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163화 - 인연의 고리.(1)
44. 인연의 고리.
“이제 이동. 다 준비!”
신이 목청을 높이자, 그의 뒤로 부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만들었다.
“빠르네.”
민성은 생각보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낮게 감탄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전력 외로 판단하고 구출하지 않았건만, 군기 잡힌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재평가가 필요할 듯했다.
“국가대표 다수 배출한 부. 나름의 기강 존재. 이 정도는 당연.”
“근데 생물한테도 활 쏴본 적 있어? 없을 것 같은데…….”
법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살인이라니. 있을 리 만무했다. 민성은 스스로 말하고도 우스웠는지 괜스레 헛기침만 내뱉었다.
“아직 살인 경험 전무. 허나 차츰 살인에 익숙해질 것, 그에 따라 쓸 만한 활잡이로 사용가능. 전력 상승 예상.”
“그래. 네가 추천했으니까 실력은 확실하겠지. 이제 다들 준비한 것 같은데, 움직이자.”
민성이 움직이려는 찰나, 이신은 그의 옷깃을 잡아챘다.
“잠깐. 문제 하나 존재. 나갈 방법 전무.”
이신은 손가락을 펴 군인들로 이뤄진 벽을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일반인들 머리 쓰듯 저들도 머리 사용. 공격 불가한 인간 벽, 넘지 못하면 탈출은 불가능.”
“확실히 그렇긴 한데…….”
민성은 멋쩍게 웃으며 얼룩덜룩한 벽을 쳐다봤다. 군인들 역시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끼리 낄낄대며 수군대는 걸 보니, 저놈들이 모여 무슨 수작을 꾸미나 지켜보는 듯했다.
‘어차피 통과 못 한다 이건가?’
저들의 자신감도 이해는 갔다. 무적에 가까운 상태이니 두려워할 리 없었다. 민성은 피식 웃으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벅-
묵묵히 걸음을 옮긴 민성은 한 군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타 군인들과 달리 유독 다리를 크게 벌려 버티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꾸고 있는 듯.
“김도문 일병? 아까는 비켜줘서 고마웠어. 근데 한 번만 더 길 좀 열어주면 안 될까?”
명찰이 달린 왼쪽 가슴을 흘낏 쳐다본 민성은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길을 열어줬던 군인이니 가장 가능성이 있다 판단했다.
“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일병은 식은땀을 흘리며 민성의 눈을 피했다.
“지나가게 좀 비켜달라고.”
민성이 화사하게 웃자, 등에 달려 있던 대검도 덩달아 흔들거렸다.
“그, 그것이…….”
그 모습을 본 일병은 애처로울 정도로 울상이 되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보고하러 간 맞선임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죄송합니다! 상부의 명령이 없으면 비켜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거, 건들지 마십쇼!”
민성이 손을 쳐들자, 일병은 꽥 소리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이 새낀?’
당황한 민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적당히 융통성 있게 생활하자며 어깨나 좀 두드려주려 했건만, 이렇게 과도한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알았어, 알았어. 안 건드릴게.”
민성은 두 손을 들어 보인 뒤, 말을 이어갔다.
“근데 진짜 비켜줄 생각은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일병은 눈을 꽉 감고 다시 소리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민성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 된다는데?”
이신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필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냥 넘어가버려라, 인간!”
답답했는지 티노는 몸소 군인들의 머리를 넘나들며 시범까지 보여줬다. 그 모습에 민성은 실소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혼자였으면 진작 그렇게 했죠.”
“그럼, 혼자 넘어가라!”
“그러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전부 없어지는데요?”
민성은 녀석의 말에 적당히 반박하며 재차 일병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다. 그때,
“저기! 저깁니다!”
벽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정부 사람들인가?’
여러 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소리가 함께 들려오자, 민성은 철모와 철모 사이의 빈 공간을 통해 원인을 확인하고자 했다.
“거기, 청년. 길 좀 터주시게.”
민숭민숭한 머리를 가진 노승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기 전까지 말이다.
‘저 양반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의외의 인물이 모습을 보이자 민성은 눈매를 좁히고 상황을 주시했다.
“헉!”
일병은 당혹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본능적으로 개머리판을 들어올렸다. 허나 노승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일병 곁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허허, 젊은 도우가 얼굴이 하얘진 것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군 그래. 아니면 내 얼굴에 영이라도 씌었나?”
노승이 농담조로 말을 던지자 군 간부들과 정부 관계자들은 어색한 미소만 흘렸다.
“아니면 고된 근무 탓에 심신이 많이 허약해졌나 본데, 육군에겐 휴식시간이 없는 것이오?”
“예?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상냥하면서도 날 서 있는 노승의 물음에 당황한 관계자들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높으신 분들 믹스커피 드시는 시간은 있고, 병사 휴식시간은 없는가 보구려.”
노승의 눈에 걸린 비웃음을 감지한 관계자들은 어정쩡하게 개머리판을 잡고 있는 일병을 노려봤다.
‘야, 이 새끼야! 빨리 내려! 빨리 내리라고!’
노승의 뒤에 자리한 고위 간부들은 눈을 부라린 채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본 일병은 화급히 총을 내리며 눈치를 살폈다. 허나 노승은 일병이 그러거나 말거나 관계자들에게 비아냥거렸다.
“이거, 이러다 우리 자각사가 모든 일을 도맡아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오해이십니다! 저희는 병사들이 최상의 상태로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노승이 작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관계자는 변명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망할 땡중이 앓는 소리를 뱉을 때면 항상 긴장이 됐다. 언제나 앓는 소리 뒤에는 추가보상을 바라는 은근한 저울질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 보상을 좀 더 높여줘야 하지 않겠소?”
‘역시…….’
예상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자, 관계자는 답답함에 가슴이 턱 막힘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상관에게 보고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땡중이 직접 상관을 찾아갈 테고, 그 여파는 모두 갈굼으로 치환돼 그에게 돌아온다. 공덕 높은 고승이라더니, 고승의 탈을 쓴 날강도였다.
“알겠습니다……. 장관님께 건의해보겠습니다.”
“저는 언제나처럼 정 차관님만 믿겠습니다. 관세음보살…….”
차관이 빠르게 백기를 들자 노승 혜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곤 합장했다. 차관은 마지못해 마주 합장하며 이 일의 발단이 된 병사를 죽일 듯 노려봤다. 놈 덕에 되도 않는 똥을 뒤집어썼다.
“저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예? 소승이 귀가 좀 어두운지라…….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얼른 확인해보시지요. 보고대롭니까?”
당황한 차관은 연신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흠……. 맞는 것 같습니다.”
노승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민성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민성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 숙여 보였다. 당최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관절 왜 이 양반이 이곳에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다 같이 상점 이용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민성은 혜정 뒤에 서 있는 검은 병풍들을 슬쩍 바라봤다. 오가던 이야기를 봐선 관료들이 분명한데, 왜 저들이 혜정과 함께 움직이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든 게 불확실하다.
“그간 못 본 탓인지 몰라도, 신수가 훤해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민성이 조용히 웃자, 혜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난스레 그를 흘겨봤다.
“이런……. 노승의 가벼운 농이라 여긴 모양인데, 정말이네. 자네의 얼굴에 드리워 있던 어둠이 가신 걸 보고 하는 말일세. 혹, 가슴 속 깊이 뿌리박고 있던 응어리를 뽑아냈는가?”
노승은 슬쩍 손을 들어 그의 왼쪽 눈을 가리켜 보였다. 그 뜻을 이해한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천천히 뽑아낼 계획이었습니다만, 지금 같은 상황에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민성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그의 새어머니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허영심 많은 여인이었다. 힘이 우선시되는 지금 살아남았을 리 없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저런……. 자네를 위해 꽤 많은 정보를 수확했건만, 전부 무용지물이 됐군.”
혜정 역시 동의하듯 혀만 끌끌 찼다. 설마 지금같이 혼잡한 현실에서 장기 갈취범들이 활동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굳이 제 손에 더러운 피 묻힐 일이 없어졌으니까요.”
“맞네. 까마귀들 잡자고 자네가 까마귀가 될 필요는 없으이.”
민성의 담담한 말투에 혜정은 내심 감탄했다. 증오라는 감정은 한 번 가슴에 뿌리 내리면 쉽사리 뽑아내기 어렵다. 헌데 약관에 불과해 보이는 젊은이가 저리 초탈한 모습을 보이니 재차 인재 욕심이 솟구쳤다.
톡-
“음?”
어깨를 건드리는 감촉에 혜정은 고개를 돌렸다. 울상이 된 정 차관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 대사님…….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대화는 나중으로…….”
“이런. 간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나 사설이 너무 길어졌네. 미안허이.”
혜정은 멋쩍게 웃으며 다시 민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저리 참을성이 없어서야, 어찌 대성할 수 있을꼬……. 그렇지 않나?”
혜정이 낮게 투덜거리자, 민성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슬슬 이동해야 할 것 같네. 가세나.”
“…….”
민성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 혜정의 뒤에 서 있는 이들을 쳐다봤다. 긴장한 눈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혜정이 단순히 안부나 나누자고 오지는 않았을 터.
‘자각사와 정부. 둘이 모종의 관계를 맺은 건 확실해 보이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정부 인사를 제 집 종 부리듯 휘두르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윗선에 보고가 들어갔고, 땡중이 대표 격으로 온 건 단순히 안면 있는 사이여서인가?’
내막을 모르니 마땅한 가정도 도출하기 어려웠다.
“따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뭐, 잘 알 거라 생각하네만? 지금이야 괜찮겠지만 안전지대를 벗어나면…….”
노승은 석장을 들어 끝자락으로 군인들을 가리켰다. 그 뜻을 이해한 민성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안전지대를 벗어나면 바로 총격을 가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경고이리라.
‘나야 상관없지만…….’
일행과 기껏 데려온 전력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기 좋은 환경이다.
“거기에 원치는 않지만 나 역시 자네 뒤를 쫓아야겠지.”
“이미 정부와 모종의 관계를 맺으신 것 같은데, 당연히 그러셔야겠죠.”
혜정은 낮게 중얼거리자, 민성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어딘가 차가워져 있었다.
“가죠.”
“따라오시게나.”
민성이 걸음을 옮기자 혜정도 석장을 지팡이 삼아 걸으며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대신 저들도 함께 데려가겠습니다.”
“누구 말인가?”
노승이 고개를 좌우로 꺾자, 민성은 일행과 양궁부원들을 가리켰다.
“흠……. 좀 많긴 하지만 괜찮을 걸세. 그렇지 않나, 정 차관?”
“……예. 그러니까 얼른 좀 가시죠.”
“것 참, 성격 급한 도우 같으니. 자, 가세.”
정 차관의 날 선 말투에 노승은 껄껄거리며 걸음을 돌렸다. 민성은 일행들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