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화 - 퍼지는 씨앗들. (12)
“1중대는 시신 확보해서 멀리 파묻고, 2중대는 부상자들 파악해서 의약품 나눠줘!”
“예!”
“거기! 너무 뿌리지는 마! 안 그래도 부족한데 이런 곳에 막 소모할 수는 없지.”
모자에 무궁화 두 개 달린 남자가 명령하자, 군인들은 부산 떨며 급히 이동했다.
“…….”
들것과 구호물품을 들고 왕복하는 군인들 사이로 이종범이 나타났다. 그는 멍한 표정을 한 채, 어수선한 현장을 살폈다.
“여기! 들것 가져와!”
누군가의 명령에 들것을 든 군인 둘이 화급히 달려간다. 이종범은 그 둘을 처연하게 바라봤다.
“크윽…….”
생전의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으깨진 시신. 들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군인들은 헛구역질하며 장갑 낀 손을 육포가 된 시신에 뻗는다.
“…….”
“왜? 안타깝니?”
그림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종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리고자 했던 그림은 이런 추화가 아니었습니다.”
이종범은 피범벅이 되어 싸늘하게 식어가는 자그마한 여아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계속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사회의 혼란을 유도하는 능력자들을 제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능력자들과 스킬을 확보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지금은…… 전부 의미가 없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어리석은 아이야, 그렇게 설명을 했건만 그세 동정심이 눈을 가렸나 보구나. 추화는 예술가의 손에 따라 한 폭의 걸작으로 바뀌기도 한단다. 너도 봤잖니? 그 약골 같던 아이가 무리에서 노닥거리는 모습을. 너도 충분히 저리 될 수 있단다.”
그림자에서 상냥하면서도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종범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힘이 없으면 꿈에 다가갈 추진력도 얻을 수 없다. 그저 하늘에 떠 있는 꿈이란 놈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림도구야 내가 준비해줄 수 있단다. 하지만 당사자가 손에 물감 묻히기를 거부하면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지.”
단호할 정도의 목소리. 그림자 속의 목소리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요구했다. 갖고 있는 신념을 무너뜨리라고.
“지금 확보한 능력자들만으로는 역부족입니까?”
이종범은 씁쓸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담담히 질문했다.
“아이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커준다면 나도 기쁘지. 하지만 알잖니?”
“혈교가 보유한 무력을 일부 투입한다면…….”
“어머, 자국의 상황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니? 한국 정도면 양호한 거란다. 거기다 아직 삼족오 연합도 본격적으로 나선 것 같지도 않고.”
그림자는 단호한 거절을 에둘러 표현했다.
“언제 또 놈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빨리 움직여!”
안경을 고쳐 쓴 이종범은 들것에 실려 나가는 고깃덩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일단 삼족오 연합이 움직이길 기다리면서 아이들의…….”
“하겠습니다.”
이종범은 그림자의 말을 자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니?”
“스킬. 저도 배우겠습니다. 물감, 묻히겠습니다.”
이종범은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그놈만큼은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이종범은 날뛰던 민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세상은 변화를 요구한다. 변화하지 못한 자는 결국 도태되고 받아들인 놈은 앞으로 도약한다. 그놈처럼. 지금은 목적을 위해서 신념은 잠시 내려놔야 할 때였다.
“어머,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그렇게 설득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어쨌든 잘 생각했단다. 그럼 네 마음에 들 만한 걸로 몇 개 금방 집어 올 테니, 죽지 말고 몸 잘 사리고 있으렴.”
그 말을 끝으로 그림자에서 검은 덩어리가 빠져나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힐끗 그림자를 살핀 이종범은 다시 고개를 돌려 피해현장을 바라봤다.
“엄마……. 엄마…….”
“흑흑흑…….”
“네놈들이 들여보내주기만 했어도!”
폭력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비통함과 원망만이 맴돌고 있었다.
“폭력에는…… 더 큰 폭력으로…….”
피가 배어 나오도록 주먹을 쥔 이종범은 절망 가득한 현장을 눈에 뚜렷이 새겨 넣었다.
*
벌컥-
“후……. 진드기 같은 새끼들…….”
문을 젖히고 ‘비밀스러운 집’ 안으로 들어온 민성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바르알을 잃은 상실감 탓인지 죽자고 쫓아오던 놈들의 모습은 지금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 따라와서 다행이었지.’
민성은 일부러 한강 인근의 공원 쪽으로 놈들을 유도했다. 반파된 건물들의 문을 이용했다면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피난민들에게 몸을 피할 최소한의 시간 정도는 마련해주고 싶었다.
‘쩝……. 잘만 하면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는데……. 역시 몸뚱이가 무거워서 물을 무서워하나?’
민성은 아쉬운 마음에 눈가를 긁적였다. 공원을 지나 놈들에겐 좁다랗게 느껴질 마포대교까지 유인했었다. 건물만 한 놈들이 다리에 올라타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마포대교로 온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놈들은 다리 밑 시퍼런 강물을 보더니 저들끼리 얘기하곤 몸을 돌렸다. 다시 안전지대 쪽으로 되돌아가는 건지, 아니면 다른 곳을 노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이 있다면 다 도망갔겠지?’
시간을 벌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은덕을 베풀었다. 나머지는 오롯이 그들 몫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민성은 생각을 접고 눈앞에 보이는 궁궐로 이동했다.
“오오오! 돌아왔나, 싱싱한 주인!”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시바의 경쾌한 냥냥거림이 들려왔다. 녀석의 수염이 실룩이는 걸 보고 있으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예. 다녀왔어요.”
민성은 피식 웃으며 바닥 한쪽에 두터운 파카를 던지며 화답했다.
“냥! 냥! 냥!”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정장 빼입은 작은 고양이들이 널브러진 파카를 들고 다시 자취를 감췄다.
‘참 편하단 말이야.’
민성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녀석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몇 시간 후면 깔끔하게 세탁해 그의 방에 가져다 놓을 것이다. 최근에야 알게 된 우렁각시의 정체. 시바는 녀석들을 소리 없는 집사라 불렀다. 그럴듯한 궁궐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부가적으로 딸려온 옵션이라 했었다.
‘어쩐지 내팽개쳐놓으면 깔끔하게 세탁까지 된 상태로 정리돼 있더라니……. 하여튼 물어보지 않으면 알려주지를 않아요.’
민성은 어딘가 얄미워 보이기까지 한 녀석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냥? 왜 그러나, 싱싱한 주인?”
“큭……. 아니에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바의 얼굴을 보자 다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여튼 요물 같은 놈이다. 민성은 웃음을 꾹꾹 누른 채,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민성은 빠르게 몸을 씻고는 곧장 침대로 뛰어 들어갔다.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이 그를 반겼다.
“역시 이불 안이 최고지…….”
‘별 거지 같은 것들이 판치고 돌아다니는데 이불만 한 곳이 없지. 암, 암.’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속설은 올바른 표현인 듯했다. 한참 넓은 침대를 뒹굴던 민성은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지그시 바라봤다.
‘앞으로 어떻게 돌아가려나…….’
이불 밖은 위험하다.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기엔 냉랭할 정도로 차가운 현실이었다. 지금도 누군가는 집을 잃고 거리에 내몰려 주민들의 손에 죽어나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안타깝지만 내가 어떻게 할 방도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뭐, 내가 안 해도 땡중이나 마교 쪽에서 알아서들 하겠지.’
적당히 잘 먹고 잘 살다가 가고 싶었는데,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
피로감에 눈이 감겨오자 민성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잠들어버릴 수는 없었다.
‘일단 퀘스트부터 확인하자. 어디까지 진행됐으려나. 그 개고생을 했는데 설마…….’
잠이 확 깨는 듯했다.
“퀘스트 창.”
민성이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앞에 작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오오!”
조심스럽게 내용을 확인하던 민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많이 잡아 봐야 천 명가량일 거라 예상했건만 메시지에 적힌 숫자는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현재까지 구한 인간: 2,780/100,000명
잘못 봤나 싶어 다시 숫자를 살폈다. 변동은 없었다.
‘2,780명? 이 숫자면 거의 안전지대에 있던 사람들 전원 같은데?’
때려잡은 골렘은 고작 둘. 퀘스트는 오로지 현무검법의 계승자만이 이뤄낸 수치를 반영한다는 제한사항 때문에라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숫자였다.
‘아니면 설마…….’
눈매를 좁히고 고심하던 민성은 이내 무릎을 탁 쳤다. 아무래도 바르알을 죽이고 골렘들의 이목을 끌었던 게 반영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수치를 설명할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착한 일을 하니 복을 받는구나.’
민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메시지를 닫았다. 생각지도 못한 이득에 절로 흥이 났다. 이 페이스라면 반년은커녕 몇 달 안으로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이 기세를 몰아가보자!’
민성은 따듯한 이불을 박차고 방을 나섰다.
“흠…….”
궁궐 밖으로 나온 민성이 곧장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텅 빈 농장이었다. 민성은 흙바닥 평평한 단면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곳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에 심어놨던 영겁나무 씨앗의 성장과정을 확인하러 왔다. 하지만.
[성장까지 남은 시간: 20년.]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었다.
‘……20년? 심은 지 거의 한 달은 넘은 것 같은데. 한 달은 취급도 안 해주는 건가?’
민성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떡잎에 닿지 않게 튀어나온 부분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으레 보이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14,600,000코인으로 영겁나무 씨앗을 바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코인이 부족합니다. 루비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단축하시겠습니까?]
“…….”
‘14,600,000코인. 루비로 환산하면…… 7,300루비? 뭐야, 이거! 진짜 반영 안 됐잖아!’
30루비 가량이라도 절감할 줄 알았건만, 정말 취급해주지 않을 줄은 몰랐다.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떡잎을 노려봤다. 상점에서 추가로 루비를 사용하지 않고 돌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영겁나무의 성장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의 부화. 다량의 루비가 드는 만큼 루비가 쌓여 있을 때, 이 두 가지를 빠르게 매조지하고 싶었다.
‘마음의 준비는 해뒀는데. 후……. 아껴두면 똥 된다. 아껴두면 똥 된다.’
왜 이렇게 손가락이 떨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민성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들어 승낙 칸을 눌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7,300루비가 빠져나갔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크흑…….”
민성은 피눈물을 흘리며 루비의 잔량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루비는 700가량뿐. 빵빵했던 주머니가 한순간에 홀쭉해지자 묘한 상실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