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화 - 인연의 고리.(2)
척-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옆에 바짝 붙어 포위망을 구축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는 모양이었다.
저벅-
그들은 침묵에 감싸인 채 타워가 있는 방면으로 향했다.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던 민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보자고 한 겁니까? 방주님을 움직일 정도의 힘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텐데. 설마 제가 예상하는 그 사람입니까?”
차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빌빌 긴다. 그럼 적어도 땡중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는 고위 관계자는 몇 없을 거다.
“아마 자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을 걸세. 보고받곤 꼭 자네를 데려오라 하던데, 어지간히도 만나보고 싶었나 보이.”
쿵-
혜정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쥐고 있던 석장을 바닥에 흘렸다. 그리곤 주위 관계자들을 둘러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어이쿠. 이래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감성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어. 가끔 손에 힘이 안 들어가면 얼마나 슬픈지 아나?”
“…….”
“허리도 예년 같지 않구먼.”
할 말을 잃은 민성은 석장과 혜정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정말 평범한 노인이 그랬다면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각사의 방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실수를 할 리 없었다.
“혹여나 자네가 원치 않는다면 길을 열어주겠네.”
혜정은 어색한 자세로 석장을 주우며 작게 속삭였다.
“…….”
“우리 손녀딸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닌가? 아, 혹 내 신변을 염려해 그런 거라면 걱정 말게.”
노승은 한쪽 눈까지 찡긋해 보였다.
‘누가 누굴 걱정한답니까?’
민성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인의 몸에 숨은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웃음만 나왔다.
“어떻게 하겠나?”
혜정은 시간을 벌겠다는 듯 굽힌 허리를 최대한 천천히 폈다. 허나 잠시간 고심하던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끄응…….”
노승은 기지개 켜듯 허리를 쭉 펴며 민성의 뒤에 딸린 일행들을 쳐다봤다.
“하긴……. 딸린 식솔들이 많을수록 운신의 폭에도 제한이 생기기 마련이지. 자네도 이제 그 무게감을 조금은 느끼고 있겠구먼. 그럼, 이동하세.”
노승은 허허롭게 웃으며 재차 걸음을 옮겼다.
‘여긴…….’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타워 뒤편에 위치한 대형막사였다. 안전지대에 설치돼 있던 막사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선두에 있던 차관은 막사의 입구 부분을 고정하고 있는 폴대를 두들기며 소리쳤다. 그리곤 그제야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요.”
민성은 몸을 돌려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일행과 부원들은 쭈뼛쭈뼛 몸을 움직였다.
“아, 잠깐만요!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강민성 씨 한 분뿐입니다. 다른 분들은 저기 병력들의 통제를 받으세요.”
차관은 급히 입구를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민성은 아랑곳 않고 신과 아루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럼, 여기 두 명만이라도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어떤 말과 상황이 오갈지 모르니 판단할 머리는 많을수록 좋았다.
“안 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들어가실 수 있는 분은 강민성 씨 한! 분! 뿐입니다.”
차관은 재차 한 명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손을 저었다. 민성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눈 한 번 꿈적하지 않았다. 그때,
“그냥 들어오라 그래.”
“예, 예! 각하!”
막사 안에서 묵직한 중저음 목소리가 울려오자, 차관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우렁차게 답했다.
“드…… 들어가십쇼.”
“의외로 윗분이 더 융통성 있으신 것 같네요.”
민성은 못마땅한 표정을 보이는 차관을 힐끔 쳐다보곤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한심.”
신과 아루도 한마디씩 툭 뱉으며 민성의 등을 쫓았다.
‘흠…….’
막사 내부로 들어오자 따스한 기운이 얼굴을 간질였다. 민성은 주변을 흘낏 살폈다. 막사 중심에 위치한 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길 덕에 내부는 생각 외로 밝았다. 난로 옆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에는 커다란 지도와 체스 말 같은 것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었다. 테이블 좌측 끝에 위치한 거대한 화이트보드에는 정체 모를 내용이 가득했다.
‘영등포구, 상황 종료?’
“어서 오게.”
화이트보드에 적힌 내용에 시선을 주던 민성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테이블 끝에 앉아 있는 남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기준으로 군복 입은 남자들이 열을 맞춰 정렬해 서 있다. 개중에는 안면 있는 얼굴도 보였다. 이종범이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민성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조무래기에게 신경 쓰기엔 눈앞의 남자가 상당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예상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20대 대통령이자 현직 대통령, 박정후. 뉴스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인물인데 모를 리 없었다. 괜스레 긴장감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민성은 슬쩍 목례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다부진 체격에 흔들림 없는 눈에는 냉철함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주름진 이마는 사뭇 고집스러움을 자아냈다.
“무례한 놈! 지금 그걸 인사라고 하는 거냐!”
민성의 태도가 거북했던지, 여기저기서 그를 질타했다. 그러나 민성은 코웃음 치며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권력을 쥔 정승이 무섭지 정승의 개새끼들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럼 절이라도 할까요? 한 나라의 수장님을 뵌 기념으로? 그래야 다들 인정하실 것 같은 표정이신데…….”
“뭐?”
민성은 정말 절할 생각으로 양손을 공손히 모았다. 다만 횟수를 조금 조절할 생각이었다. 두 번으로.
“됐네. 기다리던 손님도 왔으니 다들 앉읍시다.”
“예, 각하!”
박정후가 손짓하자, 사내들은 우렁차게 답하며 자리에 착석했다.
“자네도 앉는 게 어떤가?”
“그러죠, 뭐.”
민성이 천연덕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하자 사내들은 못마땅하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일행까지 모두 자리에 앉자 무거운 공기만이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 갑자기 불렀는데 응해줘서 고맙네.”
‘그게 부른 거냐? 강제로 소환한 거지.’
“별말씀을…….”
민성은 속내와 달리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와 얼굴 붉힐 일을 만들어 봐야 좋을 것 없다. 만약 최악의 사태로 흘러갈 경우, 향후 움직임에 상당한 영향이 갈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일행들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렵다.
“헌데 어쩐 일로 저같이 미천한 놈을 찾으신 겁니까?”
‘일단 왜 불렀는지 이유부터 알아내야 해.’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분명 원하는 것이 있어 불렀겠지만, 한 나라의 원수씩이나 되는 양반이 직접 호출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천? 누가 말인가? 설마 자네? 이거 보기보다 농담을 좋아하는 청년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박정후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하하하, 맞습니다!”
“이 부장에게 들은 것과 달리 상당히 재밌는 친구인 것 같습니다!”
좌중들은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폭소하며 남자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건 뭐……. 깡패 집단이야?’
나름 절도와 규율이 자리하는 자리일 줄 알았다. 말을 잃은 민성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내 박정후가 손을 들자 웃음소리도 잦아들었다.
“자네 같은 인재가 미천하다고 말하면 되겠나. 화려할 정도로 경력이 출중한 사람이 말이야.”
박정후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민성은 말꼬리를 흘리며 애매한 자세를 취했다. 부드러움과 냉혹함을 오가는 말투도 적응하기 어려운데, 무슨 말을 할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갔다 줘.”
남자의 명령에 옆에 있던 수행비서는 들고 있던 서류를 잽싸게 민성 앞에 내려놓았다. 서류를 잡은 민성은 찬찬히 내용을 훑었다.
스륵-
서류를 넘길 때마다, 민성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져갔다.
‘이건…….’
서류에는 여태껏 그가 해왔던 행동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일상생활, 유적 탐사, 심지어 어머니가 보냈던 이들을 맞닥뜨렸을 때도.
“어떤가? 보기보다 상세하지? 대책부장이 자네한테 쌓인 게 좀 많았던 모양이야.”
민성은 이종범을 흘낏 쳐다봤다. 입꼬리가 실룩이는 걸 봐선,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듯했다.
“절 부르신 이유가 이겁니까?”
민성은 피식 웃으며 서류더미를 한쪽으로 밀쳐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십쇼. 여기 있는 사람들과 제 얼굴이 다른 것 같습니다만.”
민성의 말대로 사진 속엔 중년인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 뺄 생각 하지 마라. 네가 다른 얼굴을 사용하고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 숨기려면 대검도 숨겼어야지.”
민성이 슬며시 오랏줄을 빠져나가려 하자, 이종범은 얄짤 없다는 듯 소리쳤다.
“어이고, 누가 보면 대검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보물인 줄 알겠네.”
“이놈이…….”
민성이 배를 잡고 미친 듯 웃어대자, 이종범의 얼굴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잠시간 웃어 젖히던 민성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곤 정색했다.
“대검 쓰는 사람이 한둘이야? 사진은 또 왜 이렇게 흐릿해? 증거 삼을 거면 좀 뚜렷한 걸로 가져왔어야지. 아니면 대책부는 멀쩡한 사람 때려잡는 취미라도 있어?”
“흥, 네놈이 오리발 내밀 거라곤 예상하고 있었어.”
이종범은 그의 곁에 다가가 손수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리곤 이내 한 페이지에서 손가락을 멈추곤, 보라는 듯 사진 몇 장을 가리켰다.
“네놈이 네 일행과 카페에 있을 때 사진이다. 여길 보면 네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얼굴이 달라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여러 장의 사진 속에는 같은 옷을 입은 사내 둘이 1분 단위로 나오는 모습이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찍었대?’
민성은 그의 얼굴이 뚜렷하게 나와 있는 사진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놈의 집착심만큼은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이 날 카페에 있긴 했었지. 근데 이게 뭐? 똑같은 옷 입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설마 이딴 걸 증거랍시고 내놓은 건 아니지? 이거 완전 칼에 지문 묻어있다고 진범으로 몰 새끼 아냐?”
민성의 비웃음에도 이종범은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그건 네놈이 중년인과 동일인이라는 걸 증명하는 사진일 뿐, 네놈의 만행을 증명할 증거물은 따로 있다.”
이종범은 다시 서류를 넘기더니 곧 민성의 앞에 디밀었다.
‘이건 뭐...?’
민성은 눈가를 찌푸리고 사진들을 자세히 살폈다. 사진 속에는 처참한 광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지가 찢겨나간 시신부터 내장이 터진 채 축 늘어진 시신까지. 연령대도 다양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저건 인간 아니냐?”
함께 사진을 구경하던 티노는 민성과 사진을 번갈아 보며 신기하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