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화 - 비릿한 매수(2)
입술을 살짝 실룩이는 이종범과 여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는 박정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은 여전히 쓰레기 아이템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터. 그 점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민성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민성의 반응을 본 박정후는 어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급 낮은 게 5성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뿐입니다.”
민성은 대검을 회수하곤 퉁명스럽게 상자를 밀어냈다. 세트 아이템을 대면한 탓에 민성은 저도 모르게 말을 높였다. 허나 이 부장만이 고개를 갸웃했을 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소리! 보기 드문 물건인데. 되놈들이 갖고 돌아가려던 걸, 이 부장이 잘 캐치했지.”
“자국에서 얻은 물건이니 당연히 저희에게 반환하고 가는 게 맞습니다.”
이종범 역시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어쩐지…….’
저들의 대화를 들은 민성은 혀를 끌끌 찼다. 이런 고급 아이템을 갖고 있는 것부터 수상하더라니, 타워에서 나온 다른 나라 사람들의 것을 갈취한 것이었다.
“이거라면 자네도 만족할 만한 보수일 것 같은데, 어떤가? 물론 당장 준다는 건 아니야. 자네가 우리 일에 충실히 협조해준다면 넘기도록 하지.”
박정후는 그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며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민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합니까? 이런 쓰레기나 받고 제가 협조하시길 바라시는 겁니까?”
민성은 손가락에 걸린 옷을 만지작거리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재차 말하지만 보기 드문 물건이야. 무려 5성 아이템인데 부족하다는 건가?”
“거 재밌으신 분입니다. 이런 농담 따먹기를 좋아하실 줄은 몰랐는데. 뭐, 그래도 상점에 갖다 팔면 조금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민성은 상자를 수행비서의 팔 위에 올려주며 고개를 저었다.
‘크윽……. 조금만 기다려.’
손에서 멀어지는 상자를 보고 있자니 속이 타는 듯했다. 하지만 민성은 아무렇지 않게 비서에게 가져가라 손짓해 보였다.
“그래서 답은?”
‘말로만 희귀하다 할 뿐, 놈들도 하찮은 아이템이라 여기고 있겠지. 근데 내가 여기서 덥석 수락했다간 오히려 놈들의 의심을 살 거야.’
“당연히 거절입니다. 쓰레기 받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일을 하라고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민성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거절했다. 그러자 박정후는 미소를 흘리며 민성의 눈을 응시했다.
“흠……. 거절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전우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다 같이 무사히 생존해 함께 나가야 하지 않겠어?”
강민성이 거절할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절을 수락으로 바꾸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곳이야 안전지대이니 강제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민성들이 지대를 벗어나면 놈의 일행 목숨을 담보로 재협상할 생각이었다. 놈은 기민하지만 동료는 아니다. 놈도 최소한의 머리가 있다면 거기까진 예상했으리라. 이성적인 대화가 오갈 때 협상을 매조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하지만 놈이 동료를 버린다는 최악의 수도 존재하니, 안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에게도 가장 좋은 수였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예상된 수작질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자, 민성은 올라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난 그저 자네 동료들 안위를 걱정한 것뿐인데. 요즘 같은 세상에서 사람 몇 죽어도 모르지 않나?”
“안전지대에서 사람 죽는 거 봤습니까? 아, 아니면 설마 경계선 믿고 협박하시는 겁니까? 근데 제 동료들이 죽으면 경계선은 멀쩡할 줄 아십니까? 경계선 난장판 되면 안전지대는 들어오려는 난민들로 북새통이 될 텐데, 볼만하겠네요.”
민성은 대검을 바닥에 꽂고는 무언시위를 했다. 일행을 건드릴 경우 경계선을 난장판 만들겠다는 간접적인 경고와 함께. 민성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는 신과 얼굴이 하얘진 아루의 모습은 묘하게 대비되었다.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닌가? 난 그저 진심으로 자네의 동료들 안위를 걱정한 것뿐이야. 워낙 험난한 세상이니 말이지.”
“그러게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저도 각하의 안위가 진심으로 걱정됩니다. 혹시 압니까? 괴수가 아닌 누군가의 대검에 죽어나가실지.”
민성은 비꼬듯 이죽거리며 눈빛으로 대검을 가리켰다.
“저, 저런 망나니 같은 놈을 봤나! 감히 어느 자리라고 협박을 해!”
“각하! 언제 각하께 칼을 디밀지 모르는 놈입니다. 미리 화근을 제거해야 합니다!”
민성의 말 속에 숨겨진 비수를 눈치챈 좌중들은 민성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다른 분들도 안전지대를 벗어나지 않는 걸 추천할게요. 언제 훅 가실지 모르니까. 아, 경고가 아니고 충고입니다, 충고.”
민성은 입가에 비웃음을 건 채, 좌중들을 쓱 둘러봤다.
“그만.”
박정후의 한마디에 막사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충고는 새겨듣지. 그래서 협조하겠나?”
“잠시만요.”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민성은 잠시 시간을 요구하곤, 그의 뒤에 자리해 있던 신을 돌아봤다.
“왜?”
듣는 귀가 많은 탓에 민성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 생각?”
“아직 생각 중이야. 하지만 들어보고 수지타산 맞으면 수락해야지. 거절하면…….”
민성은 끝말을 삼키며 멋쩍게 웃었다. 그야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도 살 자신이 있지만, 일행들은 아니다. 거절할 경우 일행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양궁부원들은 몰라도 신과 아루만은 무사히 귀환시키고 싶었다.
“재고 추천. 정치가. 믿기 어려운 족속. 최대한 연관 안 되는 편이 올바름. 그리고 놈이 존재. 양립 불가.”
민성의 마음을 알았을까, 신은 고갯짓으로 이종범을 가리키며 손바닥에 X자를 반복해 그렸다.
“내가 거절하면 죽을 확률이 높아지는데?”
민성은 신의 눈을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신 역시 무감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걱정 마.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괜찮다. 어떤 선택이건 모두 네 선택. 존중한다.”
민성이 눈을 부릅뜨자, 신은 정말 괜찮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민성은 신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상의는 끝났나?”
협상의 시작이다. 물론 속이는 건 민성이고 속는 건 정부겠지만.
“뭐, 내용이나 들어봅시다. 내놓은 쓰레기 같은 아이템에 걸맞게 쉬운 임무라면야 못 해드릴 것도 없지.”
민성의 말에 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민성은 아랑곳 않고 박정후를 노려봤다.
“지도 가져와.”
박정후가 손을 까딱이자, 수행비서는 급히 테이블에 서울 지리가 자세히 적힌 지도를 세팅했다.
“일단 이곳은 제외하고.”
박정후는 지도 한 곳에 킹 모양 한 체스 말을 올렸다. 민성은 나무 말에 깔린 영등포구를 지그시 쳐다봤다.
“저긴 이미 수복했지. 대사의 도움이 컸어.”
“허허…….”
혜정은 온화한 미소만 흘리며 지도를 바라봤다.
“어쨌건 대략적인 경로를 말하자면 우리는 영등포구를 기점으로 한강이남 부근을 최우선적으로 수복할 거야. 그렇게 되면…….”
박정후는 비서에게서 넘겨받은 지휘봉으로 킹 옆을 보좌하던 나이트 둘을 이동시켰다. 나이트들이 올라간 곳은 동작구, 양천구 두 곳이었다.
“가장 인근에 있는 곳부터 차근차근 넓혀가야지.”
“한강이남이라 하셨는데, 이북 쪽은 배제하는 겁니까?”
“그곳은 외곽에 있던 군인들에게 맡겼지.”
간만의 작전명령에 흥이 난 박정후는 손수 경기도 여기저기에 체스 말을 깔았다.
‘폰?’
가만히 박정후가 하는 일을 주시하던 민성은 모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설마 외곽에 있는 병사들을 끌어 쓸 생각인 겁니까?”
“아마 지금쯤 다들 이렇게 내려오고 있겠지.”
박정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지도에 깔린 수많은 폰들을 조금씩 남하시켰다.
“그리고 자네는…….”
그는 책상 한쪽에 있는 비숍을 들어 폰들 사이에 욱여넣었다.
“이렇게 대각으로 치고 들어가서 병력들의 무력이 통하지 않은 괴수, 즉 현대 무기가 통하지 않는 놈들만 죽여주면 된다는 소리야. 일종의 조커 같은 역할이지.”
책상에 두 팔을 고정시킨 채, 비숍을 지그시 바라보던 박정후는 시선을 위로 쳐올려 민성을 쳐다봤다.
“자, 대략적인 전략은 이해했을 거라 보고……. 이제 자네 차례인 것 같은데.”
민성은 지도에 빽빽이 들어찬 말들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전략이라 하기엔 좀 부족한 것 아닙니까? 체스는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적의 말도 없는 체스 판에서 혼자 체스 하는 게 전략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말했잖나? 대략적이라고. 상세한 정보는 자네가 동의할 경우 전달하도록 하지.”
“이해는 했습니다.”
민성은 비숍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상대방의 요구사항을 들었으니 이제 그의 차례였다.
‘어쩐다. 받아들이면 퀘스트 완수도 금방일 것 같긴 한데…….’
몇 가지 경우를 제외시키면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에 안 드는 건 정부가 민성을 마음대로 다루려 한다는 것 그 자체였다.
“흐음…….”
민성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조용히 비숍을 들어 영등포구로 이동시켰다.
“아무래도 승낙할 모양인 것 같은데.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지, 이 부장.”
박정후의 부름에 이종범은 그의 앞에 종이를 한 장 내려놨다.
‘미친……. 저게 왜 여기에 있어.’
업보의 계약서.
종이의 정체를 눈치챈 민성은 종이를 죽일 듯 노려봤다. 혜정이 손녀의 목숨과 자각사를 두고 저울질하게 만들었던 물건. 잊을 리 없었다.
‘제길…….’
혜정의 말에 따르면 계약서에 서명하고 불이행할 시, 당사자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거대한 업이 돌아간다고 들었다. 민성은 눈매를 좁히고 혜정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혹시나 그가 건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역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걸 봐선 따로 언질을 받은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백날 입으로 약속해 봐야 이깟 종이 쪼가리 하나만 못하지.”
박정후는 계약서를 팔랑거려 보이며 펜을 들어 곧장 구석에 사인했다. 그러자 이종범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들곤 민성의 앞에 툭 던졌다. 말없이 계약서를 바라보던 민성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봉사는 저랑은 좀 안 맞는 것 같네요.”
박정후가 민성을 쳐다보았다.
“5성 아이템에, 동료의 신변보장까지 받고서 봉사라고 하면 말이 좀 안 맞지 않나?”
“쓰레기 아이템에, 원래 안전했던 것을 위험하게 만들어놓고 그걸 다시 안전하게 해줄 테니 일하라? 그게 봉사가 아니고 뭡니까? 아, 봉사 아니네. 노예네.”
대통령은 피식 웃었다.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그래? 원하는 게 뭔가? 말이나 들어보지.”
“각하……!”
이종범이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는 눈초리를 보냈으나, 박정후는 손을 내저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뭐……. 일단 계약서 읽어 봅시다.”
민성이 계약서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