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 비릿한 매수(1)
64. 비릿한 매수
민성은 얼굴을 찌푸린 채 녀석에게만 보일 정도로 고개를 까딱였다. 생존자들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는 남자. 누가 봐도 그였다.
‘도대체 언제 찍힌 거지?’
타워와 대책부 요원의 시신이 있는 걸 봐선 이종범과 대치했을 때, 찍힌 사진 같았다.
‘아니, 것보다 민간인은 건드린 적 없는데 왜 이런 사진이 있는 거야? 설마... 합성한 건가?’
그렇지 않고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엄한 민간인들을 죽이고 정부 인사를 죽인 죄는 응당 처형감이다.”
이종범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냉랭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각하께선 그런 너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신다. 국가를 위해 헌신해 죄를 씻을...”
“합성이네. 아주 교묘한 합성. 소설 잘 봤어.”
“뭐?”
부장의 반문에 민성은 픽 웃으며 사진을 가리켰다.
“그렇잖아? 사진은 얼마든 합성 가능하고, 진실을 왜곡할 수 있어. 그러니까 범죄가 일어나면 다들 증인 찾으려고 안달하지. 자, 이제 되도 않는 증거물 말고 진짜 그럴듯한 걸 가져와봐.”
“…….”
민성은 얼굴이 살짝 벌게져 안경테만 매만지는 그를 보며 히죽거렸다.
“아, 설마 대책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설마 이따위 증거물 확보했다고 기념으로 부하들이랑 회식이라도 한 건가? 에라이, 이 양반아. 일을 그 따위로 하니까 국민들이 혈세, 혈세 하는 거 아냐! 일 좀 제대로 합시다.”
민성은 이종범의 목에 드러난 굵은 핏대를 보곤 비웃음을 흘렸다. 어쭙잖은 함정을 파놓곤 사자가 걸려들길 바란 것 같은데, 욕심이 과했다.
“에휴, 능력 없는 놈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니까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거지.”
“거짓말입니다! 이미 브리핑 때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놈이 가지고 있는 대검과 저 중년 남자의 대검에 같은 문양이…….”
민성의 의견을 어떻게든 뒤엎고자 이종범은 목청을 높였다.
“아직 내가 대화 중일 텐데.”
“죄, 죄송합니다.”
박정후의 서늘한 눈총에, 이종범은 급히 허리를 숙인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간 모은 정보를 빌미로 놈의 콧대를 꺾고, 주도권을 쥐겠다고 했던 호언장담이 그의 목을 옥죄여왔다.
“뭐, 오해는 하지 말게. 잘잘못이나 따지자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니까. 그만큼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산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지.”
“그렇습니까? 그래도 저런 확실치도 않은 정보로 사람 물 먹이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군요.”
민성이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자, 국가원수는 입매를 꿈틀거렸다.
“가……. 각하…….”
그 모습에 당황한 좌중들은 그를 불안하게 바라봤다.
“대사. 생각보다 재밌는 인물을 알고 계셨습니다.”
“소승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만나보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고. 헌데 저런 인재를 없애다니요. 그야말로 국가적 손실입니다.”
어느새 막사에 들어와 있던 혜정은 거 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은편에 앉은 이종범을 노려봤다.
“대사 말이 맞아요. 흥미롭습니다.”
박정후는 재미있는 장난감 보듯 민성을 바라봤다.
“뭐, 자네 말대로 정보,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것보다 자네에게 제안을 하고 싶어.”
호흡을 가다듬은 남자는 낮게 음성을 내리깔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민성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국가가 이 지경에 처하니 상당히 조급해지더라고. 미국에게 손 뻗어 봐도 뭐, 자네도 알지 않나? 항공로는 놈들에게 막혀 원군을 보내줄 수 없다고만 하니. 결국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셈이지.”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이제 감추고 있던 속내를 드러낼 시간이었다. 민성은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원하는 것? 당연히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부터 끄는 일이지. 지금 서울에 있는 괴수만 몇인지 아나? 보고에 따르면 물경 몇만에 달하는 놈들이 서울 곳곳에 박혀 있다던데 당연히 놈들부터 전부 죽이고 국가의 심장인 서울을 탈환해야지.”
“그럼 소화기를 사용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라고 만들어둔 소화기 아닙니까?”
민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종범을 재차 저격했다.
“아직 미완성이라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
“대사.”
박정후는 얼굴을 찌푸린 채 혜정을 바라봤다. 상대방에게 정부의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 꼴 아닌가?
“어이고, 소승의 입이 문젭니다.”
혜정은 함구하겠다는 듯 그의 입을 툭툭 두드렸다.
‘호오……. 그런 거였어?’
하지만 상황을 대략 간파한 민성은 눈을 빛냈다. 그들 역시 나름대로 작금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데,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그나저나 일부러 그런 건가?’
민성은 조용히 염주만 굴리는 혜정을 바라봤다.
“어쨌건 자네도 그 거대한 돌덩이들을 상대해봤으니 알겠지? 당장 믿을 건 군 병력들뿐인데 총이 통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렇죠.”
“그래서 제안 하나 하지. 이능력자 대책부장과 함께 조국을 위해 헌신하게.”
‘응?’
이건 또 무슨 개떡 같은 소리인가. 느닷없이 헌신하라니? 제안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다. 거기다 이종범과 함께 일하란다. 절대 거절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애국심 빙자해 이용할 생각. 무조건 거절.”
옆에서 이신의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제안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말씀하신 건 통보인 것 같은데요? 그것도 무보수로 일하라는 통보?”
민성은 헛웃음 치며 깍지 낀 박정후를 노려봤다.
“조국이 유래 없는 위기에 처했는데 보수를 생각했나?”
“맞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애국심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합니다!”
“당연히 조국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다 해도 모자랄 판국에, 쯧쯧쯧…….”
좌중들은 이때가 각하의 눈에 들 수 있는 기회라는 듯 민성을 쏘아붙이며 충성심을 보였다.
“거절합니다. 막말로 타국에 가도 꽤나 대접받을 텐데,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저, 저런 친일파 같은 놈을 봤나!”
“빨갱이 새끼들도 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데 이런 매국…….”
“그만.”
박정후는 손짓으로 좌중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곤, 민성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거 아나? 지금은 전시 상황, 상급자의 명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자네를 즉각 사형에 처할 수도 있어.”
“처형 말입니까?”
민성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 마. 그거 무서웠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그래도 한 나라의 중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존대해줬건만, 더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저, 저런 몰상식한! 각하! 저런 놈은 당장이라도 안전지대 밖으로 끌어내 처형시켜야 합니다!”
“맞습니다! 본보기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만. 앞으로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전원 입 다물고 있어, 알겠나?”
박정후가 버럭 소리 지르자, 좌중들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봐도 되나?”
“당연히 거절하지. 아저씨 같으면 무보수로 일하라는데 하고 싶겠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나?”
박정후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민성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 예상 내였다. 애초에 무보수 고용은 기대도 않았다. 놈이 어떤 걸 요구할지 내심 궁금하기까지 했다.
“나한테도 그럴 듯한 제안을 해야지. 혜정 스님한테도 뭔가 제안했으니까 지금 저기 계실 거 아냐? 참고로 돈이나 권력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잘 정하쇼.”
민성의 귀찮다는 말투에 좌중들은 눈만 부릅뜨고 그를 노려봤다. 오로지 혜정만이 재미있는 영화 관람하듯 구경할 뿐.
“흠……. 어쩔 수 없나. 가져와!”
박정후가 손짓하자, 수행비서들은 급히 막사 한편에 있던 금고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그리곤 그것을 공손히 테이블 위에 올렸다.
“풀어.”
‘상자?’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단이 풀리자, 드러난 것은 작고 허름한 상자였다. 박정후는 몸소 몸을 일으켜 뚜껑을 열었다. 민성은 관심 없는 척하며 힐끗 내용물을 살폈다. 안에는 거무튀튀한 천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뭡니까?”
“직접 보게.”
박정후의 지시가 떨어지자 수행비서들은 박스를 들어 조심스레 민성 앞에 내려놨다.
[낡고 허름한 블랙 코트]
등급: ★★★★★
설명: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낡고 해진 코드. 입으면 착용자도 낡아 보일 것 같다.
방어력: 30
특수능력: X
‘호오, 어떤 걸 내놨나 했더니……. 장난하나?’
내용을 확인한 민성은 픽 웃으며 들고 있던 코트를 내려놓았다. 방어력은 처음 보는 수치였지만 여태껏 수많은 고급 아이템을 봐온 그는 알 수 있었다.
‘완전 개 쓰레기 같은 아이템을 갖다 놓고 협상하자고?’
어처구니가 없으니 나오는 건 헛웃음뿐이었다.
“어떤가? 우리도 출혈 감수하고 내놓은 물건인데,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보수라 생각하지 않나?”
“출혈? 단어의 뜻은 알고 쓰는 거지?”
잠깐이나마 아이템에 대한 기대 탓에 존대하던 민성의 말끝이 다시 짧아졌다.
“5성 아이템이야. 출혈이 아니면 뭔가? 자네가 들고 다니던 대검보다 좋을지도 모르지.”
“5성? 대검? 아이템 창.”
민성은 비틀린 웃음을 흘리며 대검을 꺼내들었다.
“이거? 근데 어쩌냐? 되도 않는 도발로 수작질해도 정보 공개는 안 할 건데? 그리고 뇌 없는 새끼도 이런 급 낮은 게 5성이라고 생각하지는…….”
띠링-
[낡고 허름한 블랙 코트가 피에 젖은 충의의 길에 반응합니다. 낡고 허름한 블랙 코트에 숨겨져 있던 정보가 공개됩니다. 변경된 정보는 피에 젖은 충의의 길 소유자만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응?’
대검으로 낡은 코트를 건드리던 민성은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눈을 부릅떴다.
[피에 젖은 블랙 코트]
등급: ★★★★★
설명: 과거 일만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비호의 껍질로 만든 코트. 하지만 독특한 외관 탓에 입는 이가 없어, 유성룡이 곽재우에게 선사하기 전까지 조선왕실의 보고에 잠들어 있었다.
방어력: 485
특수능력: 색상변경 가능, 유령 출몰 사용 가능.
[유령 출몰]
등급: ★★★★★
설명: 습격에 능수능란했던 홍의장군 곽재우가 애용하던 스킬이다.
효과: 이용자와 이용자가 지정한 사람들에게 투명화를 부여한다.
쿨타임: 24시간
소모 마나: 400
‘미친……?’
변경된 내용을 살핀 민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슬쩍 옷을 만지작거렸다. 쓰레기가 갑자기 보물로 탈바꿈하다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떻게든 챙겨야 돼!’
보물이 주인을 만나 이제야 제 모습을 찾았는데, 놈팡이 같은 놈들에게 넘길 수 없었다. 더욱이 대검에 반응한 물건. 어떤 비밀이 더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템을 차지하기 위해선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놈들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
‘아니, 잘 생각해봐. 일단 놈들은 이 사실을 몰라. 잘만 입 털면 분명 묵살하거나 나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올 수 있을 거야.’
변경된 정보는 오로지 그만이 확인 가능하다. 민성은 그를 빤히 바라보는 이들을 힐끔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