 전까지 난리 통이 된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자며 다짐하던 수하들. 지금은 작은 꿈과 함께 처량한 시체가 되어 바닥을 굴러다닌다. 홀로 살아남았다면 응당 녀석들의 뒤를 따라갔겠지만,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칼밥 먹는 인생 언제든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도 대장 뜻에 따르겠습니다.”
“너희들…….”
사선을 넘나들며 동고동락한 동생 같은 놈들.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와중에 심지 굳은 눈빛을 보낸다. 빌어먹을. 겨우 목숨을 연명한 동생 같은 놈들마저 죽일 수는 없다.
“시부럴…….”
입술이 터지도록 악다물고 있던 김도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