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 시련의 숲(8)
“제발…….”
노력이 빛바랜 도화지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아무리 그가 선전해도 소년이 죽으면 끝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옆에 붙여놓을 걸 그랬다.
따그닥-
“…….”
민성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내달리는 와중 전방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달음박질을 멈췄다. 고개를 수그린 채 고삐를 잡고 있는 천인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혼절한 채 말 등에 얹혀 있는 소년도 보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
반가운 마음에 민성은 냅다 소리쳤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민성은 재차 소리치려 했으나 점차 말이 다가올수록 그의 얼굴도 미묘하게 일그러져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고개를 수그린 천인장의 이마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 그의 얼굴을 적셨다.
“히이이잉!”
민성은 달려오는 말의 고삐를 꽉 붙잡고 그대로 등에 올라탔다. 그리곤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겨 흥분한 말을 멈춰 세웠다. 말이 움직임을 멈추자, 민성은 천인장의 상태를 확인하곤 고개를 저었다. 미간에 구멍이 나고도 생존했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 없다. 짐작대로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젠장…….”
유일한 목격자라 할 만한 이가 죽어버렸으니, 정보도 얻을 길이 없다. 괜스레 입안이 텁텁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나…….’
“어이, 일어나!”
“음…….”
민성이 엎어져 있던 소년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자,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간 몽롱한 표정을 짓던 소년은 곧 사태를 파악하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라고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게 보지 마. 다 네 목숨을 위한 일이었어.”
소년이 매섭게 노려보며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민성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쪽이 강하다는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최소한 타인의 의사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오?”
“그래. 사과할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곧바로 말 타고 도망가. 그러라고 깨운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난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러보지 못했소. 헌데 계속 도망만 치라는…….”
탕-
소년이 씩씩거리며 점차 언성을 높이던 찰나, 우레 같은 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띠링-
[바르타고의 피부가 광물에 담긴 적의를 감지했습니다.]
[광물들이 바르타고의 피부를 가진 그대에게 굴복합니다.]
“…….”
느닷없이 연속으로 들려오는 메시지에 민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바르타고의 피부가 반응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광물을 이용한 무언가의 공격. 그리고 광물이 내포된 공격은 익히 예상 가능한 그것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머리에 구멍 나기 싫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지금 당장.”
민성은 땅에 틀어박힌 탄알을 보며 당혹스러워하는 소년에게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아…… 알겠소.”
민성의 몸에서 피부를 찌릿하게 울리는 살기가 피어오르자, 소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고삐를 쥐곤 저 멀리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민성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방을 응시했다.
‘놈이 칼투난가.’
전면에는 이제껏 처리했던 기계들 수십 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민성의 신경을 돋운 것은 다름 아닌 놈들 중심에 자리한 새로운 타입의 기계였다. 다른 기계들보다 몇 배에 달하는 크기, 검은색으로 도색된 장갑은 사뭇 위압감을 주기까지 했다. 양팔에 달린 두터운 기관총은 몇 천의 관군도 순식간에 도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밸런스도 정도껏 파괴해야 될 것 아냐.’
민성은 어이없는 상황에 실실 웃으며 대검을 겨눴다. 놈들의 수준을 보니 관군들은 병풍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결국 모든 일을 그 스스로 해결해야 할 상황. 그러나 긴장보다는 묘한 설렘이 심장을 간질였다. 더욱이 놈만 죽이면 이제 이 지겨운 숲도 벗어날 수 있을 터.
“한번 해보자, 이 씹새끼들아!”
민성은 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지면과 맞닿아 있던 발을 뗐다. 민성이 움직임과 동시에 칼투나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탄환은 전차에 덮인 두터운 장갑도 간단히 찢어발길 정도로 알이 크고 굵었다.
“등신.”
일순간 몇백에 달하는 탄환이 공중을 수놓았지만, 민성은 비웃음을 머금곤 계속 질주했다.
[바르타고의 피부가 광물에 담긴 적의를 감지했습니다.]
[광물들이 바르타고의 피부를 가진 그대에게 굴복합니다.]
빠르게 회전하던 탄환은 강제로 궤도가 수정되어 허공이나 풀숲으로 사라졌다.
“억!”
와중에 숨어있던 병사가 있었는지, 비명소리가 울려왔다. 하지만 민성은 잠시 상념에 빠져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바르타고의 피부……. 분명 광물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효과였지. 근데 총알이나 화살은 막아주면서 왜 저 드릴이나 근접무기에는 반응하지 않지?’
드릴이나 관군이 사용하는 무기도 결국 광물이 함유된 것들이다. 헌데 근접무기에는 일절 반응하지 않는 것이 문뜩 마음에 걸렸다.
‘쯧……. 그래 원거리공격이라도 막아주는 게 어디야.’
그러나 민성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접었다. 그리곤 오로지 칼투나를 죽이는 데에만 몰두했다.
끼릭-
사격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놈은 사격을 중지하고 오른팔을 들어 재차 민성을 조준했다. 하지만 칼투나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민성의 움직임이 상정외의 것이라는 게 바로 그러했다.
“놀랐냐? 뒈져라!”
우직한 직진으로 포화를 뚫은 민성은,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기계의 다리 사이에 달린 원통을 향해 대검을 찔러 넣었다.
챙-
“호오…….”
놈의 오른팔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검에 일격이 막히자, 민성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둔해 보이는 몸뚱어리와 달리 예상외로 날랜 반응 속도를 보인다. 하지만,
치이이익-
“어쩌냐? 막아도 손핸데. 새끼가 어딜 튀려고!”
마나 타들어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오자, 민성은 조소하며 급히 검을 물리는 칼투나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허나 놈의 수하들이 칼투나를 감싸듯 에워싸며 앞을 가로막았다.
“거, 귀찮게 구네.”
수십 기의 방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은 뜨겁다 못해 영혼까지 태워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민성은 코웃음 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빠르게 마무리하자. 속도를 높여라.”
민성의 읊조림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앞에는 일시 정지한 것같이 느리게 돌아가는 세상이 펼쳐졌다. 놈들의 움직임도, 넘실거리던 화염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놈들 사이를 가볍게 거닐었다.
“한 놈이요, 두 놈이요.”
민성이 기계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놈들의 탑승석인 원통에는 큼지막한 검상이 새겨졌다. 그 사이론 초록색 체액이 달팽이 움직이듯 천천히 뿜어져 나왔다.
‘이제 놈이 마지막인가.’
순식간에 몇십 기에 달하는 기계의 탑승석에 대검을 쑤셔 박은 민성은 칼투나를 지그시 올려다봤다. 천천히 검을 휘두르는 꼬락서니를 보니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쩌겠냐. 네놈이 운 없는 걸 탓해야지.’
민성은 놈의 몸체를 툭툭 건들며 이죽거렸다. 만약 그 역시 이렇다 할 무력을 지니지 못한 채 시련의 숲으로 떨어졌다면 관군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몰랐다. 그 와중 손이 닿은 곳에서 마나 타는 소리가 천천히 울리기 시작하자, 민성은 픽 웃으며 대검을 쳐들었다. 그리곤 놈의 탑승석에 힘차게 대검을 꽂아 넣었다.
‘이제 해제해도 되겠지.’
혹여나 살았을까 싶어 칼투나의 탑승석에 몇 번 더 대검을 틀어박은 뒤, 민성은 작게 중얼거렸다.
“속도를 높여라, 해제.”
민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쯤 멈춰 있던 세상이 급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퍽-
“휘유. 장관이네.”
민성은 휘파람을 불며 그가 이뤄낸 업적을 만족스럽게 쳐다봤다. 수십 기의 기계들에서 마나 타는 소리가 진동했다. 뿐만 아니라 놈들의 탑승석에선 일시에 계란 터지듯 체액이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아, 나무 넘어가요!”
사용자를 잃은 기기들이 하나둘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자, 민성은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소리 질렀다. 이윽고 칼투나의 주변을 에워싼 기계들이 육중한 울림을 자아내며 쓰러져 내렸다.
5분. 놈들이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압도적인 문명의 이기들도 싸우고자 맘먹은 민성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허나 적을 몰살시켰음에도 민성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왜 완료했다는 메시지가 안 뜨는 거지?’
분명 요구조건대로 칼투나를 죽였을 뿐더러, 놈의 수하들까지 전부 처리했건만 어떠한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민성은 곧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놈 역시 사실 하수인에 불과했다거나 혹은 살아 있거나…….’
민성은 대검을 쥔 채 천천히 검은 기기 앞으로 다가섰다. 무릎을 굽히고 쓰러져 있는 놈의 탑승석에선 초록색 체액이 줄줄 새어나왔다. 아무리 봐도 죽었을 확률이 높은 상황. 그럼에도 민성은 대검을 들어 탑승석을 덮은 원통에 가볍게 휘둘렀다.
빠직-
검상이 새겨진 곳을 기점으로 옅은 실금이 퍼지더니, 원통이 유리 깨지듯 박살났다. 민성은 슬쩍 고개를 디밀어 내부를 살핀 뒤, 픽 웃었다.
“뒈진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네?”
“크럭…….”
기다란 머리통에 달려 있는 놈의 반쯤 감긴 눈알들이 그를 노려봤다. 놈의 가슴팍으로 보이는 곳에선 체액이 줄줄 나오고 있었다. 놈은 떨리는 촉수로 상처부위를 감쌌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생각보다 생명줄이 질긴 놈이네. 힘든 것 같으니까 내가 빨리 보내줄게.”
민성은 조소를 머금곤 대검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어째서 너 같은 인간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냐!]
“응?”
낯선 울림에 민성은 휘두르려던 대검을 슬며시 내리며 놈을 쏘아봤다.
“네가 말한 거냐?”
[그렇다. 네마스가 이룩한 위대한 문화의 힘에 전율했나? 아니, 이미 전율했겠지.]
괴이한 생명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계에 달린 수많은 버튼 중 하나를 자랑스레 가리켰다.
‘미친 새낀가.’
곧 죽을 놈이 거만하게 구니 웃음이 나왔지만 민성은 곧 기대 어린 눈길로 놈을 훑었다.
“네마스고 나발이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네가 칼투나야?”
아니라 하면 즉시 죽이면 되고, 맞다 하면 조금은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렇다, 어리석은 종족의 일원이여.]
‘좋았어.’
놈의 긍정에 민성은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당사자가 앞에 있는 이상, 더 이상 놈을 찾아 헤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어리석어? 인간이?”
민성은 놈의 어이없는 발언에 차갑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어차피 나둬도 곧 죽을 놈이었으니 적당히 놀아줄 생각이었다.
[하찮은 문화를 지닌 종족이 어리석지 않다면 누굴 어리석다 하겠나?]
“큭…….”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놈이 와중에도 드높은 자존심을 드러낸다. 민성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