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캐쉬상점 쓴다-172화 (172/303)

# 172

172화 - 시련의 숲(2)

“시련의 숲? 아! 혹 청송림을 말하는 것이오?”

“아니. 청송림 말고, 시련의 숲.”

소년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볍게 손뼉 쳤다.

“청송림 혹은 시련의 숲이라고도 하오. 모두 같은 곳을 지칭하는 단어요.”

소년은 과거, 조정에서 청송림으로 많은 이들을 유배 보내 시련의 숲이라는 악명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조정은 아는 놈이 왕 이름은 모르냐? 아니, 것보다…….’

시련의 숲이란 말에 눈을 치켜뜬 민성은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래? 그럼 그 청송림은 어디에 있어?”

“설마……. 지금 그곳으로 가려 하는 것이오?”

“그래. 난 청송림으로 가야 돼.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민성의 무뚝뚝한 대꾸에 소년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기억을 잃은 것도 모자라 제 발로 사지를 찾아가려 하다니, 필시 미친놈이 분명했다.

“용기와 객기는 엽전의 양면처럼 비슷하나 다르오. 추천하지 않소. 기억을 잃었다니 말해주는데 지금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관군이 집결하고 있소.”

“이유는?”

민성의 물음에 소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계속 말했다.

“민초들을 학살한 비호와 그 무리가 안으로 들어가 둥지를 틀었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아마 그 진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들어가려는 것이겠지.”

“흠…….”

민성은 조용히 고개만 주억거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어차피 야밤에 시야확보도 어렵거니와, 무엇보다 아무런 정보가 없다. 정보 없이 들어가는 것은 무기 없이 맹수를 상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 관군은 어디에 있지?”

“위치를 알고 있긴 하오만…….”

소년은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듯 민성을 위아래로 훑었다.

“기억 잃은 사람이 관군에게 가 봐야…….”

“기억 잃었다고 멀쩡한 팔까지 못 쓰지는 않아.”

민성은 조용히 읊조리며 등에 이고 있던 대검을 빼들어 가볍게 휘둘러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민성의 몸놀림에 소년은 이채로운 눈빛을 보냈다.

“……확실히 몸은 무인의 것인 듯하니. 흠……. 무인이 많을수록 비호를 잡는 것도 수월할 터……. 좋소, 안 그래도 관군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던 길인데. 그럼 함께 움직이겠소?”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안장에 남아 있는 여분의 자리를 가리켰다. 한 사람이 더 타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타시오. 걸어서 가려면 족히 다섯 시진은 걸리는 거리오.”

혹시라도 소년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민성은 잽싸게 안장에 올라 그의 뒷자리를 차지했다.

“그럼, 출발하겠소.”

소년은 능숙하게 말을 몰아 어두운 길을 달렸다.

“끼랴!”

소년이 박차를 가하자, 말은 힘차게 평원을 가로질러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아직 멀었어?”

말발굽 소리 탓에 민성은 목소릴 높여 고삐 쥔 소년에게 소리쳤다. 장시간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이 따로 없었다. 얼마나 이동했는지, 이미 엉덩이는 아프다 못해 서서히 감각이 없어져가고 있었다. 소년이 말했던 세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이제 금방이오.”

“아까도 금방이라고 하지 않았어?”

민성은 소리 지르듯 외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제 정말 거의 다 왔소. 오! 저기! 전방을 보시오!”

소년의 외침에 민성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어둠 가운데로 옅게 일렁이는 불빛들이 보였다.

“오오!”

“분명 저곳이 토벌대의 임시 거점일 것이오.”

민성이 낮게 환호성을 지르자, 소년은 싱긋 웃으며 말을 더욱 재촉했다.

“워, 워!”

말이 목책 언저리에 도달하자, 소년은 고삐를 당겨 속력을 늦추곤 천천히 목책 앞으로 접근했다.

“멈춰라!”

정적을 깨우는 말발굽 소리 탓에, 이미 경계하고 있던 경비병들은 창대를 들어 그들에게 겨눴다.

“하마하고 신원을 밝혀라!”

소년은 말에서 내려 경비병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나는 남명 조식의 외손사위이자 승문원정자와 영천군수를 역임했었던 곽월의 아들, 곽재우요! 김도운 장군께 연통을 넣어주시오! 그분은 나의 방문을 알고 계실 거요!”

“그렇습니까? 방문 목적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양반의 자제인 듯 보이자, 경비병들은 슬며시 존대했다.

“토벌작전에 도움이 되고자 왔소.”

“예?”

소년의 외침에 경비병들은 저들끼리 얼굴을 맞대고 수군거렸다.

“위명에 눈 돌아간 양반 나리가 오셨구먼.”

“그보다, 들여보내?”

“안 들여보내면? 분명 우리한테 지랄할 게 뻔한데? 천인장님 존함도 알고 있는 데다 일부러 사지로 온 양반, 굳이 돌려보낼 필요 있어? 혹, 누가 알아? 내일 숲으로 들어가면 양반 소피 지리는 모습 보게 될지?”

경비병들은 새어나오는 비웃음을 꾹 누르며 양옆으로 목책 문을 열어젖혔다.

“들어가십쇼.”

“고맙소.”

소년은 살짝 고개를 까딱여 보이곤, 말에 올라타 목책 안으로 진입했다.

“흠…….”

말에서 내린 민성은 허리를 탁탁 두들기며 내부를 살폈다. 내부는 작은 마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상당히 넓었다. 낡고 허름해 보이는 천막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천막 중간마다 작은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얼른 장군의 막사에 다녀오겠소, 잠시 쉴 곳을 마련해주실 거요.”

‘이 넓은 데서 어떻게 찾으려고.’

속내와 달리 민성은 웃으며 다녀오라는 듯 손짓했다. 알아서 고생해주겠다는데 구태여 말릴 이유도 없었다. 소년이 말을 몰아 천막들 사이로 사라지자, 민성은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찬찬히 그려갔다.

‘어차피 토벌대도 내일 움직인다고 했으니, 같이 움직이는 편이 낫겠지.’

경비병들의 수군거림을 떠올린 민성은 픽 웃었다. 정보가 없으면 정보를 물어다 줄 고기방패들과 함께 움직인다.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계획이었다. 방패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면, 분명 검은 천으로 덮인 결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예상 밖의 무엇이라든가.

“시련의 숲이라…….”

민성은 조용히 읊조리며 별들이 촘촘히 수놓인 밤하늘을 바라봤다.

*

다음 날 아침. 곽재우가 배정 받아온 천막 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들은 대로요.”

민성은 눈살을 좁히고 밥그릇에 열중하는 소년을 째려봤다. 아침 식사와 함께 소년이 들고 온 소식 덕에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토벌대는 유시(酉時)에서 술시(戌時)사이에 청송림에 진입한다. 즉, 17시에서 19시 사이인 저녁시간대를 출정시간으로 잡았다는 소리였다.

“안색이 좋지 못한 것 같은데, 잠자리가 불편했나 보오.”

소년은 무덤덤하게 민성을 한번 쳐다보곤 다시 밥그릇에 머리를 묻었다. 왜 그리 먹냐고 물으니, 전쟁터에선 체통 버리고 개처럼 빠르게 먹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을 따르는 중이라 했다.

“아니, 해 떴을 때 움직여야지, 저녁에 움직이자는 발상은 도대체 어느 놈 대가리에서 나온 거야?”

입술을 씰룩이던 민성은 답답한 마음에 재차 질문을 던졌다. 야밤에 숲으로 들어가는 건 제 발로 맹수들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정말이지 지휘권을 가진 장수의 면상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총 대장의 명이오. 군율은 지엄하니 언사에 신중을 가하시오.”

소년은 밥그릇에 수저를 디밀며 조용히 말했다.

“후……. 좋아. 다 그렇다 치고, 그 대장 양반은 왜 굳이 그런 시간대를 선택한 건데? 병사들 전멸시키려고 작정이라도 했대?”

민성은 냉정한 눈빛으로 소년을 쏘아봤다. 소년이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이동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이곳과 현실의 시간 흐름이 다르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는 않았다.

“들은 바로는 비호의 활동시간은 해가 저문 뒤라고 하셨소. 이제 설명이 됐소?”

‘그걸 진작 말했어야지.’

“오해가 풀렸다면 식사하고 잠시라도 눈 좀 붙이시오.”

그제야 민성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바닥에 놓인 다른 밥그릇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늦은 출발이 외려 우리에겐 호기가 될 수 있소. 꼭두새벽에 도착했으니 아직 피로가 쌓여있을 것 아니오?”

“확실히?”

민성은 피식 웃으며 그릇을 건네받았다. 소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최대한 컨디션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충분한 수면과 식사는 필수였다.

시간이 흘러 유시에 접어들자,

“모든 병력들은 장비를 갖추고 목책 밖으로 집결하라!”

장수의 호령이 병영 내를 울렸다. 민성은 소년을 따라 천막을 나섰다.

‘생각보다 숫자가 꽤 많네.’

천막을 나온 민성은 목책 밖으로 이동하는 관군들을 살피며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우리는 저쪽이오.”

소년이 대열을 갖춰가는 병력들 중 맨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갑주를 두른 관군들과는 조금 다른 복장을 착용한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년처럼 어둑한 도포를 걸친 젊은 무리들이 저들끼리 대화 나누는 걸 봐선, 이미 안면이 있는 듯했다.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면서도 묘하게 날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암설이오. 사형수나 큰 죄악을 저지른 이들로 구성돼 있다 하던데 주로 조정이 치부를 제거하는 데 사용한다고 들었소. 무례하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하다 하오. 아마 관군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겨 움직인 모양이오.”

“됐어. 굳이 말 안 해줘도 돼.”

민성은 손을 들어 소년의 속삭임을 제지했다. 전투에서 신분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에게는 관군과 다를 바 없는 고기방패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왕 이름은 모르면서 이런 건 또 잘 아네.’

민성은 피식 웃으며 소년을 내려다봤다. 이젠 딴죽 걸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맘 편할 것 같았다.

“것보다 양반 아니었어? 근데 왜 저런 놈들이랑 배정된 거야?”

양반과 사형수들의 동행. 어딘가 조합이 맞지 않는 듯했다.

“원래는 나 역시 허락받지 못한 손님이오. 허나 지인의 넓은 아량 덕에 저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게 됐소. 그러니 너무 개의치 말았으면 하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상황을 파악한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과 함께 대열의 후미로 이동하려 했다. 허나, 낯선 목소리에 그들은 걸음을 멈췄다.

“호오……. 상당히 거칠어 보이는 검이군.”

암설은 저들끼리 킬킬대며 민성의 등에서 덜렁이는 거대한 대검을 빤히 쳐다봤다. 왜소해 보이는 몸과 달리 커다란 무기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거, 꽤 괜찮은 호위무사를 데리고 다니십니다.”

그들 중 남자 하나가 소년에게 다가와 눈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어찌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된 저의 동료입니다.”

“예?”

소년의 말에 그들의 눈에는 삽시간에 다양한 감정들이 스쳐갔다. 놀라움으로 시작한 감정은 사실여부를 거쳐 곧 비웃음으로 뒤바뀌었다.

“양반이 이런 검을 사용한다고? 혹 허세용 아니오?”

암설 소속의 남자는 민성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

“모르지. 사실 가산을 탕진해 장만했다거나 아니면 노비 출신인데 주인 집 물건을 훔쳐 나왔다거나?”

“거, 도련님도 혹 서자 출생 아니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사지로 올 이유가 있소? 양반이란 자고로 뒷짐 지고 헛기침이나 연발하며 돌아다니는 족속들이건만. 뭐, 아니면 말고.”

암설들은 저들끼리 박장대소하며 민성을 비웃고 덤으로 소년까지 흉봤다. 그러자 소년은 얼굴이 발개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민성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저들의 말대로 탈주한 노비일지도 몰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