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화 여유가 생기면 불만이 따라온다.(1)
43. 여유가 생기면 불만이 따라온다.
“쿠에에에엑!”
잠시 후, 민성은 손을 탁탁 털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잠시 내려놨던 대검을 쥐었다. 옆에는 어지럼에 방향감각을 잃은 티노가 해롱거리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나?’
송민지는 천천히 다가오는 민성의 신발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혼자 허공에 지껄이는 것도 모자라 누군가의 멱살을 잡는 듯한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억지로 쥐어짜던 눈물은 이미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묵은 체증을 해소시킨 민성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 그게요…….”
하려던 말도 잊은 그녀는 어버버 하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탁- 탁-
도로 한쪽에서 굽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미간을 좁히고 소리에 집중했다.
‘군인인가?’
익숙한 소리. 군인들이 이동할 때 나는 군화 굽 소리가 분명했다.
“야, 빨리 말해. 용건 있으니까 그렇게 욕까지 해댄 거 아냐.”
민성은 퉁명스럽게 물으며 도로 쪽을 살폈다.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자리를 떠야 했다.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갈 길 가세요.”
송민지는 됐다는 듯 손을 흔들며 겸연쩍은 미소를 보였다. 원래는 어떻게든 놈의 환심을 사, 비호를 받아보려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미친놈에게 도움을 구걸하느니 군인들의 보호를 받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그래? 그럼 잘 살아. 다음부터 입 간수도 잘 하고. 흔히 남자한테 3가지를 조심하라 하는데, 그거 은근히 여자한테도 통용되는 말이거든.”
민성은 조소하며 경고 아닌 경고를 던졌다. 그리곤 타워방면으로 내달렸다.
“3가지 좋아하시네. 싸가지 없는 새끼. 가다가 콱 총 맞고 죽어버려라.”
송민지는 쏜살같이 사라져가는 민성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기!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뒤, 도시순찰을 돌던 군인중 하나가 송민지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여기!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
그녀는 잽싸게 울상이 된 표정을 짓곤 군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생존자다! 총 내려!”
선두에 있던 군인은 그녀의 행색을 살피곤 정지 수신호를 내렸다. 그러자 경계자세를 취하던 군인들은 총구가 바닥을 보게 소총을 조정했다.
“괜찮으십니까?”
“다리……. 아니, 발목을 삐었어요.”
송민지는 발목을 문지르며 군인의 얼굴을 간절하게 바라봤다. 부디 그녀의 얼굴을 알아봐주길 바라며.
“그럼 저희 병력이 부축……. 어?”
잠시간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군인은 낮은 탄성을 질렀다.
“혹시…… 송민지 씨? 아닙니까?”
‘그렇지!’
송민지는 기립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때를 타도 빛나는 외모를 가릴 순 없는 법. 개새끼는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더니, 역시 아까 그 미친놈은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했던 게 틀림없었다.
“어머, 또 어떻게 알아보시고…….”
송민지는 와중에도 교태로운 자세로 손사래 쳤다. 그녀가 수긍하자, 그녀를 바라보는 군인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거기 둘! 정중히 모셔!”
“예!”
명령이 떨어지자 장정 둘이 달라붙어 그녀를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어머, 어머.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과 달리 송민지는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진작 이럴걸. 망할 자식들, 다 두고 보자.’
그녀는 납치하려던 놈들과 민성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지금이야 혼란한 세상이지만, 곧 제 모습을 찾을 거라 의심치 않았다. 군인들이 질서를 통제하는 모습만 봐도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면 그녀 역시 본래의 위치를 찾을 것이고, 그때는 어떻게든 놈들을 찾아내 받았던 치욕을 전부 돌려줄 것이다.
“가시죠.”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몸을 비틀거리며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이동했다.
*
안전지대 인근. 민성은 주변을 살피며 눈을 빛냈다. 입구는 여전히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하에 놓여 있었지만, 외곽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고생 좀 했겠는데?’
민성은 평평하게 다져져 있는 땅과 군인들을 번갈아 보며 피식 웃었다. 골렘의 무게에 깊이 파였던 땅을 복구하는 데는 분명 저들의 손길이 닿았으리라.
“저 하얀 것들은 인간들의 새로운 주거진가, 인간?”
티노는 팔을 들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24인용 텐트들을 가리켰다.
“그런 것 같은데요.”
민성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텐트를 바라봤다. 텐트 주변은 식판을 들고 서성이는 꾀죄죄한 차림의 난민들로 그득했다.
‘왜 저러는 거지?’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딸랑-
“달려!”
“비켜! 비키라고!”
텐트 중심부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울리자, 피난민들은 식판을 덜렁거리며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민성은 그들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난민들의 발이 멈춘 곳은 중심부에 자리한 배식소였다. 곧 사태를 이해한 민성은 혀를 끌끌 찼다.
‘개도 아니고…….’
종소리에 희번덕 눈을 빛내며 달려드는 난민들의 모습에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떠올랐다. 처음이야 저들도 종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몰랐겠지만, 지금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소리만 들려도 반응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리라.
“내가 먼저 왔어! 꺼져!”
난민들은 배식소에 조금이라도 먼저 다가가고자 거친 몸싸움을 벌였다.
“음식은 많습니다! 차분하게 기다리시면 전부 식사하실 수 있으니 질서정연하게 움직여주시기 바랍니다!”
국자를 쥔 취사병이 크게 외쳤으나, 본능에 눈이 먼 사람들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새치기하지 마! 시팔 새끼야!”
“뭐, 인마? 내가 언제 새치기했다고 지랄이야, 지랄은!”
탕-
총소리가 배식소를 울리자, 현장은 일순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똑바로 줄 서! 줄 안 서는 놈에게 식사 배급은 일절 없다! 알아먹었어?”
임시 배식소를 관리하던 소령은 권총을 허리춤에 넣으며 호통 쳤다. 그의 위협은 즉각 효과를 냈다. 난민들은 다툼을 멈추고 일사불란하게 줄을 섰다.
“진작 그럴 것이지. 배식 시작해!”
“예!”
취사병들은 바쁘게 손을 놀리며 기다란 줄을 소화해내기 시작했다.
“설마 식량 때문에 다툰 건가, 인간?”
“그렇죠. 다들 조금이라도 먼저, 많이 받고 싶어 하니까요.”
“그럼 버섯을 먹으라고 해라, 인간.”
민성은 조용히 미소만 머금었다.
‘어딜 가나 식량이 문제구나.’
저들의 행동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서 식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배고픔 앞에 버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잠시간 그들의 모습을 살피던 민성은 몸을 돌렸다. 주린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고생했을 아루와 신이 떠올랐다. 민성은 빠른 속도로 경계선으로 이동했다.
“후…….”
민성은 고개를 돌려 경계선 부근을 힐끗 쳐다봤다. 어깨에 소총을 걸친 군인들이 바깥 상황을 주시하며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숫자가 좀 줄어든 것 같은데.’
경계선을 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지만 저번만큼은 아니었다. 그 덕에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도 수월하게 넘을 수 있었지만, 약간의 의문이 남았다.
‘이제 안전지대는 완전히 정부 손에 넘어간 건가?’
식량 배급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한결 여유가 생긴 경계선의 상황도 그의 가정에 설득력을 더했다.
“인간! 저기 인간들이 엄청 모여 있다.”
티노의 말에 민성은 안전지대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의 말대로 군용 천막들 사이로 뭉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대개 군복을 입고 있는 걸 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잘됐네요. 덕분에 이목 안 끌고 찾을 수 있겠어요.”
시선이 한쪽에 쏠린 틈을 타서 일행들을 찾아내 빠져나가면 될 듯했다. 민성이 이동하려는 찰나, 티노가 꼬리로 그의 얼굴을 탁탁 두드렸다.
“멍청한 인간! 왜 헛고생을 하려고 드나?”
“아, 왜요!”
민성은 손을 들어 공격을 막아내며 눈가를 찌푸렸다.
“생각해봐라, 인간. 재미없는 인간과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 아닌가?”
“그렇죠. 그래서 이제 찾으려 하는데 왜……?”
“봐라, 역시 멍청하다.”
티노의 눈가에서 빛나는 안광이 초승달처럼 변했다. 민성은 그 눈매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이 나를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하거나 비웃을 때 보이는 버릇이다.
“제 계획이 틀렸다는 거예요?”
민성은 슬쩍 팔을 들어 올리며 반문했다. 만약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면, 곧장 낚아채 콜라 캔 흔들 듯 흔들어줄 생각이었다.
“재미없는 인간은 인간처럼 빠르지 않다. 게다가 친구들을 데려온다 했다. 저 얼룩덜룩한 인간들에게 걸리지 않았을 리 없다, 인간.”
“음…….”
민성은 슬며시 팔을 내렸다. 듣고 보니 상당히 합리적이다. 아니, 생각할수록 녀석의 말대로 됐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안전지대예요. 전투가 불가능한 곳이라고요. 그러니까 신도 최종 목적지로 이곳을 지목했을 테고요.”
“인간 말이 맞다. 하지만 인간들은 영악한 존재다. 그 점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인간 감옥이라든가.”
‘확실히…….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군인들로 벽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들을 넣을 수 있다면…….’
녀석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던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가능성 없진 않겠네요.”
“크흠! 거봐라, 인간!”
민성이 동의하자, 티노는 가슴을 쭉 펴고 우쭐거렸다.
“그럼, 이동하죠.”
민성은 잠시 주변을 살피곤 군인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근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셨대요?”
“인간. 잊었나? 난 원래 두뇌파다.”
“…….”
딴죽 걸어 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았다. 민성은 입을 꾹 다물고 질주했다.
“젠장. 이 새끼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시부럴……. 벌 받는 것도 아니고.”
둥근 원을 이루고 있는 군인들 중 하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가 킥킥대며 그의 말에 호응했다.
“야, 그래도 외곽 쪽 근무 서는 것보다야 낫지 않냐? 난 오히려 이게 꿀인 것 같은데. 외곽근무는 진짜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야. 난민들 시선도 무섭고, 혹시나 저번처럼 넘어올까 봐 겁나더라.”
“그건 그렇지. 총질한 놈들, 지금 심리치료 받고 있다고 했나?”
동료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골렘의 습격 때, 경계선 근무를 서던 녀석들 중 상당수가 정신이상을 호소했다. 사람들을 쐈다는 죄책감과 살인의 무게감에 짓눌렸으리라. 소대장의 말로는 어디론가 후송되었다는데, 이 상황에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게 정상이지. 다들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텐데……. 진짜 제정신 유지하는 놈들은 뭐 하는 새끼들인가 싶다. 이렇게 총만 겨눠도 팔이 후들거리는데.”
그는 원 안에 자리한 사람들을 쏘아보며 총구를 겨냥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감정한 눈길로 총을 응시했다. 어차피 양측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에선 어떠한 공격행위도 불가하다는 것을.
“후……. 교대까지 30분 남았네.”
남자는 어깨에 견착했던 소총을 내리며 조용히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