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화 - 시련의 숲(1)
47. 시련의 숲
“그래, 식욕 왕성한 건 좋은데, 나중에 크거든 꼭 먹은 것 이상으로 토해내렴. 알았지?”
민성은 상냥하게 웃으며 녀석의 볼을 쿡쿡 찔렀다. 그란칼은 볼을 움찔거리면서도 용케 안에 담긴 내용물을 흘리지 않았다.
“인간! 무슨 짓을 한 거냐! 놈의 볼이 터질 것 같다!”
상황을 모르는 티노는 빵빵해진 그란칼의 볼을 보곤 급하게 소리쳤다.
“괜찮아요. 밥 준 것뿐입니다. 다만 성장기라 그런지 많이도 처먹네요.”
“인간…….”
티노는 말을 아끼곤 고개를 저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몸은 희미하게 부들거리는 것이 묘한 안쓰러움마저 자아냈다.
꿀꺽-
“킥!”
[그란칼이 밀도 높은 식사에 만족해합니다. 호감도가 1 상승합니다.]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란칼의 붉은 피부가 옅은 빛에 물들었다. 하지만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의 밝기였기에 민성은 눈치 챌 수 없었다.
“후…”
민성은 배에서 떨어져 침대에 대자로 누운 그란칼을 가만히 바라봤다. 입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평평하던 배는 점점 볼록 튀어나오고 있었다.
“원래 성장기 때의 식사량은 엄청나다. 그래도 잘 먹는 걸 보니 내가 다 뿌듯하다, 인간.”
“그쵸? 저도 참 뿌듯합니다.”
민성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그란칼을 역소환했다. 당분간 녀석을 소환할 일은 없을 듯했다.
“이제 놈의 밥도 줬으니 얼른 개봉해봐라, 인간!”
그란칼을 넣은 뒤에도 한참 멍하니 웃음 흘리던 민성은 티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 그래, 루비야 또 벌면 되지. 하지만…….’
다만 앞으로도 놈이 루비로만 식사할 경우, 도무지 식사비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민성은 부디 놈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길 기도하며, 아이템 창을 열고 박스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렸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젖혔다. 안에는 낡고 헤져 볼품없는 검은 롱코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보공개도 해라, 인간!”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아이템이나 스킬의 정보를 공개할 경우, 티노 역시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연유는 몰랐지만 원체 특이한 녀석이니 이제 그러려니 하게 됐다.
“거, 급하긴. 기다려봐요.”
민성은 상자 내부를 조심스럽게 뒤졌다.
‘뭐야, 뻥카였어?’
하지만 박정후가 언급했던 안전장치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정 확인을 끝낸 민성은 히죽이며 롱코트를 꺼내 잘 갈무리했다.
“행동이 굼뜨다, 인간!”
“정보공개.”
민성이 낮게 중얼거리자, 코트 위로 아이템 정보가 나열된 정보창이 나타났다. 한참 정보창을 뚫어져라 살피던 티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성을 응시했다.
“혹시 장작대용으로 받아온 쓰레긴가, 인간?”
“쓰레기요?”
녀석의 애처로워하는 눈빛에 민성은 코웃음 치며 애정 어린 손길로 옷을 쓰다듬었다.
“인간……. 예전부터 어딘가 맛이 가 있다곤 생각했지만, 드디어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이런 쓰레기 때문에 그렇게 벙글거리다니. 정신 차려라!”
“제가 이 쓰레기 얻으려고 그 망할 새끼들 상대로 혼신의 연기를 펼쳤는데 쓰레기라 말하면 섭섭하죠. 일단 입어나 보고 판단합시다.”
민성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지곤, 롱코트를 몸에 걸쳤다. 무릎까지 내려온 밑단과 팔 길이에 딱 맞는 소매. 팔을 들었다 내려보고, 제자리에서 뛰어보기도 했다. 코트는 한 몸이 된 듯 그의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흔들거렸다. 마치 맞춤양복처럼 걸리는 것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활동하는 데 불편하진 않겠어.’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민성의 마음을 더 흡족케 했다.
“그렇게 마음에 드나, 인간?”
“당연하죠. 물론 티노 님 눈에는 줘도 안 가질 쓰레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저한테는……. 큭…….”
빙긋 미소 짓던 민성이 갑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강한 압력에 신음을 흘렸다.
‘이건 또 뭔…….’
마치 누군가가 계속 몸 위에 거대한 바윗덩이를 올려놓는 것 같았다. 민성은 입술을 악물고 압력을 버티려 했다. 허나,
으직-
“큭…….”
점차 압력이 강해지자 민성의 무릎은 점점 바닥으로 내려갔다. 민성은 안간힘을 다해 압력에 저항하고자 했다.
“왜 그러나, 인간? 정신 차려라!”
티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황급히 민성의 등을 두들겼다. 허나, 민성의 상황은 조금도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코트! 코트가 문제다! 코트를 벗어라, 인간!”
‘이런 빌어먹을……. 나도 알지!’
녀석의 말이 맞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코트를 입고 나서 이 기현상이 벌어졌으니, 원인은 당연히 코트에 있을 터. 그러나 벗으려 해도 팔을 짓누르는 압력이 그를 방해했다.
“시……발…….”
힘이 빠져가는 다리는 점점 후들거렸고 머리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때,
[피에 젖은 블랙 코트의 원활한 사용을 위해선 시련의 숲을 클리어하셔야 합니다.]
메시지 하나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시……련?’
대검 때는 수련이더니 이번에는 시련이란다. 어처구니없음에 웃음이 나왔지만, 압력 탓에 웃음은 신음으로 바뀌었다.
[클리어하시겠습니까?]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거절하면 압력은 계속 그의 몸을 짓누를 것이고, 최악의 경우 쥐포가 된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시련의 숲으로 이동합니다.]
민성은 앓듯이 중얼거리곤 혼절해 바닥에 몸을 뉘었다.
*
“이……시오!”
“끙…….”
몸을 흔드는 거친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 차리시오!”
낯선 목소리에 비몽사몽 중에 있던 민성은 눈을 부릅뜨고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템 창.”
본능적으로 아이템 창을 외쳤지만, 아차 싶었다. 수련 때나 타워의 전투, 현실을 제외하곤 아이템 창이 나오지 않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수십 개의 칸으로 나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민성은 주저 없이 대검을 빼들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 겨눴다.
“누구냐.”
“……거 생명의 은인에게 너무한 거 아니오? 기절한 것 같아 깨워줬더니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정체 모를 목소리가 그를 타박했지만 민성은 개의치 않았다. 흐릿했던 시야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목소리 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엔 횃불을, 다른 손에는 기다란 장검을 쥔, 앳돼 보이는 소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투 튼 머리와 검은 도복이 어딘가 기묘하게 느껴졌다.
“죽이려고 다가온 건 아니고?”
민성은 대검을 계속 겨눈 채 주변을 살폈다. 주변을 깊게 덮은 어둠 사이로 소년이 쥔 횃불이 잔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을 완전히 드리워내기엔 역부족한 크기였다.
‘이런, 젠장……. 보내려면 좀 곱게 보내주든가. 아니면 입기 전에 좀 알려주면 덧나?’
소년과 맞닥뜨리기 전 상황을 떠올린 민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소년을 쳐다봤다.
“죽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무릇 진정한 사내대장부는 약자와 여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법. 행색이 수상타 하여 혼절한 이를 못 본 척하고 등 돌리는 그런 남자가 아니외다!
“내 눈에는 네 의복이 더 수상해 보이는데?”
민성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년의 몸 위아래를 훑자, 소년은 얼굴이 벌게졌다.
“그 무슨 무례한 언사요! 이…… 이래 봬도 조선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인이 직접 만들어 준 도포요!”
“……조선?”
뜬금없는 소년의 말에 민성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조선이라니. 설마 과거로 떨어진 것은 아닐 터.
“그렇소. 조선.”
“그럼 지금 옥좌에 앉아 계신 임금은 누군데?”
민성은 대검을 위아래로 까딱이며 소년을 노려봤다. 떨어진 연도를 알 필요가 있었다. 혹 왜란이라도 터진 시기로 왔다면 꽤나 난처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임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소년은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민성의 얼굴을 쳐다봤다.
“임금 말이야, 임금. 몰라? 조선의 왕. 국왕, 인마!”
민성 역시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신분 높아 보이는 의복을 입은 탓에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건만, 일국의 국왕 이름을 모른다?
“난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소. 것보다 이 도포로 말할 것 같으면…….”
‘나도 네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소년에게 명나라는 아는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이것저것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답은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더 이야기를 끌어 봐야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민성은 화제를 전환하고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 그래. 그건 그렇고. 그래서 여긴 어딘데?”
소년은 자세히 보라는 듯 재차 도포를 펄럭여 보였다. 하지만 민성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곤 주변을 살폈다. 분명 시련의 숲으로 이동한다 했건만, 보이는 것은 그저 황량한 어둠뿐이었다. 명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어디라니요! 혹 혼절했을 때 돌부리에 머리를 부딪혀 기억이라도 잃은 것이오? 이건 잘 보이시오?”
소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손가락을 들어 민성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갑작스러운 소년의 행동에 민성은 픽 웃으며 슬며시 대검을 내렸다.
‘하긴 죽일 생각이었으면 기절했을 때 죽였겠지.’
“그래. 머리가 띵한 것이 잘 기억나질 않아. 그러니 좀 알려줄래?”
민성은 머리를 붙잡고 어지럽다는 듯 몸을 비틀거렸다. 소년은 급히 말에서 내려 민성을 부축하며 그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짧은 머리에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옷차림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오?”
‘처음 온 곳인데 기억이 나겠냐?’
“충격이 꽤 컸나 봐.”
민성은 머리를 매만지며 그가 환자임을 어필했다.
“그래도 인적 드문 곳에서 목숨이나마 건진 걸 보니 천운이 따르는가 보오. 이곳은 청송림 옆에 위치한 평원이오.”
‘청송림? 평원? 시련의 숲이 아니고? 빌어먹을……. 설마 잘못 보낸 건 아니겠지?’
기대했던 답과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오자 민성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행색을 보니 보부상은 아닌 것 같고 나그네 같은데…… 거동은 할 수 있겠소?”
민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언사로 엉뚱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마을은 이곳에서 멀지 않소.”
소년은 손가락을 들어 서쪽을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쪽으로 세 시진 정도 가다 보면 마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천운이 아직 그쪽에게 남아 있다면 들짐승들을 맞닥뜨리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소년은 세워놨던 말에게 다가가 안장에 걸려 있는 작은 주머니를 빼냈다. 그리곤 그것을 민성에게 건넸다.
“하루분의 식량이요.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기도 하고. 그럼…….”
주머니를 받아든 민성은 말안장에 올라타는 소년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시련의 숲으로 가득했다.
‘어쩐다. 진짜 엉뚱한 곳으로 떨어진 것 같은데……. 아, 혹시 저놈은 알지 않을까?’
“잠깐. 혹시 시련의 숲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민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고삐를 채려는 소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