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화 - 각자의 욕망. (1)
40. 각자의 욕망.
“것보다 앞으로의 동향 궁금.”
“응?”
“힘이 지배하는 세상. 네게는 충분한 힘이 존재. 벌레 꼬일 확률이 높다.”
이신은 콩자반 통조림을 숟가락에 올리며 민성을 바라봤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벌레라…….”
민성은 그를 포섭하려 했던 검마와 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벌레로 치부하기엔 만만찮은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골렘을 죽이고 다수의 시민들이 목격. 좋든 싫든 어떻게든 반응이 올 것.”
“그렇긴 한데…….”
과연 반응이 올까 싶었다. 검마야 이미 자국으로 돌아가고 있을 테고, 혜정도 주민들이 들이닥치고 나선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적대관계에 있는 놈들뿐.
“해 봐야 파리들 정도?”
민성은 혈교와 미국, 그리고 이종범을 차례차례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파리만 꼬이면 다행. 하지만 벌레 중 맹독을 가진 놈들도 다수 존재 가능. 침에 쏘이기 전에 무리 구축도 좋은 방법. 만복 늙은이 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
원래 이리 말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이신은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를 위한 충고였기에 민성은 담담히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또 고려할 만한 게 있을까?”
“지금 세상에는 수많은 변수 존재. 타워도 그 중 하나. 관리인, 다시 열린다고 했었다. 그 역시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음…….”
민성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가를 살짝 긁적였다. 지금이야 주민들에게 가려져 있지만 타워 또한 지대한 변수로 작용할 게 틀림없었다. 랜덤으로 소집되는 타워. 주민의 침입으로 인구가 적어질수록 타워로 갈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대처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네가 강한 것은 사실. 허나 네 몸은 하나.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는 일. 동료 혹은 부하를 만드는 일이 필요.”
민성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알잖아? 믿을 만한 사람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거기다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해.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이신은 민성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없을 것으로 사료. 있어도 머리가 됐거나 누군가의 꼬리가 됐을 확률 높다. 하지만 자각사를 상기.”
눈가를 긁적이던 민성은 눈을 부릅떴다.
“자각사? ……설마 인스턴트 던전을 말하려는 거야?”
“맞다. 그들이 얻은 물건 너라고 얻지 못할 이유 전무. 그것을 기반. 믿을 만한 사람들을 모으면 된다.”
“음…….”
이신의 말은 그럴싸하게 들렸다. 인스턴트 던전을 여는 아이템을 확보한다면 능력자들을 양산해내는 게 가능해진다.
“하지만 사람은?”
“그 부분은 맡겨라.”
그 말을 끝으로 이신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동시에 인스턴트식품에 몰두해 있는 아루의 팔을 잡아당겼다. 일순간 사람들은 놀리던 수저를 멈추고 그들을 주목했다.
“응? 아루는 왜?”
“같이 움직인다.”
“어떻게 하려고?”
민성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이신을 막아서며 설명을 요구했다.
“네가 우리를 찾으러 왔던 대학. 그곳에 가려 한다.”
“거긴 왜?”
“내가 속해 있던 양궁부. 살인 경험은 전무하나 궁술은 보증. 데려와 전력으로 삼으면 유용할 것. 물론 그들이 생존해 있다는 전제하의 이야기.”
‘이럴 줄 알았으면 싹 다 데려올 걸 그랬나?’
민성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다른 생존자는 거들떠도 안 본 것이 진한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그야 문을 이용하면 쉽사리 이동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결국 이신은 자력으로 대학까지 이동한다는 소리였다.
“그럼 나도 같이…….”
그럼에도 민성은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자 했다. 하지만 이신은 팔을 들어 다가오려는 민성을 막아섰다.
“각자 필요한 역할이 존재. 이게 우리의 역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머리가 되는 것. 그게 네 역할.”
“…….”
민성이 침묵하자, 이신은 멍해 있는 아루의 팔을 잡아당겼다.
“최소한의 식량만 갖고 이동한다. 준비.”
“……뭐? 왜?”
“말귀 어둡다. 지금 우리는 동료이지만 식객. 최소한의 밥값 해라.”
‘마음은 고마운데…….’
민성은 이신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아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앞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금방 도달하는 거리였지만 지금 세상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걸어가야 한다는 소린데 주민이 판치는 세상에서 저들이 잘 도달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일단 문부터 열어주고 나도 루비 확보하러 움직여야겠어.’
민성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방을 나가려 했다.
“민성아, 식사는 잘 챙기면서 움직이는 거니? 제대로 먹지도 않던데…….”
뒤에서 점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저야 뭐……. 잘 먹고 다니죠. 걱정 마세요.”
밖을 돌아다니며 비어 있는 가게나 편의점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원래 식사를 잘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그래……. 잘 갔다 오렴.”
“네.”
민성은 머리를 숙여 보이곤 급히 방을 나섰다.
“빠르네.”
민성은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메고 문 앞에 대기 중인 둘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문, 열어주면 좋겠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모양이네. 알았어. 말려도 소용없을 것 같으니까.”
“아루는 아닌데…….”
민성은 그들의 뜻대로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희미한 빛이 그의 눈에 일렁거렸다.
“됐어. 이제 나가면 돼.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면……!”
민성은 뱉으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나중에 문을 이용해 학교로 마중 나가겠다고 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임시 휴식처가 전부인 줄 알고 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의심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너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한 일. 누군가는 해야 될 일. 다녀오겠다. 내가 했던 말 잘 상기. 아, 그리고 양궁부 확보 후 안전지대로 이동할 계획. 그곳에서 보면 좋을 듯하다.”
이신은 활대를 좌우로 흔들어 보이곤 주저 없이 문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안전지대는 막혀 있다고 말했잖아!”
민성이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이미 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름 생각해둔 게 있을 거야. 아루도 다녀올게.”
“크록!”
아루 역시 배시시 웃곤 크로스와 함께 잽싸게 문 속으로 들어갔다.
“하아…….”
순식간에 일행들이 사라지자 민성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는데도 무리하는 모습이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아니면 계속 안에만 있어서 답답했나? 모르겠다.’
민성은 가만히 문을 바라보며 이신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네가 강한 것은 사실. 허나 네 몸은 하나.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는 일. 동료 혹은 부하를 만드는 일이 필요.’
‘확실히 내가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어.’
혼자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 골렘을 죽일 때도 동료가 있었다면 좀 더 원활한 전투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능력 없는 동료는 없느니만 못하다.
‘쓸 만한 전력을 갖추려면 인스턴트 던전은 필수고 그러려면 또 루비가…….’
이러나저러나 그의 발목을 잡는 루비였다.
‘저렇게 애써주는데, 나도 다시 움직여볼까.’
피식 웃음 지은 민성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서울 영등포구 변두리의 한 거리. 주인 없는 을씨년스러운 도로에는 냉한 바람만 불었다.
치이익-
거리 한쪽에 위치한 작은 라디오 가게 안에서 거친 잡음이 울려댔다.
치익-
“국민 여러분…….”
잠시 후, 고저 없는 목소리가 잡음을 뚫고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현재 자국은 유래…… 없는 위기에 빠져 있는 상태……. 국민들의 무고한 피가 흘러…… 만들 것 같은 암울한 현 시대 속……. 하늘은 저희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과거부터 조국이 수많은 곤란과 역경……. 때마다 발 벗고 일어…… 기인이사들이 위험에 처한 자국을 위해 다시 몸을 일으…….”
“크힉! 크힉!”
라디오 잡음 소리에 몰린 주민들이 가게 내부를 기웃거렸다. 이미 피 맛을 봤는지 놈들의 몸 곳곳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문신마냥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한·미 합중연합과 더불어 전선……. 서서히 자국에 낀 그림자가…… 때까지 앞장서기로 약속했……. 단군부터 내려온 대한민국의 역사……. 오늘도,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크힉!”
쾅-
묵직해 보이는 메이스의 머리 부분이 라디오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크이익?”
하지만 놈들이 기대했던 붉은 체액 대신 나오는 것은 옅은 연기뿐이었다. 놈들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라디오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여기 한 무리 또 있다!”
가게 안을 힐끗 살핀 남자는 크게 소리치며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힉?”
느닷없는 인기척에 당황한 놈들은 급히 고개를 틀었다. 가게 밖에 대기하고 있던 동료들은 몸을 부들거리며 바닥에 엎어져 있다. 필시 눈앞의 괴물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크힉!”
“뭐, 인마. 개같이 생긴 놈이…….”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켁!”
날카로운 검신이 주민의 목을 통과해 뒤로 삐죽 튀어나왔다. 하지만 남자는 그마저도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손목을 좌측으로 세게 비틀었다. 그러자 검신은 놈의 목을 찢고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크힉! 크힉!”
순식간에 동료가 덜렁거리는 목을 붙잡고 쓰러지자, 놈들은 눈이 뒤집어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꼴에 동료애는 있나 보네.”
남자는 검에 묻은 체액을 털어내고 정면에 겨누었다.
“대주님!”
그때, 남자의 뒤에서 목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남자는 입꼬리를 올린 채, 다가오는 놈들을 노려봤다.
“근데 어쩌냐? 나도 혼자가 아니라서 말이야.”
“와아아아아!”
남자의 이죽임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난 일련의 무리가 가게 안을 덮쳐 들어갔다.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려.”
“뒈져, 이 시팔 새끼들아! 차지!”
각기 손에 병장기를 쥔 사람들은 괴성을 지르며 주민들의 급소에 병기를 쑤셔 박았다.
“칵!”
챙-
좁은 가게 안은 일순간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남자는 갈기갈기 뻗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나운 눈매로 전황을 살피곤 휙 몸을 돌렸다. 이제껏 상대했던 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놈들이다. 약하기 짝이 없는 것들.
“저런 놈들한테 이렇게 밀렸다고?”
남자는 검집에 검을 넣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과학으로 빛나는 문명을 이륙한 인간이 미개한 생물체들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대주님! 전부 처리했습니다.”
“그래?”
대주는 고개를 돌려 힐끗 가게 내부를 살폈다.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놈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그세 몰살시킨 모양이다.
“수고들 했다. 허살대는 추가로 명령할 때까지 자리에서 휴식해. 경계는 늦추지 말고. 통신은 정리 끝났다고 연락하고.”
대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력들은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일부는 군 무전기에 대고 연락을 취했다.
“예!”
휘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대주는 품에서 지도 한 장과 펜을 꺼냈다. 지도에는 서울의 지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히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