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화 - 작은 도마뱀을 건들면
46. 작은 도마뱀을 건들면 아주 X되는 거야.
“어떻게 한 겁니까?”
민성은 귀걸이를 건들며 혜정을 바라봤다.
“대화 상대를 떠올리고 평상시처럼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말해보게.”
“들리십니까?”
“대화도 머릿속으로.”
민성이 작게 중얼거리자, 혜정은 그게 아니라는 듯 그의 민머리를 톡톡 가리켰다.
“…….”
“인상 펴라, 인간. 더 못생겨 보인다.”
민성이 머리에 힘주고 이맛살을 찌푸리자, 허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티노는 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민성은 새로운 통신법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머릿…….’
[……속으로…… 들리십니까?]
[금방 배우는군.]
혜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그제야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그를 바라봤다.
“이제 이해했습니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템이군요. 기간제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걱정 말게. 자네가 필요로 한다면 나중에 더 집어오지.”
“혹 이것도 인스턴트 던전에서 나오는 아이템입니까?”
민성은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냈다.
“그건 기밀일세. 어쨌든 이제 연락망이 생겼으니 차후 자네에게 필요하다 싶은 정보가 들어오면 여기로 연락하지.”
혜정은 대답을 회피하며 귀걸이를 가리켰다.
“저도 대사님께 도움이 될 법한 정보를 얻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로 상부상조해야죠.”
민성의 입에 발린 말에 혜정은 푸근한 미소를 보였다.
“말만이라도 고마우이. 허나 상부상조도 좋지만 자네가 자각사로 들어와 주는 것이 노승에겐 최고의 선물이 될 것 같은데.”
혜정은 민성의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하지만 민성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침묵을 유지하자, 혜정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손사래 쳤다.
“농담이네. 이미 자네는 자네만의 세력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니 말이야. 될성부른 떡잎이 이미 땅 깊숙이 뿌리내렸는데 내가 그걸 뽑을 수는 없지 않나?”
노승은 민성의 뒤편에 자리한 그의 일행들을 힐끗 살피며 미소 지었다. 마교 지부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해도 가녀려 보이기만 하던 새싹이 지금은 나무가 되기 위해 한껏 양분을 끌어 모으고 있다. 떡잎의 성장이 기대됐다.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말이다.
“그럼 전달할 것도 다 전달했으니 늙은 땡중은 이만 돌아가 보겠네. 하지만 그전에. 어째서 묻지 않는 건가?”
“뭘 말입니까?”
“자각사가 정부와 손잡은 것 말일세. 그 까닭이 궁금할 거라 생각했네만.”
노승이 의아함을 보이자, 민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대사님께는 대사님이 추구하시는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정부의 협조가 필요했겠죠. 제가 제 목적을 위해 움직이듯 대사께서도 대사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시는 것. 각자 뜻하는 바를 이루는 것, 그게 사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신 그 목적 때문에 저한테 불똥이 튄다면, 저 역시 관심을 가지게 되겠죠.”
“…….”
민성의 담담한 발언에 수염을 매만지던 혜정의 손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그렇지……. 허허, 확실히 자네 말이 맞네. 각자의 목적에 따라 충실히 움직이는 것. 그게 사람 사는 것이지! 그래서 빈도가 아직 진정 속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야.”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표정을 짓던 노승은 체통도 잊고 호탕하게 웃었다. 민성 역시 멋쩍게 웃으며 노승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럼 역으로 묻고 싶네. 자네가 추구하는 목적은 뭔가?”
잠시간 웃음을 쏟아내던 노승은 웃음을 뚝 그치곤 민성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자네 정도의 실력자라면 금세 거목으로 성장할 터인데, 거목이 되어 무얼 하고 싶은 건가?”
민성은 헛웃음 흘리며 하늘을 지그시 응시했다. 옅게 흩날리는 눈발이 그의 내면을 더욱 잠잠케 했다.
“아직 거목조차 되지 못했는데, 먼 미래를 생각해서 무엇 합니까? 일단 눈앞의 현실 하나하나에 집중해 거목이 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거목은커녕 어린 나무조차 못 되는 떡잎이 태반이지.”
눈썹을 씰룩이며 굳은 표정을 짓던 노승은 다시 미소를 띤 채 민성을 바라봤다.
“자네의 생각은 잘 알았네. 그리고 너무 걱정 말게. 자네한테 불똥 튈 일은 없을 테니. 오히려 언젠가 소미가 공주 자리에 오르면 자네를 부마 후보감 1순위로 점지하지. 그럼, 조만간 연락 취하겠네.”
겨우 웃음을 거둔 노승은 민성의 어깨를 몇 번 토닥여주곤 막사가 위치한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예측 어려운 노승.”
신은 멀어져가는 혜정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맞아. 아루도 같은 편인지 아닌지 도무지 종잡지를 못하겠어.”
아루 역시 고개를 주억이며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적어도 당장 우리한테 피해 입힐 사람은 아냐.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
낮게 읊조린 민성은 몸을 돌려 그의 일행들을 바라봤다.
“이제 이동하자. 다들 피곤할 텐데 조금이라도 쉬어야지.”
휴식이라는 말에 젊은 얼굴들에는 작은 미소가 퍼졌다. 민성이 걸음을 옮기자 일행들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
덜컹-
“후…….”
비밀스러운 집으로 돌아온 민성은 곧장 그의 집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딱히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도 않았건만 왠지 어깨가 뻐근한 것 같았다.
‘세면장도 있고 식량도 아직 충분하니까 알아서들 정비하고 쉬겠지.’
함께 들어온 다른 이들은 임시 휴식처로 이동했을 터. 현관문을 젖힌 민성은 곧장 거실로 이동했다.
“저 왔어요.”
“오오오! 싱싱한 주인! 다시 돌아왔어!”
민성이 슬쩍 손들자, 벽에 박혀 있던 고양이 머리는 언제나 그랬듯 코를 움찔거리며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별일 있었겠냐만, 별일 없었죠? 혹시 지금도 배 아파요?”
민성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시바의 입을 바라봤다. 녀석의 배가 아프다는 것은 곧 임시 휴식처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아니다, 싱싱한 주인! 싱싱한 주인이 들어갔다 오고 나선 괜찮아졌다! 고맙다! 고맙다! 냥냥냥냥!”
녀석의 격한 감사표시에 순간적으로 집이 흔들거렸다.
“고맙긴요. 별 탈 없이 있어주니 제가 더 고마운데요. 또 문제 생기면 곧바로 말해요. 알았죠?”
‘여태까지 여기다 때려 박은 루비가 얼만데. 또 문제 생기면 안 되지.’
민성은 상냥한 어조로 시바를 다독이곤 거실을 나와 그의 방으로 이동했다.
“이제 얼른 개봉해봐라, 인간. 도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다.”
티노는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세면장에서 나온 민성을 독촉했다. 집으로 들어올 때부터 입 꼬리를 실룩여대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좀 기다려봐요. 그 전에 애 먹이 좀 주고요. 소환, 차원용 그란칼.”
민성이 작게 중얼거리자,
“킥! 킥!”
주먹만 한 붉은 도마뱀이 그의 침상 위에 나타났다.
“오! 오늘은 안 자고 있었네?”
민성은 귀엽다는 듯 그란칼의 턱을 간질이며 미소 지었다. 소환할 때마다 잠들어 있어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침대를 빨빨 돌아다니는 걸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킥! 킥!”
잘 돌아다니던 녀석이 갑자기 배를 보인 채로 누워 짤막한 팔로 배를 쓰다듬었다.
“응? 왜 그래?”
당황한 민성은 그란칼의 몸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하지만 녀석이 원하는 걸 알 도리가 없었다.
“킥! 킥! 킥!”
“왜 그래? 혹시 너도 배 아파? 배 속에 임시휴식처라도 갖고 있는 거야?”
“배가 고프다는 뜻 아닌가, 인간? 인간도 배고프면 벌러덩 누워 배를 쓰다듬지 않나?”
옆에서 가만히 구경하던 티노는 답답하다는 듯 슬며시 끼어들었다.
“아! 그런 건가요? 가만있자. 뭘 줘야 하죠? 그래도 용이니까 고기를 먹겠죠?”
“그건 부모가 잘 알지 않나? 잘 생각해봐라, 인간.”
“흠…….”
잠시간 고심하던 민성은 방 한쪽에 쌓아둔 통조림 몇 개를 들곤 급히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곤 소고기 통조림을 까 녀석에게 내밀었다. 혹여나 베일까 싶어 뚜껑까지 완전히 제거해줬다.
“킥!”
그러자 배를 어루만지던 녀석은 몸을 벌떡 일으켜 통조림 내부를 살폈다.
탁-
“어? 왜? 소고기 싫어해?”
녀석이 부들거리며 통조림을 밀어내자 민성은 다른 통조림을 열어 내밀었다.
돼지.
“킥!”
생선.
“킥! 킥!”
어떤 걸 내밀어도 녀석은 팔로 밀치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첫 식산데 잘 먹어야지.”
안타까운 마음에 민성이 재차 통조림을 디밀어봤지만 녀석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인간처럼 잡식스러운 입맛이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의외로 채식주의자일지도 모르죠. 후……. 조만간 야채 서리하러 나가야겠네요.”
백화점에 진열돼 있던 야채들을 떠올린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때까진 당분간 들어가 있어. 알았지?”
그란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민성이 다시 역소환하려는 찰나,
“킥!”
녀석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배에 찰싹 달라붙었다.
“미덥지 않은 부모라곤 해도 헤어지기 싫은 모양이다, 인간.”
훈훈한 그림에 티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럼요. 누가 소환했는데요. 당연히 이 정도 애정은 보여…….”
띠링-
[차원용 그란칼이 게걸스럽게 먹기를 시전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시 루비 1,000개를 소모합니다.]
‘응?’
갑작스레 들려오는 메시지에 민성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루비를 소모한다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배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도마뱀을 쳐다봤다.
“너…… 설마…… 주식이 루비는…… 아니지?”
“킥!”
녀석은 맞는다는 듯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자, 민성의 얼굴은 차차 일그러져 들어갔다.
“왜 그러나, 인간?”
“루비 도둑놈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아서요.”
“호구가 됐다, 인간! 케케케케케케!”
곧 상황을 이해한 티노는 꼬리로 민성의 머리를 건들며 크게 웃어댔다.
“얼른 안 주고 뭐 하나, 인간? 설마 굶기려는 거냐? 인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다.”
“아, 좀 기다려봐요.”
민성은 투덜거리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1,000개……. 좀 아깝긴 해도 못 모을 액수도 아니잖아? 잘 생각해봐. 그래도 6성 펫이야. 영겁나무도 어지간히 많이 처먹긴 했지만 이제 밥값은 해주잖아? 이놈도 분명 그런 타입일 거야.’
잠시간 망설이던 민성은 이내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킥!”
[차원용 그란칼이 게걸스럽게 먹기를 시전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시 루비 1,000개를 소모합니다.]
“그래! 먹어라, 먹어!”
민성이 수락하자,
[루비 1,000개를 소모했습니다.]
우물우물-
해바라기 씨를 욱여넣은 햄스터처럼 볼이 빵빵해진 그란칼의 모습이 양 동공에 크게 들어왔다.
“킥!”
“……맛있냐?”
“킥! 킥!”
민성은 굳은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까끌한 머리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차원용 그란칼이 게걸스럽게 먹기를 시전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시 루비 1,000개를 소모합니다.]
“……야!”
“킥!”
잠시 후, 민성은 아까보다 팽창해 있는 그란칼의 볼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3천개의 루비가 증발하자, 민성은 아이템 창을 열어 멍하니 남은 루비를 살폈다. 쓰고 남은 찌꺼기가 61개.
[루비 61개를 소모했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그마저도 모조리 털어가 버렸다. 물론 민성의 허락이 있었기에 도둑질이 가능했지만, 자비심 없는 대도는 그나마 남아 있던 찌꺼기마저 싹 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