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159화 - 각자의 욕망. (3)
“과묵이라……. 과묵하긴 하죠.”
말수가 적긴 해도 믿음이 가는 동료였다. 민성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난 재미없는 인간이 싫다.”
티노는 그의 어깨에 걸터앉아 계속 조잘거렸다.
“저도 별로 재밌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인간. 나중에 거울이란 기물을 봐라. 그 안의 인간을 보면 왜 재밌는지 알 수 있다. 케케케케케케.”
“……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민성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녀석을 내려다봤다.
‘이거 지금 분명…… 비꼰 거 같은데? 이 자식 설마…… 사실 똑똑한데 멍청한 척한 거였나?’
너무 놀란 탓인지, 분노보다는 황당하다는 감정이 먼저 찾아왔다.
“못생긴 인간. 케케케케케케!”
녀석은 어깨를 벗어나 허공을 데굴데굴 구르며 폭소했다. 곧 상황을 인지한 민성은 스산한 미소를 흘렸다.
‘이 자식이……. 내 얼굴 정도면 무난한 거지!’
당장이라도 보복하고 싶었지만 이제 녀석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도 컸다. 더욱이 조용한 도시에서 소리라도 질렀다간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한숨을 폭 내쉰 민성은 녀석의 등뼈를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거리를 타고 그에게 전해져왔다. 민성은 눈가를 찌푸리고 주변을 힐끗 살폈다.
“주민들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없었다, 인간.”
티노 역시 웃음기를 거두고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주민들도 없는데 왜? 싸움이라도 난 건가?’
주민이 없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인간, 서로간의 대립.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각종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지들끼리 싸우는 것 같네요.”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인간?”
“인간들끼리 다투고 있는 것 같다고요.”
그의 말에 티노는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다투나? 다 같이 의기투합해서 주민들과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원래대로라면 그게 맞죠. 대부분 그렇게 행동하려 할 거고요. 하지만 인간이 욕심이 좀 많은 생물이라 식량 같은 기본적인 물품이 부족하면 홱 변하기도 해요.”
민성은 재차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까보다 더욱 크게 들려오는 걸 봐선, 이 근방에 있는 게 분명했다.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 아무리 먹을 게 부족해도 동족끼리 싸운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런 건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본 적이 없다.”
티노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은 주민들과 많이 다를 테니까요.”
“뭐가 다르다는 건가, 인간?”
“뭐……. 보유한 문명이나 지식 등이요?”
민성은 그간 봐왔던 주민들을 떠올리며 인간과의 차이점을 찾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티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들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고향을 잃었지만 그들 역시 각기 고유한 문화와 사회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
“그래요? 그럼 이유가 뭘까요?”
민성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것보다 내가 왜 변명해야 하는 거지?’
마치 한 종족을 대변하는 변호인이 된 기분이었다.
“난 그간 돌아다니며 수많은 주민들을 봐왔다. 그들의 부족이나 동족 내에도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생존에 관련된 문제는 한 마음이 되어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것들이 부족한 것 같다.”
“……아주 틀리다고는 못하죠.”
인간만큼 단합하기 쉬우면서 어려운 종족도 없을 것이다. 공통된 이득 앞에선 손쉽게 뭉치면서도 손해 앞에선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기본적인 통제가 어려우니 법과 인륜이라는 족쇄로 발목을 묶었지만, 이번 이변은 족쇄를 부숴버렸다.
‘그리고 족쇄에서 해방된 인간들은…….’
“헉, 헉……. 살려…… 살려주세요!”
민성은 살짝 고개를 돌려 후방을 살폈다. 산발이 된 긴 머리, 여기저기 찢겨나간 의복. 때 묻은 얼굴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목소리 톤을 봐선 비명소리의 주인인 듯 했다. 거지꼴을 한 여인은 애처롭게 손을 휘적이며 그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잡아! 무조건 잡아!”
꾀죄죄한 차림을 한 무리가 그녀의 뒤를 맹렬하게 추격해왔다. 손에는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조잡한 무기들을 쥐고 있었다.
“봐라, 인간. 동족을 괴롭히는 건 인간밖에 없다.”
민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관심을 돌렸다.
“휘말리기 전에 이동하죠.”
주민들에게 쫓겼다면 퀘스트를 위해 일말의 고려라도 했겠지만, 사람에게 쫓기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군인들이 해결할 것이다.
“제…… 제발 도와주세요! 도와주시면 반드시 사례할게요! 제발…….”
가냘픈 목소리가 간곡하게 등을 두들겼지만 민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민성의 손에 들린 대검을 본 여인은 더욱 애절하게 소리쳤다.
“4성 아이템을 갖고 있어요! 도와주시면……. 꺅!”
‘응? 4성 아이템?’
순간 민성은 걸음을 멈추고 빠르게 셈하기 시작했다. 완제품을 얻기 어렵다는 건 이미 수많은 상자를 개봉하며 깨달았다. 구해주는 대가로 4성 아이템을 받는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면…….’
늑대를 피하려다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드밀었다는 걸 깨닫게 해줄 것이다.
“아오, 이 시발년 덕분에 개고생 했네.”
“자…… 잘못했어요……. 제발 목숨만…….”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두 손바닥을 비볐다.
“닥쳐, 쌍년아!”
씩씩거리던 남자는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아악!”
“야, 얼굴은 건들지 마. 이제 한동안 보스랑 살 부대낄 텐데, 나중에 베개송사 감당할 수 있겠어?”
다른 남자가 조심스레 설득하며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후……. 그래도 이년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놓쳤으면 전부 좃 될 뻔한 거 아냐! 시팔년이 곱게 잡힐 것이지, 괜히 애먹이고 있어!”
“그래도 잡았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거듭되는 동료의 만류에 씩씩거리던 남자는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근데 뭐 하는 년이길래 보스가 그렇게 환장하는 거야? 여자라면 근거지에도 널려 있잖아?”
다른 남자들도 궁금했는지 무릎 꿇은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있잖아, 그 꽤 유명했던 배운지 뭔지 하는 여자라던데? 송……민지랬나?”
“뭐?”
남자들은 동물원의 동물 보듯 그녀를 관찰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젠장. 씻기면 좀 달라지겠지. 괜히 보스가 눈 뒤집혀서 이년이 있던 은신처 털었겠냐?”
명료한 답변에 남자들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자라면 환장하는 보스에게는 특식과도 같을 것이리라.
“그래도 잡아서 다행이지. 보스가 난리쳤을 거 생각하면…….”
“난리만 치면 다행이지. 여기 몇은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울걸.”
“그놈의 능력……. 나도 그런 것 하나만 있었어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남자들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얼른 가자고. 이년이 하도 소리질러대서 곧 군인들이 몰려올 거야. 일어나!”
“흑흑…….”
여인은 우악스러운 손에 이끌려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행여나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남자는 거만하게 이죽이며 눈을 부라렸다. 이제 이년을 데리고 돌아가면 보스가 두둑한 포상을 내릴 것이다. 넉넉한 식량 분배와 가지고 놀다 질린 여인들이 보상의 주체였다.
“가자!”
보상 생각에 신바람이 난 남자는 괜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진짜 4성 아이템 있어?”
그때, 낯선 목소리가 무리 속을 파고들었다. 당황한 남자들은 몸을 돌려 목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뭐, 뭐야!”
언제 끼어들었는지 송민지 앞에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민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대검은 왠지 모를 위압감을 자아냈다.
“누구냐!”
남자들은 들고 있던 쇠파이프나 곡괭이를 쳐들고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민성은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시하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짜 4성 아이템 있냐고. 조각 말고 진짜 아이템.”
“예? 예?”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송민지는 말을 더듬으며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꼼짝없이 끌려가려던 와중에 민성이 귀신처럼 튀어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민성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없나 보네. 에이, 괜히 헛걸음 했네.”
“뭐 하는 새끼야!”
“이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하던 일 계속들 하세요. 그럼…….”
민성은 경계하는 남자들에게 싱긋 웃어 보이곤 자리를 이탈하려 했다.
“잠…… 잠깐만요! 있어요! 있다고요! 기다려요!”
여인은 화급하게 도리질하며 애타게 부르짖었다. 그러자 멈칫한 민성은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조각 아니지?”
“예! 조각 아니에요! 조각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좀 도와줘요!”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은 탓일까. 여인의 표정에선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답답하게 굴고 있어.”
민성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검을 고쳐 잡았다.
“이거…… 다시 방해하게 돼서 미안합니다. 그 여자 좀 데려가겠습니다.”
“미친 새끼 아냐! 죽여 버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던 남자들은 괴성을 지르며 민성에게 달려들었다.
“어이쿠, 그런 거 함부로 휘둘렀다가 다칩니다.”
민성은 머리로 날아오는 파이프를 가볍게 피해내며 이죽거렸다.
“이 새끼가!”
연이어 야구배트와 함마가 늑골 부분으로 쇄도해왔다.
“거 다친다니까 그러네.”
민성은 싱긋 웃으며 손목을 틀어 검면이 보이게 대검을 돌렸다.
챙-
검면과 망치의 머리 부분이 부딪히자,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쉽사리 공격을 막아낸 민성은 대검에 살짝 힘을 주어 앞으로 밀어냈다.
“어어?”
그러자 남자들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뒤로 밀려났다.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잠깐 푹 주무십쇼.”
민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면이 보이게 대검을 든 뒤, 그대로 남자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으직-
“쿠엑!”
“억!”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옆에 있던 동료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가차 없다, 인간.”
‘거참, 힘 조절하기 어렵네.’
허공에서 구경하던 티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괜한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일반인인 걸 감안해 평소보다 대폭 힘을 뺐음에도 결과는 보이는 대로였다.
“이…… 이 자식! 뭐 하는 놈이야!”
경계에서 긴장, 이제는 두려움으로 변한 시선들이 그를 응시했다. 민성은 몇 번 헛기침하곤 입을 열었다.
“크흠……. 혹시 더 덤비실 분? 계십니까? 없으시죠? 있으시면 손 좀 들어주세요.”
허나 무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바라볼 뿐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 경우 저 거대한 대검이 옆구리에 꽂힐 것이다. 이미 동료 둘이 좋은 사례가 돼주지 않았는가?
“그럼 없으신 걸로 알고…….”
남자들이 자리에서 몸만 부들거리자, 민성은 비어 있는 왼손으로 송민지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곤 타워가 있는 방향으로 점멸하듯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