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67화 - 비릿한 매수(3)
“…….”
민성은 몇 번이고 계약서를 반복해서 읽어 내렸다. 신경 써야 할 가장 큰 줄기는 세 가지였다.
통칭 갑을 박정후라 칭하고 을을 강민성이라 칭한다.
1. 을은 갑의 지원 요청에 성실히 임해야 한다. 단 을이 불합리한 요청이라 판단한 경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2. 을이 지원 요청을 수락해 임무를 완수했을 시, 갑은 을에게 반드시 그에 따른 보상을 지급해야 한다. 이때의 보상은 갑이 선정한다.
3. 을이 임무수행 시 갑은 을을 지원하고, 을은 갑의 지시에 따라 성실히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 계약은 서명자 한쪽이 사망하기 전까지 유효하다.
‘이건……. 뭔 개소리를 이리 상세하게 적어놨어?’
계약서를 쭉 훑은 민성은 픽 웃으며 계약서를 내려놨다.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역시 원하는 조건을 말해보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 너희들 싸구려 심성이 어디 가겠냐?’
민성은 계약서를 넘겨 신과 아루에게도 보여주었다.
“이상은 없음. 다만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 굳이 계약할 필요 없음. 계약, 상호 간 동의가 있어야 가능.”
민성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신은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래. 그게 맞지.”
민성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해봐. 불합리한 조건은 넣지 않았어. 이래 봬도 우리 대법관이 손수 작성한 조항들이니까, 믿어도 좋네.”
박정후의 말에 좌중들 중 하나가 숙이고 있던 머리를 더욱 숙여 보였다.
“물론 자네가 거절하면 대체재를 찾아야겠지만.”
박정후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민성을 바라봤다. 정보에 따르면 스킬이나 아이템에 과도할 정도로 욕망을 보이는 놈이라 했다. 학력은 고졸. 누구나 대학 진학을 지향하는 현대 시점에선 낙오자에 가까운 지능 보유자. 계약서를 살피는 척하지만 무슨 내용일지 모를 게 뻔했다.
“더 시간이 필요한가? 이미 충분히 살핀 것 같은데.”
민성이 한참 동안 계약서를 붙들고 있자. 박정후는 재촉 아닌 재촉을 던졌다.
“계약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하는 거 모르십니까?”
“신중함이 나쁜 건 아니지만 과도한 신중함은 독이 되기도 하지. 신중함에 눈이 가려져 눈앞의 이득을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말이야, 지금처럼.”
박정후는 현 계약이 그에게도 이득이라는 것을 은연중 설파했다.
“음…….”
민성은 낮게 신음하며 붙들고 있던 계약서를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정부의 산하에 들어와 병력들을 통솔하고 지휘하여 적을 몰살시킨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지 않나?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그 정도 포부는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습니까?”
민성이 고심하는 듯 머리를 숙이자 박정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올리는 성과에 따라 자네에게 독자적인 행동권과 명령권도 부여할 생각이야. 여단급 병력을 자네의 주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지휘권 같은 것 말야. 그러니 확인 끝냈으면 계약서 밑의 공백란에 서명하게.”
“그러죠. 공백란이 어디에 있더라?”
“흠…….”
순간, 너무 천연덕스러운 자세로 나오니 꿍꿍이가 있나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의심은 곧 놈이 서명하리라는 확신에 희석되어갔다. 서명하는 순간 놈은 올가미 속에 갇힌 맹수 꼴이 되리라.
“여기에 하면 되는 거죠?”
“그래.”
박정후는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민성이 쥐고 있는 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펜이 살짝 흔들릴 때는 몸까지 움찔했다.
“그럼 서명을…….”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본 민성은 옅게 조소하며 펜을 내려놨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체스 말들이 놓인 지도 앞으로 다가갔다.
“왜 그러나?”
민성의 돌발행동에도 박정후는 담담히 그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씀해주십쇼. 호구로 보셨습니까? 지휘권? 통솔? 그딴 걸로 낚일 거라 생각했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네.”
“그렇습니까? 그럼 아주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민성은 비웃음을 흘리며 비숍을 들어 책상 밖으로 빼냈다. 그 뜻을 파악한 박정후는 한쪽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계약하기 전에 몇 가지 추가 조건을 걸고 싶습니다. 불리한 조항들은 물론이고, 솔직히 허울 좋은 쓰레기템 하나로 어떻게 해보려는 거 제 입장에서는 좀 그렇거든요. 거절하시면 계약 얘기는 없던 걸로 하죠.”
“저, 저런 몰상식한…….”
좌중들은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민성을 쏘아봤다. 하지만 민성은 비숍만 만지작거리며 박정후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얘기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첫째, 명령 거부권을 주십쇼. 원할 때 원하는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개 같을 때 개 같은 일을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불합리한 요청이라 판단한 경우,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가장 어이없다 여긴 조항이었다. 단순히 이의만 제기해서 뭐 할 건가? 불만을 표출할 수 있지만 요청에는 성실히 임해야 한다는 개 같은 조항이었다. 받은 것 이상으로 부림당하는 건 사절이다.
“둘째, 만약 일하게 될 경우 추가 보상을 요구합니다. 첫째 사항이랑 같은 맥락입니다. 겨우 아이템 하나로 퉁친다? 말도 안 될 일이죠. 아, 그리고 돈은 필요 없으니 지금같이 아이템이나 스킬 같은 보상을 원합니다. 최소한 급수 좀 되는 3성 이상으로요. 무엇보다, ‘선불’입니다.”
민성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까지 흔들어 보였다.
“이 조건 안 받으면 체결 절대 못 합니다.”
“흠…….”
“그런 말도 안 되는……. 각하! 억지입니다! 수락하시면 안 됩니다!”
민성에게 유리하다 못해 압도적인 조건. 좌중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를 외쳤다.
“각하! 아무리 자국이 현재 위태로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건……. 이건 아닙니다! 편파적일 정도로 상대방에게 유리한 조건입니다! 저놈의 조건을 수용할 바엔 언급하셨던 대체재와 새로이 계약하시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라 사료됩니다!”
그중 박정후가 대법관이라 지칭했던 남자는 유독 더 격렬히 반대했다.
“그쪽이 이 되도 않는 조항 삽입한 분이신가 본데, 이거 완전 웃기는 인간이네? 그쪽이 들이민 조항들은? 편파적인 조항들이 아니고 공정한 조항이다? 이 새끼 불륜 저질러놓고 로맨스라 외칠 인간이네.”
“뭐야!”
민성의 이죽거림에 얼굴이 벌게진 대법관은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 물러나 있어.”
“하지만 각하…….”
박정후의 명령에도 대법관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승낙하려는 낌새를 보인다면 어떻게든 막아낼 심산이었다.
“나도 불리한 조항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알겠습니다.”
대법관이 한 발 뒤로 물러나는 뉘앙스를 보이자, 잠시간 침묵하던 박정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 첫 번째야 그렇다 쳐도 두 번째 사항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사안이야. 타워가 열려있었다면 모를까. 어려울 것 같군.”
그의 앓는 소리에 민성은 조소를 흘리며 검은 옷이 담긴 상자를 가리켰다.
“이제 와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그간 탈취하셨던 게 있지 않습니까. 타워로 끌려들어갔던 사람들, 꽤 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휘유, 이미 조각 모아서 스킬도 만드신 것 아닙니까, 각하?”
“…….”
정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언급했던 것이 역으로 돌아오자 박정후는 어색한 미소만 흘렸다.
“전 아쉬울 게 전혀 없습니다, 각하. 솔직히 이깟 계약 안 하면 그만입니다. 그래도 조국을 생각하는 일말의 애국심 탓에 하려 했더니, 에휴. 싫으시면 말고요. 가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계약. 속이 좀 많이 쓰리긴 해도 그가 숙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민성은 주저 없이 일행을 데리고 천막을 나서려 했다.
“각하! 저놈이 아직 안전지대 안이라 기고만장하나 본데, 병력들에게 연락을 취해 나가는 즉시 사살해야 합니다! 저런 매국노 새끼들은 자국에……. 헉!”
“안전지대니까 다행인 줄 알아야지.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어.”
눈 깜짝할 새 되돌아온 민성은 입만 벙긋거리는 관료의 목에 대검을 겨누곤 빙긋이 웃었다.
“어……. 어…….”
“능력 없이 입만 놀리면 훅 가는 거야. 그리고…….”
그의 어깨를 상냥하게 두드려주던 민성은 고개를 돌려 박정후를 노려봤다.
“노파심에 미리 말해두는데, 병력 중에 조준하는 새끼 한 놈이라도 보이면 그날이 경계선 무너지는 날인 줄 아쇼.”
차가운 말투로 경고한 민성은 대검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 보이곤 다시금 막사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박정후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막사를 울렸다.
“전부 수용하지.”
“각하! 수용하시다니요! 재고해주십쇼!”
대법관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막사를 울렸다.
‘뭐지?’
당황스럽긴 민성도 매한가지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는 조건들을 제시했다. 헌데 받아들이다니? 민성은 다시 등을 돌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무슨 생각인 겁니까?”
“무슨 생각이라니? 전부 수용하겠다는데도 불만인 건가?”
박정후의 물음에 민성은 검자루를 어루만지며 박정후를 바라봤다. 속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표정이 없다.
‘뭐, 호구계약 해주면 나야 좋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무슨 속셈인진 몰라도 그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계약서 가져와.”
박정후가 소리치자 이종범은 민성의 앞에 놔뒀던 계약서를 회수하려 했다.
탁-
그러자 민성은 계약서에 손을 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직접 수정하죠. 글 장난 하는 양반들을 여럿 봐와서.”
“……그렇게 하게.”
승낙이 떨어지자, 민성은 이 부장의 어깨를 툭 건드리곤 옆으로 비키라는 듯 손을 까딱이며 작게 속삭였다.
“나와.”
“…….”
민성은 이마를 꿈틀거리는 이 부장에게 선명한 미소를 보였다.
‘어디 보자. 이 조항은…….’
그리곤 펜을 들고 그의 입맛대로 조항을 수정해 나갔다. 조항이 수정되자, 박정후가 했던 서명은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잠시간 펜을 놀리던 민성은 이윽고 수정을 끝낸 뒤, 손을 탁탁 털며 몸을 일으켰다.
“내용 확인하시고 다시 서명 좀 부탁드릴게요. 갑자기 지워져서.”
“내가 전달하지.”
이 부장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며 손을 내밀자, 민성은 지그시 가운뎃손가락을 펴 보였다.
“너한테 맡기느니 지나가는 개새끼 입에 물려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이놈…….”
“아, 너도 개새끼였지? 미안.”
작게 속삭이던 민성은 히죽 웃으며 그의 곁을 스쳐갔다.
“자, 확인해보십쇼.”
“흠…….”
민성이 내민 계약서를 받아든 박정후는 수정된 사항들을 살피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통칭 갑을 박정후라 칭하고 을을 강민성이라 칭한다.
1. 을은 갑의 지원 요청에 성실히 임해야 한다. 단 을이 불합리한 요청이라 판단할 경우,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2. 을이 지원 요청을 수락해 임무를 완수했을 시, 갑은 을에게 반드시 그에 따른 보상을 지급해야 한다. 이때 보상은 갑이 보유하고 있는 아이템 또는 스킬로 제공하되 3성 이상의 것으로 한정한다.
3. 을이 임무수행 시 갑은 을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제공하고, 을은 갑의 지시에 따라 융통성 있게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 계약은 서명자 한쪽이 사망하기 전까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