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화 - 비릿한 매수(5)
“내가 젊은 시절 베트남에 파병 나갔을 때 느낀 게 있었는데, 뭔 줄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없는 장수는 일개 병사만도 못해. 그런 놈들은 부하까지 사지로 끌고 들어가지. 아군에 해가 되는 백해무익한 것들.”
어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어조에 이종범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지위 높고 힘이 강한 게 전부가 아니야. 그걸 올바르게 사용할 머리가 있어야지.”
“맞습니다. 놈에게는 과분한 물건입니다.”
이 부장은 머리를 톡톡 건드리는 그를 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니 놈이 알고 있는 보물 창고는 반드시 우리가 차지해야 해. 다른 놈들 손에 넘어가기 전에.”
“명심하겠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마. 입이 무거운 놈도 손가락 전부 잘려 나가면 불게 돼 있어. 어떻게든 정보를 토해내게 만들어. 내가 하사했던 구호, 기억하나?”
박정후는 당연하다는 듯 읊조리며 이 부장을 빤히 쳐다봤다.
“폭력에는 더 큰 폭력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놈이 호출에 응하는 날, 각하께 지도를 바치겠습니다.”
“좋아. 결국 이 혼란기의 진정한 승리자는 우리 한국이 될 거다. 선두의 이점을 누려야지.”
박정후는 낮게 이죽이며 세계지도를 떠올렸다. 현재 들어온 정보론 괴수들이 출몰한 지역은 아시아권 국가들로만 한정돼 있다. 언뜻 보기에는 불리하지만 세상만사 모르는 법이었다. 그는 이 이변이 일회성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바이러스가 퍼지는 시작점에 한국이 끼어 있었을 뿐이지, 한 번 들어온 바이러스는 전 국가로 퍼져나갈 것이다,
“먼저 백신을 확보하는 놈이 세계의 종주국이 될 것이고, 나 역시 거대한 제국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박정후는 작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지도를 응시했다. 처음이야 무력통일과 종신 대통령을 꿈꿨지만 이번 사건의 규모를 듣곤 생각이 바뀌었다. 그간 강국들 사이에 껴 얼마나 많은 설움을 당했던가. 전부 되돌려줄 기회이자 찬스가 찾아왔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각하를 보좌하겠습니다.”
이종범의 외침에 박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를 응시했다.
꿈틀-
그들은 몰랐다. 난로 불빛에 드리워진 이종범의 그림자가 작게 꼬물거린다는 것을.
*
“진짜 괜찮은 거야?”
“이상 징후 없나?”
일행은 곧장 민성의 몸 상태를 살폈다.
“진짜 괜찮아. 그 땡중이 그렇게 머뭇거렸을 때 보통 물건이 아니란 건 예상했어.”
민성은 가슴을 톡톡 쳐 보이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곤 군인들에게 잡혀 있던 부원들과 합류해 안전지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근데 그 사람, 아니 그분. 정말로 그 계약 조건을 받은 거야? 수정한 걸?”
안전지대와 경계선 중간부근쯤을 걷고 있을 때, 아루는 궁금하다는 듯 질문했다.
“수락 결과. 너도 봤다.”
신의 무담담한 답변에 아루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아는데 너무 황당하잖아. 솔직히 민성이 계속 거부하면 그만인 조건이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성은 픽 웃으며 대화에 끼었다.
“원래 계약이란 게 다 그런 거지, 뭐. 있는 놈이 갑 되는 거고 없는 놈은 내용만 확인하고 서명.”
민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사인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힘이 있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힘이 없었다면 입장이 바뀌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화 나누는 것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해.’
“그래서 조건대로 이행할 것?”
“응?”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민성은 신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정부 제시한 조건. 이행할 것?”
“글쎄……. 생각 중이야. 구미 당기는 보상을 걸면? 덤으로…….”
순간, 저도 모르게 퀘스트를 언급하려던 민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덤?”
“아냐. 그보다 왜?”
민성은 멋쩍게 웃으며 어물쩍 대화를 돌렸다.
“내키지 않음. 정부. 어떤 의도 갖고 보상 내건 것인지 전혀 예측 불가. 그 와중 명령 거부권 설정은 탁월한 선택.”
“그렇긴 하지…….”
민성이 미간을 찌푸리자, 신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향후 움직임 현명한 판단 필요. 떠나기 전 말했던 것, 완수?”
강해져라. 한 달 전, 신이 요구했던 사항이었다. 민성 역시 그의 뜻에 동의하곤 버섯을 찾아다녔었다. 하지만 그간 얻은 루비는 3천 개.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숫자였다.
“설마……. 한 달간 논 것?”
순간, 민성이 걸음을 멈추자 신 역시 멈춘 채 그를 지그시 올려다봤다.
“아냐! 완수까진 아니고 적당히?”
애매한 액수에 괜히 제 발 저린 민성은 다급히 손사래 쳤다.
“인간, 재미없는 인간한테 혼나는 건가? 케케케케케.”
허공에서 티노의 요란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민성은 계속 신의 입을 주목했다.
“정부 속셈 파악 어려움. 다른 강자들 다수 존재. 계속 강해져야 함. 기왓장 떨어지면 다시 올리면 됨.”
신은 팔을 들어 자신과 아루 그리고 부원들을 가리켰다.
“그건…….”
민성이 반론하려 했으나, 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팔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재차 말함. 기둥 무너지면 집 무너진다. 기둥 무너지면 일으키기 어려움.”
신은 활대를 들어 끝 쪽이 막사를 향하게 가리켰다.
“기둥 무너지게 할 외부요소 다수 존재. 여태껏 출신 모르는 능력자들만 경계 대상. 이제 정부도 포함. 정부의 정확한 목적 파악 필요.”
“맞아.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민성은 동의하듯 머리를 주억거렸다. 불평등한 조건에 합의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여튼 그 땡중이 문제야! 애초에 계약서나 회의 안건 같은 건 미리 알려주면 좋잖아? 그리고 협박 받을 때 모르는 척하는 거 봤어?”
아루는 분통을 삭이기 어려웠는지 씩씩대며 말을 이어갔다.
“민성이가 손녀 구한다고 그렇게 도움 줬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땡중은 그렇게 굴면 안 되는 것 아냐? 같은 편인 척하더니 가장 중요한 것도 안 알려주고…….”
“땡중이라……. 그건 혹시 날 지칭하는 말인가? 허허허.”
“꺅!”
느닷없이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아루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건 미안하게 됐네. 나도 설마 업보의 계약서가 나올 거라곤 예상도 못 했으니까 말이야.”
노승은 어색하게 웃으며 민성들을 찬찬히 훑었다. 그의 시선이 민성에게 닿자, 혜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허이. 자네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협약을 맺은 입장이다 보니, 누구 편을 들기가 어려웠어.”
노승의 앓는 소리에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간접적으로 도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정부와 협약을 맺은 그가 도움을 주기 요원하리라 생각했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정부는 준비가 덜 됐다는 그의 발언 덕에, 협상에서 심리적 우위를 가져갈 수 있었다.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보는 눈이 많아 회의가 파장하기만을 기다렸지.”
혜정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받게.”
“이건 뭡니까?”
혜정이 건넨 것은 조그마한 귀걸이 한 쌍과 물빛이 나는 동그란 메달이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빠르지 않겠나?”
혜정은 빙긋 웃으며 그의 손에 두 가지 물건을 쥐여 주었다.
[영력을 가진 옥 귀걸이]
등급: ★★★
설명: 수많은 세월을 거쳐 영력을 얻은 귀걸이. 통신을 원하는 이들끼리 귀걸이를 한 짝씩 나눠 착용하면 된다.
효과: 거리에 상관없이 착용자끼리 대화가 가능하다.
횟수제한: 1년
[수달]
등급: ★★★
설명: 오랜 시간 바닷속에 잠겨 청량한 물의 기운을 간직하게 된 메달.
효과: 거리에 상관없이 착용자끼리 대화가 가능하다.
횟수제한: 1년
“이것들…… 모양만 다르지 똑같은 것 아닙니까?”
“맞네. 아, 돌려줄 필요는 없어. 전부 자네 것이야, 대신 귀걸이만 한 짝 주게.”
민성이 의문에 찬 표정으로 물건을 돌려주려 하자, 혜정은 고개를 저으며 민성이 내민 귀걸이 한 짝을 받았다.
“가벼운 설명을 곁들이자면 메달은 정부에서 자네에게 주는 선물이지.”
“설마…….”
민성은 눈가를 찌푸린 채 손에 들린 메달을 내려다봤다. 통신이 가능한 물건, 그것도 정부 것이라 하니 메달에 담긴 뜻을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마땅한 통신수단도 없는 마당에 어떻게 연락하려나 했더니, 정부는 이걸로 저한테 명령할 생각인가 봅니다?”
민성의 이죽임에 혜정은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 다 버리고 자네와 계약한 사람들이야. 그들도 자네를 최대한 이용하려 하겠지. 그러려면 연락은 기본이고 말이야.”
‘뭐, 연락 오든 말든 안 받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민성은 조소를 흘리며 메달을 아이템 창에 넣었다. 그리곤 눈빛으로 귀걸이를 가리켰다.
“그럼 메달은 정부가 준 선물이고 이건 대사님 물건인가 보군요.”
노승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제한시간이 있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이런 물건을 주신 이유가 뭡니까? 손녀분을 구한 것 때문이라면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민성은 재차 귀걸이를 내밀었다. 손녀를 구해준 보상은 이미 반지와 인육 먹는 놈들의 정보로 퉁 쳤다고 생각했다. 헌데 또 은혜 갚는 까치마냥 물건을 쥐여 주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설마 이것도 놈들의 수작질은 아니겠지?’
순간, 이 또한 정부가 파놓은 함정인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민성은 곧 생각을 수정했다. 원래 목적과 목적이 맞닿아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정부와 손잡았다고 구태여 그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자네와 연락하고 싶어도 통 방법이 있어야 말이지. 이렇게 마주쳤을 때 줘야지 언제 주나? 거기다 앞으로 일하다 보면 대면할 일도 많을 터. 기간제 아이템이니 부담 없이 받아줬으면 좋겠네.”
“정 그러시다면야…….”
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걸이를 꽉 쥐었다. 확실히 득이 됐으면 됐지, 손해는 아니었다. 비밀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니, 정부의 동향도 그를 통해 넌지시 귀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가? 잘 어울리나?”
혜정은 주위를 힐끔 살피곤 말없이 큼지막한 왼쪽 귓불에 귀걸이를 착용했다. 그리곤 귀걸이를 건들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승복에 석장 그리고 덜렁거리는 귀걸이는 묘한 어울림을 자아냈다.
“네……. 뭐, 잘 어울리십니다.”
“안 그래도 땡중 같던 분이 더 땡중이 됐네.”
등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아루의 속삭임에 민성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네도 착용해보게. 잘 작동하나 확인해야 하니 말이야.”
혜정의 권유에 민성도 혜정이 했던 것처럼 그의 귓불에 귀걸이를 갖다 댔다.
철컥-
민성은 자석마냥 달라붙은 귀걸이를 건드려봤다. 생각보다 꽉 달라붙은 것이, 이 정도 힘이라면 어지간한 충격에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크흠, 크흠. 잘 들리나?]
‘응?’
갑자기 헛기침 소리와 함께 혜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