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화 여유가 생기면 불만이 따라온다.(2)
“저놈들은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걸까?”
“듣기론 강을 타고 돌아서 왔다던데, 하여튼 대단한…….”
툭- 툭-
“거기, 길 좀 열어봐.”
“응?”
군인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검은 대검을 등에 인 낯선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침입자다!”
“또야? 외곽 근무자 새끼들은 대체 뭐 하는 거야?”
군인들은 삽시간에 어깨에 개머리판을 견착하고 총부리를 겨눴다. 하지만 표정에는 짜증이 그득 서려 있었다. 요즘 들어 안전지대로 들어오는 침입자 수가 점차 늘어났다.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인원도 증가한다. 한 번에 투입되는 근무자가 많을수록 경계 주기는 더 짧아지고, 그 부담은 병사들에게 돌아온다.
“손들어!”
“어차피 못 쏘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좀 비켜주지?”
민성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보더니 피식 웃었다.
“하……. 요즘 또라이 새끼들 왜 이리 많이 오냐.”
“어쩔 수 없지. 들어오기만 하면 안전은 무조건 보장되니까. 그래도 저 새끼처럼 배 째라는 놈들은 꼴 보기 싫네. 우리 같은 병사만 좃뺑이 쳐야 하니……. 시발.”
“그냥 들어오라 그래. 알아서 들어와 주겠다는데 왜 가만히 있어? 혹시나 저놈이 돌아다니다가 고위 간부나 정치인 막사 들어가면, 다 좃 돼는 거야.”
“그래.”
저들끼리 중얼거리던 군인들 중 하나가 민성에게 손짓했다.
“민간인분! 이쪽으로 오십쇼!”
그는 귀찮다는 듯 툭 내뱉으며 손가락을 들어 그의 등 뒤를 가리켰다.
‘의외로 고분고분하네.’
쉽사리 들여보내주지 않을 거란 예상을 접은 민성은 눈을 빛내며 순순히 명령에 응했다.
척-
민성이 군인들로 이뤄진 벽 앞에 서자, 그의 앞에 있던 군인 둘이 몸을 살짝 틀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이거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민성은 싱긋 웃어주며 입구를 통과했다. 별다른 불화 없이 통과시켜주니, 웃음 정도는 얼마든 서비스로 지어줄 수 있었다.
“…….”
민성이 지나가자, 입구 역할을 하던 군인은 다시 옆 전우와 간격을 좁혀 틈새를 막았다. 그 중 한 명은 무언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옆 병사의 철모를 툭툭 건드렸다.
“왜 그러심까, 김우빈 상병님?”
“방금 그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냐?”
“예?”
작대기 두 개 달린 병사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의 맞선임을 쳐다봤다. 생판 초면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선임이 그렇다 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슴까?”
후임이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자, 상병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녀석은 단순한 장난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유 모를 불안감은 그의 심장을 계속 두들겼다.
“농담 아니야, 인마! 진짜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에이, 연애가요 못 본 지 오래되셔서 그러신 거 아님까? 저도 요즘 블루 벨벳이 그렇게 보고 싶슴다! 언제쯤 다시 TV연등 할 수 있을지……. 씁쓸함다.”
“아! 좃 됐다…….”
상병은 후임의 한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민성의 등을 쳐다봤다.
“왜……. 왜 그러심까?”
기억났다. 놈이다. 경계근무 나갔을 때 봤던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달랑 대검 한 자루로 돌덩이들을 도륙하던 정신 나간 놈. 그날 이후, 상부에서는 요주인물이라고 프린트된 종이 몇 장을 나눠줬었다. 발견 시 즉각적으로 보고하라는 말과 함께. 종이에는 저 미친놈도 끼어 있었다.
“왜 이제 기억했을까…….”
상병은 작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늦었다 생각했을 때는 정말 늦은 거라지만, 보고하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진짜 무슨 일 있으심까?”
“야! 잠깐 보고하고 오게 내 자리까지 잘 틀어막고 있어!”
“어……. 어디 가시는 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일병은 황급히 달려가는 선임의 등만 멍하니 쳐다봤다.
한편, 별다른 제지 없이 무리 안으로 들어온 민성은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의외로 사람들이 많아 일행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지저분한 차림 탓에 수색은 더욱 난항에 빠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티노가 있었다. 녀석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사람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어댔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았다, 인간! 여기 재미없는 인간이 있다!”
녀석은 군중의 중심부 위에서 크게 소리쳤다.
‘좋았어.’
그 모습을 본 민성은 반색하며 앉아 있는 난민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파고 들어갔다. 녀석이 없었다면 더 오래 걸렸으리라. 가끔 뜬금없이 거는 도발만 아니라면 정말 완벽한 파트너였을 것이다. 곧 녀석이 있는 위치에 도달한 민성은 익숙한 얼굴을 대면할 수 있었다. 감정이 없는 얼굴과 내려앉은 차가운 눈빛은 주변 사람들을 조용히 응시한다.
“신!”
반가운 마음에 민성은 그의 어깨를 콱 잡으며 작게 외쳤다. 동시에 역한 냄새가 풍겨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짙은 악취는 그가 겪었을 고초를 잘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왔나? 적절한 타이밍.”
신은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아주 미세한 미소를 보였다. 그의 옆에선 아루가 힘없이 손을 흔들며 그를 반겼다.
“언제 도착했어?”
“대략 3일 전.”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미안,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민성의 사과에 신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일찍 도착. 시간은 금. 잘했다.”
“다친 곳은 없어? 엄청 고생했을 것 같은데…….”
민성은 신의 옷 곳곳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며 혀를 찼다.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 주민들과 숱한 전투를 벌였을 게 뻔했다.
“오는 도중 괴물 습격. 몇 명 사망. 그 외에는 괜찮.”
“이런…….”
민성이 말을 아끼자, 신은 팔을 들어 어정쩡한 자세로 그의 어깨를 툭 쳐주곤 말을 이었다.
“양궁부, 인사.”
민성은 신이 가리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등짝에 활과 화살통을 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냐. 회포는 이동하고 나서 풀자.”
민성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과 아루를 구출할 당시, 저들이 내민 도움을 바라는 손을 매몰차게 쳐버렸으니 모르긴 해도 그에게 쌓인 게 많을 것이다.
“걱정 마라. 단단히 언질을 주었다. 집에서 난동 피우던 놈들과 다르다. 만약 네게 뭐라 하면 내가 버릴 거다.”
이신은 걱정 말라는 듯 단호히 말하며 서둘러 그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하암…….”
“뭐예요? 피곤해 죽겠는데…….”
그러자 하나둘 기지개를 켜거나 늘어지게 하품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다 일어나라. 왔다.”
이신의 독촉에 그들은 반쯤 뜬 눈으로 신과 민성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곤 양궁부원들 전원 찌그러진 통조림처럼 얼굴을 구겼다. 미리 언질을 받았음에도 반갑지 않은 얼굴을 다시 마주하니, 머릿속에선 그 당시 상황이 절로 떠올랐다.
“우리도, 우리도 데려가요!”
“내가? 왜?”
“그야 당연히 사람이라면…….”
쾅-
애원에도 매몰차게 닫힌 문. 그것이 그들과 민성의 마지막 접점이었다.
“젠장…….”
일부 부원은 신의 경고도 잊어버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전원, 약속 잊지 말 것. 만약 어길 경우 가만 안 둠.”
“알아요, 알아.”
이신은 투덜거리는 부원을 향해 재차 경고를 날렸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부원들은 입만 부풀릴 뿐이었다. 그때,
“근데 솔직히 말해서 굳이 따라갈 필요 있어?”
누군가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걸음을 묶었다.
“누구?”
민성의 가라앉은 얼굴을 본 신은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그렇게 강조하고 강조했건만 결국 일을 벌이고 말았다.
“생각들 해봐! 안전지대에 남아 있는 게 생존하기 더 수월한데, 우리가 왜 굳이 나가야 하는데?”
목소리의 주인을 파악한 신은 곧장 그의 앞으로 뛰어갔다. 4학년의 김하성. 한때는 촉망받던 유망주였으나 지금은 그저 그런 선수에 불과했다.
“무슨 생각.”
와중에도 신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허나 하성은 신을 힐끗 쳐다보곤 계속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다들 알잖아! 바깥 생활 거지같은 거. 밥은커녕 마음 놓고 잠 잘 곳도 구하기 어려웠던 거, 다 알잖아!”
그의 열변에 부원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들도 무서웠지만 정작 그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있으면 밥도 나오고, 무엇보다 안전해! 불침번 설 일도 없고 편하게 생활할 수 있어. 근데 우리가 왜 굳이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하지? 기껏 지옥에서 빠져나왔는데 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야 하냐고! 난 못 가! 아니, 안 가!”
김하성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민성들을 노려봤다.
“선배 말이 맞아요. 좋은 곳 놔두고 왜 돌아가야 해요?”
“저……. 저도 솔직히 내키지 않았어요. 우리가 그렇게 도와달라고 해도 버리고 간 사람을 믿고 움직인다는 게, 영 꺼림칙했어요.”
그러자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부원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식사 제공 보장 못 함. 남의 손에 생사여탈권을 주는 일. 어리석다!”
삽시간에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바닥에 앉자, 신은 반박하며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했다.
“생사여탈은 무슨! 나가면 당장 죽을 확률이 높은데 생사여탈권? 시발, 그깟 거! 얼마든 가져가라 그래!”
“당장의 현실 안주는 독. 나무 말고 숲…….”
“그만해.”
보다 못한 민성은 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저들. 전력에 보탬이 된다. 두고 가면 손해.”
“아니, 오히려 이득이야. 저런 놈들은 데리고 가 봐야 기존에 있던 사람들과 마찰만 일으킬게 뻔해. 이참에 알아서 빠져준다니 고맙네.”
민성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앉아 있는 부원들을 내려다봤다. 스스로 배부른 돼지들이 되겠다는데 말릴 생각 없었다.
‘나중에 식량 배급이 끊겨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
당장이야 여유가 있으니 배급해주는지 몰라도, 현 상황이 장기화되면 결국 식량은 바닥을 보일 게 뻔했다. 그러면 안전지대는 안전한 지옥으로 변할 것이고, 저들은 분명 지금의 선택을 땅 치고 후회하리라.
“너희는 어쩔 거야? 남을 거면 앉고, 우리랑 갈 거면 이쪽으로 와.”
민성은 아직 눈치를 살피는 이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 중 절반만이 그들에게 합류했다.
“8명? 이 정도면 적당하겠는데? 많아 봐야 우리만 힘들어져. 소수정예로 가면 되겠다.”
민성은 축 처진 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괜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답답. 안주하는 순간 인간은 멈춤. 저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이신은 못내 아쉬웠는지 계속 앉아 있는 무리들을 쳐다봤다.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야. 이제 남이고. 신경 쓰지 마.”
“맞아. 신과 아루는 할 만큼 했어!”
“……맞다. 나중에 분명 저들 후회할 것.”
민성과 아루의 위로에 신은 고개를 쳐들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온 부원들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