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179화 - 시련의 숲(9)
“아, 그래서 이 하찮은 인간 한 놈한테 당하셨어요? 혹시 장님이야? 눈깔을 그렇게 많이 달고 다니면서 멀쩡한 눈알이 하나도 없나 보네.”
“크럭……. 크럭…….”
놈은 바닥에 한가득 체액을 쏟아내곤 소통을 이어갔다.
[네놈은 돌연변이다! 우리를 지배자가 만든 벽 너머로 보냈던 인간들과 마찬가지인 돌연변이! 아무리 상점을 이용하더라도 문명의 차이는 뒤집기 어렵다. 헌데 네놈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감정이 격해졌는지 놈의 의사를 전달해오던 작은 통신기에서 흥분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벽. 모든 주민들이 원한에 찬 소리로 울부짖던, 낯설지만 익숙한 단어. 민성은 눈을 빛내며 칼투나를 바라봤다. 혹시 놈은 뭔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을까? 더욱이 그가 루비를 캐기 위해 애용하는 버섯, 토토에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것보다 이놈은 착각 안 하나?’
민성은 그의 새로운 눈에 반응해 지배자라 착각했던 골렘을 떠올렸다. 허나 놈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뭐, 생존욕구의 차이지. 알잖아?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는 게 인간이거든. 것보다 벽 안으로 끌려들어간 소감은 어때? 좋았어?”
민성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계속 말했다.
“크럭…….”
[네놈! 이미 알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우리 네마스 일족은…… 아무것도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벽을 벗어나 새 삶을 도모할 수 있었다. 네놈만 만나지 않았어도…….]
민성의 능글거림에 놈의 수많은 눈동자가 그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근데 벽은 어떻게 넘은 거야?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민성은 과거 티노가 알려줬던 정보를 토대로 놈에게 질문했다. 물론 궁금증이 동해 몇 번 티노에게 자세한 정보를 물어봤지만, 녀석은 벽 안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려 하지 않았다.
[하등한 생물인 내게 알려줄 의무는 없다.]
콰직-
놈의 거절에 민성은 곧장 대검으로 꿈틀거리던 놈의 촉수 몇 가닥을 잘라냈다.
“크러어어억!”
“아직도 착각하나 본데 네 목숨줄, 내가 쥐고 있어. 다음은 머리야. 죽기 싫으면 지금 말해.”
민성은 차갑게 웃으며 괴로워하는 놈의 머리에 검을 겨눴다.
[……알았다. 알았으니 그 망측한 무기를 치워라.]
“치워라? 그건 반말이고, 새끼야!”
민성이 대검을 쳐들자, 칼투나는 촉수를 세우며 다급히 소리쳤다.
[치워주십시오!]
“진작 그럴 것이지.”
민성이 대검을 거두어들이자, 칼투나는 비로소 안도하며 말을 이어갔다.
[선생. 그자는 스스로를 선생이라 지칭했습니다. 그자가 우리를 벽 밖으로 내보내줬습니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선생?”
민성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칼투나를 쏘아봤다. 끝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선생. 티노에게 벽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정보를 제공했다던 인물과 동일인인가 싶었다.
‘그런 존재의 이름이 왜 지금 여기서 나온 거지…….’
시련의 숲, 이곳은 롱코트 사용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공간일 터였다. 그런데 들어본 이름이 나오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사실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재구현한 건가? 아냐. 왕 이름도 모르는 놈들인데 과거일 리 없지. 후…….’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나중에 티노에게 자세히 물어봐야 할 듯했다.
“조건은? 조건이 있었을 거 아냐. 설마 그냥 넘어가게 해줬다고?”
[조건은 없었다.]
콰직-
“크러아아악!”
재차 민성이 검을 휘둘러 촉수를 잘라내자, 놈은 발광하듯 몸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민성은 스산한 눈빛으로 놈을 내려다봤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냥 내보내줬다고? 개소리하지 마. 세상에 그런 이타적인 놈은 존재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어.”
[정말…… 정말이다! 선생은 그저 우리가 벽 안에 갇혀 있는 주민들의 현실이 안타깝다고만 했다! 속고만 살았는가? 믿어라!]
통신기에서 칼투나의 절규가 흘러나오자, 민성은 검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놈을 노려봤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고통에 뒤집힌 눈깔들은 진실만을 고하고 있는 듯했다. 민성은 낮게 한숨 쉬며 퀘스트 창을 살폈다.
[남은 관군 숫자: 5,324명]
‘필요한 것만 빠르게 정리해서 물어보자.’
아직 놈의 수하가 남아 있는지 관군은 꾸준하게 줄어들었다. 관군 숫자가 5천까지 떨어지면 놈은 각성할 것이고, 어떤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324명이 목숨으로 제공하는 시간. 얼마나 될진 몰라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간 안에 취할 것은 빠르게 취하는 편이 좋으리라.
“그래서 선생이란 작자는 어떤 방법으로 너희를 내보냈는데?”
[정확한 방법은 모른다. 그는 내게 일족을 모두 모으라 했고, 난 그의 말대로 일족을 집합시켜 그에게 갔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휘두른 지팡이뿐이었다.]
“그리고 눈 떠보니 이곳으로 왔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정말이다! 아니, 정말입니다!]
민성이 재차 대검을 들어 올리자 놈은 미친놈마냥 괴성을 질러댔다.
“흠…….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근데 넌 뭘 믿고 선생을 따른 거지? 너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존재 아니었어? 굳이 벽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면 토토를 이용해도 됐을 텐데?”
민성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곤 놈을 쳐다봤다. 그에게는 루비 공급처이나, 저쪽 주민들은 유일한 탈출구라 여기는 토토. 여태껏 만났던 주민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언급했다. 놈 역시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토토? 그건 누구를 지칭하는 건가?]
“음? 몰라?”
예상외의 반응에 민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벽을 넘을 수단은 없었다. 오로지 타 종족과의 끝없는 전투와 살육. 그 속에서 살거나 죽거나,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선생은 절망에 빠져 있던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했고 난 그것을 붙잡았다. 그리고 우리 네마스 일족은 지금 이곳에 있다. 정 의심 가면 네놈이 벽 안으로 들어가 보면 되는 것 아닌가?]
“…….”
민성은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겼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일까. 거짓말 탐지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토토야 근래에 생겼다 치고……. 것보다 선생이 거슬리네…….’
벽은 주민들을 가두기 위해 지배자가 만들었을 게 뻔했다. 문제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 주민을 내보낸 선생, 그에게 있었다. 지배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증명한 셈 아닌가?
“씁…….”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누가 우위인지 알아서 어디에 쓰겠어. 나야 지금처럼 버섯만 캐면 장땡이지.’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대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물을 것은 전부 물었다. 이제 놈의 각성까지 남은 관군 숫자는 얼추 100명. 더 이상 놈을 살려둘 이유는 없다.
[만족할 만한 답을 하면 살려주는 것 아니었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칼투나의 불안한 목소리가 통신기를 타고 울려왔다. 민성은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멋대로 상상하는 건 자윤데, 언제 내가 살려준다고 했어?”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중얼거림을 끝냄과 동시에 민성은 세차게 검을 휘두르는 그때,
[바르타고의 피부가 광물에 담긴 적의를 감지했습니다.]
[광물들이 바르타고의 피부를 가진 그대에게 굴복합니다.]
퍽-
수십 대의 화살이 날아와 민성을 스쳐 조종석에 틀어박혔다. 일부는 칼투나의 몸에 꽂혀 놈의 괴성을 자아냈다.
“어떤 새끼가…….”
민성은 칼투나의 머리에 대검을 들이민 채 고개를 돌렸다. 검은 도복을 입은 무리들이 활시위를 겨눈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본 민성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암설. 기습을 가한 놈들의 정체였다. 여태껏 어디에 숨어 있기라도 했는지, 대다수의 놈들이 목숨을 보존한 상태였다.
“수고했다. 나머지는 우리가 넘겨받도록 하지.”
“……뭐 하자는 거냐?”
민성은 무리 속에서 걸어 나온 남자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를 바라보는 남자의 얇은 눈매는 초승달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가? 적 수장의 목은 우리가 갖겠으니 이만 빠지라는 소리다.”
남자는 어서 물러나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지? 사형수 종합세트라더니 전부 정신 나간 놈들만 모아둔 건가?”
싸움이 끝난 직후 나타난 놈들이다. 그럼 분명 어딘가에 숨어 그의 싸움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소리고, 그의 힘을 두 눈으로 목격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저리 자신만만한 자세로 나오니 궁금증이 도졌다.
‘도대체 뭔 배짱으로 저러는 거지?’
민성은 곁눈질로 칼투나의 상태와 남은 관군 숫자를 체크했다. 칼투나의 각성까지는 아직 약간의 여유가 있으니, 조금 지켜볼 생각이었다. 놈의 자신감의 원천이 나타날 때까지.
“아니. 멀쩡하다. 데려와!”
“이것 놓으시오!”
남자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포박당한 소년이 암설들의 손에 끌려나왔다.
“호오…….”
예상외의 상황에 민성은 가느다랗게 눈을 좁혔다. 도주했으리라 여겼던 소년이 어째서 놈들 손에 잡혀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미…… 미안하오. 그저 멀리 떨어져 지켜만 볼 생각이었…….”
“누가 멋대로 입을 놀리라 했어! 엉? 엎드려, 새끼야!”
“큭…….”
암설의 발길질에 소년은 바닥을 뒹굴며 낮게 신음했다. 하지만 민성은 담담하게 놈들의 행각을 지켜봤다. 민성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남자는 칼을 빼들어 소년의 목에 겨누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 모시던 고용주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곱게 협조하는 편이 좋을 거야. 발뺌해도 소용없어. 네놈이 이놈의 목숨을 살리려고 발악하는 모습은 잘 지켜봤으니까. 그러니 당장…….”
“지랄하네.”
칼등으로 소년의 목을 툭툭 건들던 남자는 민성의 작은 중얼거림에 일순간 몸을 멈칫거렸다.
“네놈……. 지금 뭐라고…….”
약점을 잡히고도 변화 없는 민성의 모습에 화가 치민 남자는 곧장 칼을 들어 올리곤 민성의 반응을 살폈다. 당장이라도 소년의 목을 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줬으니, 놈도 결국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래도 네놈이…….”
허나 남자는 곧 벌어진 일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남은 관군 숫자: 5,003명]
“어이쿠. 시간 다 됐네.”
민성은 협박에도 아랑곳 않고 잽싸게 대검을 쳐들어 칼투나의 목을 후려쳤다.
푸확-
“크럭…….”
초록빛 체액과 함께 칼투나의 기다란 머리통이 조종석에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민성은 곧장 대검을 비스듬히 쳐들고 맹렬하게 휘두르며 칼투나의 몸체를 도륙하기 시작했다.
‘대가리를 날려도 살 수도 있으니까.’
약간의 여흥을 본 대가로 시간을 소모했으니 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야 했다. 놈의 각성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놈이 죽지 않으면 소년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후…….”
순식간에 칼투나의 몸체를 마늘처럼 잘 다진 민성은 연거푸 뜨는 메시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인 퀘스트: ‘소년의 제안’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서브 퀘스트: ‘목숨에 귀천은 없다’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서브 퀘스트: ‘칼투나의 분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피에 젖은 블랙코트의 원활한 사용과 더불어 숨은 능력이 개방됩니다.]
[모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1분 뒤, 귀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