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화 - 시련의 숲(3)
“뚫려 있는 입이니 마음껏 지껄이는 건 상관없는데, 그런 건 당사자 없는 곳에서 해야지. 그치?”
그들의 모멸 섞인 비웃음을 들은 민성은 귓구멍을 판 뒤, 황금빛 결실물을 그들에게 튕겼다.
“…….”
민성의 도발에 분위기는 한순간 무겁게 내려앉았다. 암설의 일부 무사들은 이미 검 자루나 창대에 손을 갖다 대고 있었다.
“이 친구 보기보다 아주 용맹무쌍한 친구구만! 다시 보니 뼈대는 꽤 탄탄해 보이는 것이…….”
민성의 앞에 있던 남자는 재차 민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곤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칼밥 좀 먹었는지는 몰라도 분수를 모르는 새끼는 일찍 뒈져. 무슨 말인지 알아……크에에엑!”
“응?”
갑자기 남자의 몸이 허공을 날아 거칠게 바닥을 나뒹굴자, 당황한 사람들은 민성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분수 모르는 새끼는 금방 뒈지지.”
민성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흙먼지 묻은 남자의 모습을 감상하며 다시 대검을 등에 이었다.
“저…… 저 새끼가! 미쳐가지고!”
“엿이나 처먹어, 새끼들아.”
민성은 코웃음 치며, 흥분하여 병장기를 빼든 이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놈!”
격분한 암설들은 검집에서 칼을 꺼내 민성의 목에 겨눴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필시 좋지 않은 뜻이 분명했다. 순식간에 수 자루의 검들이 목숨을 노렸지만, 민성은 실실 웃음만 흘렸다.
“이거, 정당방위라고 봐도 되겠지?”
민성은 등에 이고 있던 검 자루에 손을 뻗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현실 보는 눈들이 부족한 것 같은데. 이참에 스파르타식 교육을…….’
민성의 대검이 완전히 뽑혀 나오려는 찰나,
“주목하라!”
전방에서 커다란 음성이 울려왔다. 내용을 들어보니, 으레 출정 전 자주 늘어놓는 연설이었다.
“운이 좋네. 여태껏 그 운으로 살아남은 건 아니지?”
민성은 슬며시 손을 내리며 암설들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저 새끼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먼!”
“오냐. 그리도 죽는 게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어? 주목 안 하게? 지엄한 군령을 위배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엉? 여기요! 이 새끼들이 장군의 명령에 거부하시겠다는데요?”
민성의 커다란 외침에, 한순간 모든 이목이 그들에게 쏠렸다.
“큭…….”
민성이 손을 들어 크게 흔들어 보이자, 암설들은 똥 씹은 표정으로 급히 검을 회수했다.
“암설을 우롱한 새끼 중 여태껏 살아남은 놈은 없어. 알아? 기대해도 좋아. 가자!”
가느다란 눈매를 가진 남자는 민성에게 작게 속삭이곤 암설에게 크게 외쳤다. 그러자 민성의 목에 드리웠던 검날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저 새끼가 대장인가? 마음에 안 드는 새끼네.’
민성은 차갑게 히죽이며 등을 돌린 남자를 노려봤다. 다른 것은 둘째 치고, 마교의 지부장 얼굴을 닮았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준엄한 조선왕실의 명을 따라 선량한 백성들을 박해하는 잔악무도한 비호…….”
“괜찮겠소? 암암리에 도는 소문에 따르면 왕실의 지원을 받은 만큼 강력한 무위를 지녔다 고 하오. 헌데 그리 도발을 해버렸으니, 그 여파를 어찌 감당할 생각이오?”
소년은 한창 연설 중인 총 대장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다 감당할 수 있어.”
민성은 픽 웃으며 소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이 공간만 벗어나면 다시 볼 일 없는 얼굴들이었다.
“출정하라!”
둥- 둥-
마침내 긴 연설이 끝나자, 출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공터를 울렸다. 동시에 병사들은 기다란 행렬을 만들어내며 이동을 시작했다.
“점화하라! 점화하라!”
점점 드리우는 어둠을 쫓아내기 위해 대열 곳곳에서 점 같은 횃불이 피어올랐다.
“정말 안 탈 거요?”
소년은 승마를 거부하는 민성에게 재차 되물었다. 하지만 민성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거부의사를 보였다.
‘엉덩이 터지는 건 한 번이면 족하지.’
“제 말도 없는 놈이 승마술을 배웠을 리 없지.”
“말은커녕 쌀가마니 살 능력이나 있겠어?”
뒤에서 민성들을 따라오는 암설들의 비웃음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오자, 민성은 망설임 없이 대검을 꺼내 뒤로 냅다 던졌다.
쿵-
“히이이잉!”
대검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지부장을 닮은 남자가 탄 말 발치에 내리꽂혔다.
“워워워!”
말이 놀라 난동 부리자, 남자는 한참 말을 진정시켜 겨우 낙마를 면했다.
“…….”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민성을 죽일 듯 노려보자, 그의 수하들도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소리 질렀다.
“아이고, 걷다 보니까 손에 땀이 차서 그만.”
민성은 싱글싱글 웃으며 땅에 박힌 대검을 빼들었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가 보구나?”
“그럼 그때는 땅이 아니라, 그쪽 가슴팍에 박힐 수도 있는데. 책임 못 집니다?”
민성의 은근한 협박에 남자는 입술을 악다물곤 몸을 낮게 떨었다. 당장이라도 놈의 목을 치고 싶었으나 그를 주시하는 이목이 많았다.
“네놈……. 숲에서도 지금처럼 여유를 보일 수 있나 두고 보겠다.”
하지만 그의 협박에도 민성의 얼굴에 걸린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일을 끝냄과 동시에 저놈의 목도 같이 쳐낸다.”
남자는 멀어져가는 민성의 등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암설을 욕보인 놈. 놈이 무사히 살아 돌아가면 암설이라는 이름이 울 것이었다.
“예, 대장. 전투가 벌어질 때 기회를 봐 놈을 죽이겠습니다.”
부하들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다.
‘잠잠하니 좀 낫네.’
이죽거리던 이들이 침묵하자, 민성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대열을 따라갔다.
“청송림이다!”
‘드디어 도착했나?’
앞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외침에 민성은 고개를 쳐들고 전방을 살폈다. 숲의 입구라는 걸 증명하듯 나무들로 덮여 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안쪽은 보이지도 않았다.
“곧 진입할 것이다! 전열을 가다듬어라!”
‘왕 이름도 모르는 것들이 왕상?’
민성은 앞뒤가 맞지 않는 저들의 행동을 보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드디어…….”
장수의 고함에 병력들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많은 관군들이라 하더라도 어둠에 덮인 숲의 위험성은 무시하지 못했다. 더욱이 숲에 웅크리고 있는 놈이 비호인 만큼 관군들의 긴장감은 은연중 더욱 커져갔다.
“진입하라! 오늘 놈의 목을 취해 왕상께 보낼 것이다!”
“와아아아아!”
‘잘들 하는 짓이다.’
민성은 고함치는 장수와 환호하는 관군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 딴에는 사기를 올리기 위해 저러는지 몰라도 적에게 위치를 알리는 꼴에 불과했다.
“진입하라! 안으로 진입하라!”
명이 떨어지자,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횃불들이 숲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청송림. 그 이름답게 숲속은 푸른 바늘 같은 잎사귀를 가진 소나무로 한가득했다.
“흠…….”
민성은 숲속을 살피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청량한 솔잎 향이 가슴속에 담긴 감정의 노폐물을 전부 쓸어가는 듯했다.
‘새끼. 좋은 곳에 자리 잡았네.’
한낱 짐승인 줄 알았더니, 나름 풍취를 아는 영물인 것 같았다.
“주변 지형지물을 자세히 살펴라! 분명 놈과 놈의 하수인 흔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관군들은 장수의 명을 따라 바닥이나 나무 기둥, 수풀 따위에 횃불을 갖다 대며 수색을 진행했다. 상대방이 남긴 흔적을 관찰, 이용하여 상대방을 추적하는 것. 추적의 기본이었다.
“우리도 찾아봅시다.”
소년은 검날을 살피거나 무기를 가다듬는 암설들을 보며 작게 소리쳤다.
“그건 관군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뭐 하러 우리가 나서야 하는데?”
“맞네.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관군들 아냐? 저들이 비호 무리를 발견하면 그때 우리가 나서면 될 것을 괜히 사서 고생하려 하는지, 쯧쯧…….”
하지만 암설들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소년을 쏘아보며 귀찮다는 눈초리를 줬다.
“허…….”
할 말을 잃은 소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성은 속으로 혀를 차며 소년에게 다가왔다.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러고 있어?”
“작게는 비호를 죽여 백성의 안위를 도모하는 것. 그것이 이곳에 온 이유 아니겠소? 후……. 그저 저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력함이 한탄스러울 뿐이오.”
소년의 올곧은 심성에 민성은 숙연해져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럼 만들어내면 되지.”
민성의 담담한 말투에 소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슬며시 그를 올려다봤다. 어서 말해달라는 듯한 눈빛에 민성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흠씬 두들겨줄 수도 있지만 그건 네가 원하지 않을 것 같고, 네가 비호인지 나부랭인지 하는 놈을 죽이면 되잖아? 그럼 널 보는 저 새끼들 시선도 많이 달라질걸?”
“과연…….”
소년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민성의 손을 콱 붙잡았다.
“이 손으로 꼭 놈을 죽였으면 좋겠소. 도와주겠소?”
띠링-
[소년의 제안]
등급: 퀘스트 (메인)
설명: 소년과 함께 동행하며 시련의 숲 어딘가에 있는 ‘네마스 일족의 수장 칼투나’를 처치하라
난이도: ?
보상: 피에 젖은 블랙코트의 원활한 사용 가능(단, 퀘스트 중 소년이 사망할 시 퀘스트 실패로 간주).
실패 시: 피에 젖은 블랙코트 영원히 사용불가.
민성은 눈매를 좁히고 새로이 나타난 메시지를 주시했다. 빠르게 내용을 훑은 민성은 소년을 지그시 바라봤다. 결론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전까지 소년의 보모 노릇을 하란 소리였다. 그 부분이야 원했던 바이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비호가 아니고 칼투나? 칼투나는 또 누구야? 비호 이름이 칼투나란 소린가? 아, 아니면 설마 비호도 원래는 주민이라거나……. 분명 과거에도 존재했다 했으니…….’
타워 관리인의 말을 상기한 민성은 스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능성이 없진 않다. 허나 상관없었다. 보이면 죽인다. 단지 그뿐이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다.
[소년의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좋아.”
[소년의 제안을 수락하셨습니다. 퀘스트는 소년 또는 당사자가 사망하기 전까지 지속됩니다.]
‘그럼 이제 칼투나인지 비호인지를 잡으러 가볼까.’
민성은 미리 빼두었던 대검 자루를 쓰다듬으며 묘한 미소를 흘렸다. 그 후, 다시 대열을 따라 이동하길 몇십 분.
“정지! 정지하라!”
선두에서 들려오는 신호에 대열은 움직임을 멈췄다. 민성은 고개를 쳐들고 상황을 살피려 했으나, 워낙 많은 관군에 둘러싸여 확인할 수 없었다.
‘아, 진짜 답답하네. 어라?’
티노의 공백을 아쉬워하던 민성은 순간 눈을 부릅뜨고 어둠에 싸인 우측을 노려봤다.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 번쩍임을 봤기 때문이었다. 민성이 눈매를 좁히고 자세히 응시하려는 찰나,
화르륵-
갑자기 숲 도처에서 거친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치솟은 불길은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며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뭐, 뭐야!”
“왜 갑자기 불이…….”
“진정해라! 단순한 화재일 뿐이다! 진정해라!”
관군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져가자, 천인장들은 휘하 병력들을 통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설마 아까 그 불빛이……. 비호란 놈이 이랬을 리는 없을 거고…….’
민성은 불길에 덮인 숲을 노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처에서 피어오르는 불길. 이건 단순히 우발적인 화재가 아니다. 분명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른 화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