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화 - 각자의 욕망. (2)
“이제 영등포구는 끝인가…….”
대주는 펜을 들어 영등포구에 X자를 그었다. 이로써 방주님이 명했던 것 중 일부를 달성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부하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뭐 하긴.”
대주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키신 일 잘 마무리했다고 체크하는 거지. 그래야 혹시라도 실수 안 하지.”
“아, 이제 이쪽 구역은 청소 끝난 겁니까?”
“일단은?”
대주는 다시 지도를 품에 넣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럼 이제 군인들이 올 때까지 대기하면 되겠군요.”
대주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왔던 것처럼 임시 진지 구축할 때까지만 지켜봐주고 빠지면 돼. 나머지는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대주는 유리창이 박살나 흉물스러워 보이는 건물을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왜 하고 많은 구 중에 영등포구입니까? 인구가 제일 많기라도 하답니까?”
“아니. 안전지대에 임시정부가 있으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 아!”
대주의 말뜻을 눈치챈 부하는 혀를 내둘렀다.
“정부의 최우선 요청사항이었어. 명목이야 안전지대 인근 지역부터 차례차례 영토를 회복해 나가겠다는 건데, 뭐, 뻔하지.”
“결국 제 목숨부터 챙기려는 속셈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들도 권력을 갖기 전에는 달랐겠지.”
흥분한 부하가 씩씩거리자 대주는 피식 웃으며 바닥의 더러워진 눈을 바라봤다. 본디 깨끗했을 하얀 눈은 발자국에 짓밟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어딜 가나 있는 것들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후……. 그럼 이제 다시 자각사로 귀환하는 겁니까?”
부하의 물음에 대주는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얼마 전에 방주님이 정부와 맺은 협약.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자각사의 중대한 사항 아니었습니까? 협약을 맺은 대가로 우리는 무력을 제공하고 정부는 자각사를 국가의 수호기관으로 임명. 그리고 땅 일부를 제공하여 자각사의 공국창설을 인정하는 것. 그게 앞으로 자각사가 나아갈 길이라고 방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부하의 열변에 대주는 텅 빈 거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네. 근데 그런 질문을 해?”
대주는 부하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다.
“그냥 확인차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이제…….”
“당연히 다음 곳을 확보하러 움직이겠지. 그렇게 한 곳, 한 곳 차지해서 서울을 탈환하고 궁극적으로는 나라에 있는 모든 괴물들을 멸살. 이게 현재 방주님과 당국의 계획이야.”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 같습니다. 전력손실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피라미 같은 것들밖에 없어서. 이대로만 가면 별 탈 없이 끝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부하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괴물의 시신을 발로 툭툭 두드렸다.
“글쎄…….”
대주는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상념에 잠겼다. 부하의 말대로 여태껏 그들은 영등포구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렇다 할 강적을 만나지 않았다. 이는 방주님께서 언급하셨던 정보와는 너무도 달랐다.
‘분명 안전지대 쪽에서는 골렘이 나타났다고 했는데…….’
더불어 정부관계자들이 보여줬던 영상에 등장했던 해괴한 존재들 역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와중에 민성의 활약상을 전해 들어 이맛살을 구겼던 일은 덤이었다. 그저 운 좋게 방주님의 손녀를 살린 줄 알았는데, 제법 실력이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니면 다른 곳에 똬리를 튼 건가?’
갖가지 가설을 떠올렸으나 마땅한 답안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였으니 그런 걸지도 몰랐다.
“아참, 근데 연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슨 소리야?”
부하의 물음에 대주는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애초에 연합이라는 게 서로 으쌰으쌰해서 잘 살아보자고 뭉친 조직 아닙니까?”
“근데?”
“방주님이 이번 일을 계기로 독자적인 노선을 타시려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부하의 말이 끝나자 대주의 눈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았다. 녀석은 지금 조직의 민감한 부위를 들추려 했다. 웃음기 가득한 표정에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아챘으나, 녀석은 선을 넘었다. 말단 병사부터 대주의 위치까지 올라온 그도 방주님의 결정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하물며 일개 단원이 조직의 행사에 의문을 가진다. 당장 큰 소리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미 넘은 선, 녀석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타당한 의견이면 봐줄 생각이었다.
“그간 삼족오 연합의 총 회합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건 항상 저희뿐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이 좋아 연합이지 자각사의 전각에라도 비빌 만한 조직은 없지 않습니까. 아, 그나마 부산의 해동방 정도가 있겠네요.”
녀석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간간이 해동방의 방주가 목소리를 냈을 뿐, 방주님이 의견을 제시하면 대개 그 의견을 따라가는 추세를 보였다.
“그런데?”
대주가 담담히 질문하자, 부하는 더욱 열을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방주님은 이참에 남아 있던 잔정을 떨쳐내시고 진정한 단일 개체로 거듭나려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비운회 같은 소규모 조직은 지방까지 원활하게 관리하고자 받아주신 조직 아닙니까.”
대주는 동의하듯 고개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자각사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탄탄한 조직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녀석이 말한 대로 작디작은 존재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교통수단과 통신망이 끊겼으니, 이동과 관련된 능력자나 아이템을 확보하기 전까지 지방까지 손을 뻗기 어려울 거라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게 방주님께서 연합에서 나오려 하는 이유다?”
나름 합리적인 발언에 대주는 깍지까지 끼고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자각사의 전력이면 마교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방주님께서는 이참에 동등함을 지칭하는 연합 꼬리표를 떼고 싶어 하시는 게 분명합니다! 정부와 손잡은 것도 결국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대주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부하의 눈을 마주했다. 타당하다. 타당하다 못해 합리적이다. 사실 그 역시 의문을 갖긴 했었다. 방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고 움직이시는지. 그 생각의 끝에는 자각사의 번영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어떻게 방주님의 고견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대주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부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래…….”
대주는 구름에 가려 뿌예진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슬슬 날이 풀릴 때도 됐건만 겨울은 쉽사리 녹지 않는다.
“쓸데없는 의심은 생각을 좀먹는다. 언제나 그래왔듯 우리는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면 돼.”
“예!”
철컥- 철컥-
멀리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대주는 고개를 우로 돌렸다. 군복 위로 하얀 설상을 걸쳐 입고 소총을 덜렁거리며 다가오는 무리. 그들이 기다렸던 이들이 틀림없었다.
“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제 저들이 빈차와 폐자재를 이용해 바리케이드 설치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된다. 나머지는 전부 저들의 몫이다.
“휴식 끝이다! 전부 일어나서 준비해!”
대주는 몸을 일으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허살대는 익숙하다는 듯 각자의 자리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
덜컹-
민성은 허리 숙여 반쯤 부서진 문 사이를 조심스레 벗어났다. 문은 못이 빠져 덜렁거리는 경첩에 기대 위태로이 흔들거렸다. 조만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후…….”
요 한 달간 버섯을 찾아다니며 온전한 문을 확보하는 데도 주력했다. 수십 개의 이동루트를 확보해놨음에도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이 문도 글렀나. 아깝네…….’
문의 수명이 다했음을 짐작한 민성은 혀를 차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 굳건히 서 있는 타워가 한눈에 들어왔다. 민성은 쥐고 있던 대검 자루를 붙잡고 주변을 살폈다. 변함없이 침묵에 찬 도시.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사람들의 좋은 터전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고요한 도시 중 하나일 뿐이었다. 민성은 고개를 돌려 양옆 건물들을 살폈다. 입구 부분에는 얼어붙은 감자 몇 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필시 생존자들이 흘린 게 분명했다.
‘잘 좀 챙기지.’
민성은 보이지 않는 생존자들을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감자를 들었다. 작금의 상황에선 이런 것 하나 아쉬울 게 뻔했다. 지금은 동면을 취하는 곰처럼 건물 어딘가에 박혀 삶을 도모하고 있을 것이다.
꺄아악-
저 멀리서 들려오는 공허한 소리는 누군가의 비명소릴까, 아니면 까마귀의 울음소리일까.
“인간!”
“오셨어요.”
민성은 입꼬리를 올려 정찰을 끝내고 돌아온 티노를 반가이 맞이했다. 이신과 약속했던 시간, 한 달. 녀석은 그 기간이 다 지나기 전에 돌아왔다. 아두르의 권속인지 뭔지 하는 것들을 쫓아갔던 녀석은 안타깝게도 별다른 수확은 거두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녀석이 돌아온 덕에 버섯 찾는 일은 한층 더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벌이가 시원찮긴 했지만…….’
문제는 도시를 배회하는 주민들이었다.
“인간! 싸우면 인간이 무조건 죽는다.”
티노의 만류에 정작 버섯을 발견해도 다가가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로 인해 대검의 퀘스트도 제자리걸음을 보였다. 정확히는 퀘스트에 부합하지 않은 환경이 원인이었다. 위기에 빠진 사람이 있어야 구해줄 것 아닌가? 다들 틀어박혀 있는데 일일이 찾아다니며 구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땠어요?”
“주민 몇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상대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역시…….”
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례 들어 변한 상황도 한 몫 했다. 어쩐 일인지, 인간 대신 도시의 주인 노릇하던 주민들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티노는 놈들의 이동설을 제기했다. 애초에 고향을 갈망하던 이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대책을 모색했을 것이고, 도시에는 터전을 꾸리기 적합하지 않으니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를 찾아 떠난 것이라 했다.
‘그것도 가능성 없는 건 아니지만…….’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전방을 응시했다. 주인 없는 차가 늘어진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저렇게 주민들이 이탈한 자리는 군인들이 대신했다.
“이곳은 저희 육군이 점거했습니다. 생존자 분들께서는 걱정 마시고 밖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확성기를 쓰는지 커다란 기계음이 울렸다.
“멍청한 인간이다.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면 주민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티노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노려보며 답답하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니까요.”
간만의 올바른 소리에 민성은 조용히 맞장구쳤다.
“이제 이동해요. 신이 아마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설마 그 과묵하고 재미없는 인간을 말하는 건가?”
티노는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녀석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꼬리를 위아래로 흔들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