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화 - 성장의 고통. (1)
34. 성장의 고통.
‘너 때문에 싸그리 다 포기하고 왔는데, 제발 반값만이라도 해라.’
민성은 눈을 부릅뜨고 떡잎을 쏘아봤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두 눈으로 지켜볼 생각이었다.
살랑-
“음!”
떡잎이 잘게 흔들리자, 민성은 감지 않아 뻘겋게 된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살랑-
“음!”
슬슬 눈가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떡잎은 살랑거리기만 할 뿐 변화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살랑-
“야, 이 자식아!”
발가락만 한 새싹에게 농락당하자 민성은 버럭 소리치며 몰려오는 고통에 눈을 비볐다.
불쑥-
“아오……. 이젠 하다하다 새싹까지 날……. 응?”
눈을 벅벅 비비던 민성은 살짝 뜨인 눈 사이로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성은 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쳐들었다.
“오…….”
민성은 멍한 얼굴을 한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의 앞, 떡잎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거대하다는 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했다. 성인 5명이 손에 손을 잡아도 감싸지 못할 만큼 굵은 몸통. 그 위로는 두터운 가지들이 얽혀 있었다. 우거진 가지 사이를 덮는 무성한 푸른 잎사귀들 역시 장관을 연출했다. 20년의 성장기간을 일순간에 단축해서 그런지, 정말 눈 깜빡할 새에 성장한 듯했다.
[축하드립니다. 영겁나무가 1차 성장을 끝냈습니다.]
[영겁나무가 활성화됩니다.]
[1차 성장을 끝낸 영겁나무]
등급: ★★★★★★
설명: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대지에 뿌리박고 생존한다는 영겁나무. 영겁나무 인근에 머물며 터전을 일구던 우드 엘프들은 이 나무를 신성시해 신목이라 일컫기도 했다.
효과: 영겁나무의 과실을 수확할 수 있다. 영겁나무는 한 번에 하나의 열매만을 맺는다(하지만 아직 완전한 성장을 이루지 못해, 온전한 과실은 수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과실 생성까지 남은 시간: 100일
2차 성장까지 남은 시간: 40년
‘……1차 성장?’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재차 설명을 읽어 내렸다. 7,300루비를 쏟아 부었건만 겨우 1차 성장을 끝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건 뭐……. 나무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뒤에 웬 숲이 있어!’
2차 성장기간을 확인한 민성은 혀를 내둘렀다. 40년, 루비가 없었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나무 크는 모습만 보다 갔으리라.
‘가만있자……. 40년이면 루비가…….’
민성은 머리를 굴려 암산하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14,600개. 40년을 단축시키기 위해 필요한 루비의 숫자였다. 코인으로 지불한다 해도 29,200,000개가 필요했다.
“실화냐……?”
다른 이들이 습득했다면 아마 대대손손 물려줘야 할 가목 정도가 됐을 것이다.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던 민성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후……. 그래. 뭐, 당장 2차 성장을 시킬 것도 아니니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과실의 확인이 남아 있었다.
[200,000코인으로 영겁나무의 과실을 바로 수확하실 수 있습니다.]
[코인이 부족합니다. 루비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단축하시겠습니까?]
성장기간 100일. 민성은 코웃음 치며 곧장 승낙했다. 7,300개를 한 번에 지르고 나니 100개 정도는 가소로울 정도로 적게 여겨졌다. 민성이 승낙하자 푸르름만이 가득하던 나무에 붉은 열매가 데롱 매달렸다.
뚝-
그리곤 곧장 민성의 머리 위로 수직 낙하했다.
“어어?”
점차 과실이 안면으로 향하자 민성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수박 3덩이를 합쳐놓은 듯한 과실 크기는 괜스레 주눅마저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민성은 과실을 받기 위해 급히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100루비짜리 열맨데. 터지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읍…….”
과실은 생각 이상으로 묵직했다. 과실이 팔과 맞닿자 육중한 무게가 팔을 짓눌러왔다.
‘100루비!’
이를 악다문 민성은 팔을 휘청거리면서도 끝내 과실을 놓치지 않았다. 충격이 어느 정도 완화되자, 민성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과실을 자세히 살폈다.
‘수……박?’
초록빛을 띤 둥그스름한 열매. 하얀 줄무늬까지 쳐져 있는 것이 꼭 수박을 연상케 했다.
[설익은 영겁나무 과실을 획득하셨습니다.]
[설익은 영겁나무 과실]
등급: ★★★★
설명: 반년의 기다림 끝에 영겁나무가 저장해놓았던 양분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하지만 영겁나무가 완전히 성장하지 않아 과실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효과: 복용 시 +6부터 +10까지 랜덤한 수치의 지력을 획득할 수 있다. 획득한 지력은 영구히 상승한다.
횟수제한: 1/1
“음…….”
천천히 과실의 설명을 읽은 민성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지력을 올려준다는 설명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거기다 루비만 넉넉하다면야 과실을 지속적으로 수확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0루비에 최소 6지력 상승. 어쩌면 항상 애먹던 마나 관리에 종지부를 찍게 할 수도 있는 아이템이었다. 기쁨에 겨워 춤춰도 모자랄 판이지만 민성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설익었다…….’
원래의 과실은 더 굉장한 물건인데 나무가 1차 성장밖에 이루지 못한 덕에 과실의 효과가 낮아졌다는 소리로 들렸다.
‘이거……. 결국 완벽한 과실을 수확하고 싶으면 루비를 더 갖다 박으라는 소리잖아.’
민성은 혀를 끌끌 차며 과실을 내려다봤다. 물론 과실의 효능이 낮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량의 루비를 투하한 것치곤 아쉬움이 남는 물건이었다.
‘쩝……. 그래도 루비만 있으면 이제 마나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민성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아쉬움을 달랬다.
[설익은 영겁나무 과실을 복용하시겠습니까?]
“네.”
민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커다랬던 과실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작은 알약 크기로 변했다.
‘호오…….’
그 모습을 이채롭게 바라보던 민성은 먹기 좋게 변한 과실을 단숨에 입에 넣었다.
“음……!”
민성은 두 눈을 부릅뜨고 몰려오는 맛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 부드러운 봄 내음이 콧속으로 파고들어와 순식간에 뇌리로 솟구쳤다. 동시에 열대과일같이 달짝지근하면서도 시원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중간에 살짝살짝 찔러 들어오는 새콤한 맛이 입맛을 더욱 돋우었다.
‘이런 맛이 존재할 줄…….’
“우웩!”
하지만 끝맛은 영 아니었다. 떨떠름하면서도 쌉싸래한 뒷맛이 입속을 강타했다. 민성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침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곧바로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설익은 영겁나무 과실을 복용하셨습니다. 지력이 +7 상승했습니다.]
지력 +7. 큰 상승폭은 아니었지만 간만의 스텟 올라가는 소리에 기분도 절로 좋아지는 듯했다.
“후…….”
민성은 침으로 얼룩진 입가를 옷소매로 닦아냈다. 그리곤 상태창을 열어 스텟을 확인했다.
이름: 강민성
나이: 23세
HP: 320
MP: 1,400
스텟:
체력: 16
근력: 17
민첩: 16(+25)
지능: 8
지력: 70(+50)
행운: 5
“크…….”
처음만 해도 13에 불과했던 지력 스텟은 어느새 70까지 육박해 있었다. 조금만 더 지력을 상승시킨다면 머잖아, 마나가 달려 스킬 사용을 고민할 일도 없어질 듯 다.
‘좋아. 이 정도면 2차 성장도 고려해봐야겠어. 그리고 이참에 과실을 잔뜩 만들어내서 지력 뻥튀기를…….’
민성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닫았다. 그리곤 홀린 듯 나무에 손을 뻗었다.
[200,000 코인으로 영겁나무의 과실을 바로 수확하실 수 있습니다.]
[코인이 부족합니다. 루비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단축하시겠습니까?]
‘아차차……. 그전에 다른 것부터 마무리 지어야지.’
지력 상승에 취해 중요한 걸 깜빡할 뻔했다. 과실 생성은 이 일을 끝낸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 세차게 머리를 흔든 민성은 아이템 창에서 자그마한 알 하나를 꺼내들었다.
아이템 창 한 칸에서 고이 잠들어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알.
‘오늘 한번 정체를 알아보자.’
민성은 부릅뜬 눈으로 손바닥에 올린 하얀 알을 내려다봤다.
[730,000코인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을 바로 부화시킬 수 있습니다.]
[코인이 부족합니다. 루비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단축하시겠습니까?]
‘분명 설명에는 내 행동에 따라 내용물이 바뀔 수 있다고 했지.’
민성은 메시지를 바라보며 눈가를 긁적였다. 그렇다면 루비를 사용하는 것 또한 분명 내용물에 영향이 갈 것이고, 그것이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낼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긴……. 이걸 만든 양반도 시간을 단축시키는 놈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설마 큰 영향이 있겠어?’
인생 모 아니면 도라 하지만 윷을 던져야 모가 나오든 도가 나오든 할 것 아닌가? 아주 잠시 고민한 민성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직-
365루비를 소모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잠잠했던 알 중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민성은 잽싸게 알을 나무 옆에 내려놓았다. 알에 검은 선이 점점 늘어날 때마다, 담담했던 마음에도 가늘게 금이 갔다. 루비 상자를 열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후……. 멀쩡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쫄리네. 6성짜리라 그런가?’
민성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곤 점점 균열이 짙어져가는 알을 주시했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대박 구호를 연신 외쳤다.
빠지직-
알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민성의 눈도 꿈틀거렸다.
툭-
‘오오…….’
마침내 알껍데기가 바닥을 나뒹굴자 민성은 두 손을 꽉 쥐고 고개를 앞으로 슬며시 뺐다.
“칵, 칵…….”
“응?”
민성은 얼빠진 표정으로 내용물을 바라봤다. 알 속에는 자그마한 도마뱀 같은 것이 기침하며 껍질을 뱉어내고 있었다. 색깔도 불그스름한 것이 어딘가 요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축하드립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에서 차원용 그란칼을 획득하셨습니다.]
‘도마뱀이 아니고 용이었어?
민성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펫 창을 열었다.
[차원용 그란칼]
등급: ★★★★★★
설명: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며 파괴와 살육을 일삼던 태초의 종족. 그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던 신들은 결국 이 종족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오늘, 탐욕과 오만의 표상인 차원용족의 핏줄이 다시 태동하기 시작한다.
친밀도: 0
보유능력: 적절한 수면, 게걸스럽게 먹기, 가냘픈 날갯짓.
성장단계: 1/3
현재 단계: 헤츨링
HP: 120
MP: 360
스텟:
체력:6
근력:2
민첩:1
지능:21
지력:18
행운:10
‘호오…….’
찬찬히 스텟창을 살핀 민성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6성이라 그런지 몰라도 별 볼 일 없는 외관을 가진 것치고는 꽤나 높은 스텟을 지니고 있었다.
‘스텟은 높은 것 같은데……. 스킬은 왜 이래?’
거창한 설명과 달리 볼품없는 녀석의 스킬창을 살피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정작 기대했던 스킬 부분이 형편없자 민성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