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151화 - 퍼지는 씨앗들. (11)
거대한 몸뚱이가 잘게 흔들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충격 받은 모양이었다. 놈이 놀란 틈을 타 민성은 재빨리 놈의 목까지 접근했다. 그리곤 대검을 비스듬히 치켜세워 있는 힘껏 내리쳤다.
깡-
‘아까 그놈보다 단단한데?’
큼직한 바위와 부딪친 검날에서 선명한 쇳소리가 울렸다. 반동으로 팔에 찡 하는 울림도 전해져왔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치익-
물리적 타격은 입히지 못하더라도 마나만큼은 착실히 태울 생각이었다.
‘크악! 설마 날…… 날 속였단 말이냐?’
“이크.”
옅게 금이 간 바위를 보며 혀를 차던 민성은, 잽싸게 어깨 끝 쪽으로 이동해 날아오는 놈의 팔을 피해냈다. 그리곤 자세를 바로잡고 입술 한쪽을 위로 치켜세웠다.
“생김새만 그런 줄 알았는데, 진짜 돌대가리였네? 에라이, 답답한 새끼야. 그런 높으신 양반이 이런 곳까지 행차하시겠냐?”
‘감히……. 감히…… 한낱 미물에 불과한 것이 나를 속여!’
놈은 분노 가득한 함성을 토하며 민성을 으깨고자 재차 팔을 들어 빗질하듯 어깨를 쓸었다. 삽시간에 놈의 오른손이 거친 파도같이 덮쳐왔다.
“거참, 학습능력 떨어지는 놈이네. 네 친구 죽는 꼴 못 봤냐?”
민성은 오히려 앞으로 질주하더니 가볍게 도약해 덮쳐오는 놈의 팔에 올라탔다. 바로 정면에는 놈의 큼지막한 안면이 위치하고 있었다. 안면 곳곳에 박혀 있는 돌덩이는 곰보빵을 연상케 했다. 그 사이로는 매끄러운 부위가 슬쩍 보였다. 저곳을 가격하면 꽤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 이놈! 죽여 버리겠다!’
“그어어어어!”
놈이 팔을 흔들어 그를 바닥에 털어내려 하자, 민성은 놈의 팔을 디딤돌 삼아 놈의 안면으로 힘차게 도약했다.
“거 시끄러워 죽겠네. 너만 목소리 큰 줄 알지? 광전사의 외침!”
크아아아앙!
평소와 다른, 야수의 거친 포효가 민성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크윽……. 이건…….’
안면에 직격으로 함성을 얻어맞은 바르알의 몸이 움찔거렸다. 10개의 스킬상자를 개봉하며 얻었던, 야수의 살기와 야생성을 응축해 목소리로 표출하는 스킬이었다. 검마와 헤어진 뒤, 곧바로 인적 드문 곳으로 이동해 습득했었다. 설명에는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려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제한한다고 돼 있었는데 효과가 있는 듯했다.
“뭐긴 뭐야. 스킬이지, 새끼야!”
놈의 안면에 도달한 민성은 악다구니를 지르며 매끈한 부위에 대검을 쑤셔 박았다.
푸욱-
“그어어어어어어!”
민성은 놈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도 아랑곳 않고 검자루를 홱 잡아챘다. 그러자 희멀건 액체가 고구마 줄기처럼 검날에 딸려 나왔다. 민성은 곧장 날아온 놈의 두터운 손들을 피해냈다.
‘이 미물이 감히! 죽이겠다! 네놈을 짓밟고 짓밟아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
“쯧…….”
대검을 갈무리할 시간은 없었다. 민성은 곧장 날아온 놈의 두터운 손들을 피해 놈의 머리꼭대기에 올라탔다. 한 방 더 찔러주고 싶었지만, 육중한 외관과 달리 놈은 보기보다 민첩했다.
‘호오……. 여기라면?’
민성은 허허벌판에 가까운 놈의 머리를 훑었다. 돌로 덮인 신체와 달리 이곳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 대머리였어?’
민성은 직감적으로 이곳이 놈의 약점이라 판단했다. 하긴 누가 이곳까지 올라올 생각을 하겠는가. 방어선이 없으니 빠르게 놈의 속살까지 파고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움직임을 묶어두고 마나를 태워서 혹시 모를 스킬 사용을 방지한 뒤, 그 다음은…….’
빠르게 판단을 내린 민성은 악랄한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하얀 난장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돌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돌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증오와 죽음을!]
난장이들은 금세 골렘의 몸 곳곳으로 이동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이…… 이 비겁한 자식이 스킬을…….’
당황한 바르알은 팔을 머리로 뻗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움직이기 쉽지 않음을 느꼈다.
“불만 있으면 너도 쓰든가. 근데 그렇게 놔둘 거 같아?”
민성은 하품 나올 정도로 느려 터진 놈의 움직임을 보며 조소했다.
‘채굴을 시작해볼까.’
목표는 놈의 머리 안이었다. 민성은 검끝이 바닥을 보게 대검을 든 뒤, 내려찍기 시작했다.
치익-
대검이 위아래로 왕복할 때마다 마나 타들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얼쑤. 락 골렘의 머리 안에는 뭐가 있을까.”
민성은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떡메 치듯 흥겹게 대검을 꽂았다.
‘크아아아악! 이놈!’
격한 고통을 이기지 못한 바르알은 몸을 뒤틀며 요동쳤다. 허나 그마저도 느려졌기에 민성에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민성은 놈의 비명소리를 응원가 삼아 더욱 속도를 올렸다.
콰득-
“오!”
금세 놈의 머리가 부서져 나가자 민성은 내부를 관찰했다. 안에는 연두부같이 하얗고 물렁해 보이는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게 이놈의 뇌 같은 건가?’
민성의 생각은 정확했다. 지식의 요람. 락 골렘의 명령기관이자 신체를 통솔하는, 인간의 뇌 같은 부위였다.
‘아…… 안 돼! 그것만은…….’
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확신을 얻은 민성은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돼!”
민성은 대검을 높게 쳐들어 연두부를 푹 찍었다. 그리곤 단순히 찍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자 휘젓듯 대검을 돌렸다. 물컹한 느낌이 검날을 타고 팔에 올라왔다.
“그어어어어!”
일순간, 요란할 정도로 커다란 울음이 전장을 울렸다.
“그어?”
피난민들을 몰아붙이던 골렘들은 당혹하여 후방을 돌아봤다.
“…….”
머리를 푹 숙인 채 석상처럼 굳어 있는 바르알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뚜렷이 박혔다. 심지어 생명이 다했는지 몸이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뭐…… 뭐야?”
골렘들이 기동을 멈추자, 죽음을 기다리던 피난민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쿵-
“으차.”
바르알의 무릎이 땅에 닿자, 어깨에서 대기하고 있던 민성은 가볍게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웬만한 건물 크기 높이였지만 높은 민첩과 앞서 사용했던 ‘골렘의 굳건한 의지’ 덕에 별 탈 없이 내려올 수 있었다.
“후…….”
민성은 몸에 묻은 먼지와 눈을 털어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이은 전투 탓인지 아까보다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한 놈 죽였으니 퀘스트도 꽤나 진행…….’
띠링-
[인간 105명을 구출하셨습니다.]
“…….”
민성은 새롭게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지? 105명? 놔두면 천 명이고 만 명이고 죽일 것 같은 놈을 죽였는데, 고작 백 명?’
갑자기 뒷골이 당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중간중간 몇 명 구했다고 나왔던 거 같은데.’
민성이 새롭게 생성됐던 퀘스트난을 열어 진행사항을 파악하려는 찰나.
“그어어어어어!”
쿵- 쿵-
‘이런 미친…….’
민성은 혀를 내두르며 대검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분노에 눈이 뒤집힌 골렘들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놈들의 역린을 건드린 듯했다.
“다구리는 반칙이지, 새끼들아!”
“그어어어!”
괜스레 소리질러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놈들의 고함과 요란한 발소리뿐이었다.
‘아오……. 어쩌지?’
민성은 빠르게 접근해 오는 돌덩이들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일대일 대결에 편중된 스킬 탓에 다수와 접전할 때는 불리했다. 유일한 광역 스킬인 ‘수옥’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수옥을 사용하기엔 마나도 부족하고. 그렇다면…… 튀자!’
온전한 상태로 맞붙어도 시원찮을 판에 지금 상태로 교전한다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에 불과했다. 지금은 도망가야 할 때였다. 퀘스트와 한순간의 치기에 눈멀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실수는 없어야 했다. 결단을 내린 민성은 슬며시 대검을 갈무리하고 등 돌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어!”
분노에 몸을 맡긴 골렘들이 그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
쿵- 쿵-
육중한 몸집을 자랑하던 골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경계선 부근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괴물들이 물러나고 있어…….”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생존자들은 작금의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지옥으로 넘어가는 강을 건너기 일보 직전에 벌어진 일이라 현 상황을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쿵-
“살았어……. 살았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윽고 골렘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피난민들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거나 얼빠진 웃음을 흘렸다.
“흑흑……. 조금만 더 견디지 그랬어요……. 다 같이 살 수 있었는데……
“소정아……. 소정아…….”
가족을 잃은 자들은 곤죽이 된 시신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피맺힌 절규가 하늘을 울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 우린 살았어! 살았다고!”
“그…… 그래. 살았어…….”
얼떨떨해하던 생존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일부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가족을 잃은 자들의 탄식과 애통함도 생존의 기쁨 앞에선 한없이 낮아졌다.
“근데 대체 왜 도망간 걸까? 충분히 몰살시킬 수 있었을 텐데…….”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르자 생존자들의 관심사는 놈들의 퇴각 원인에 쏠렸다.
“새끼들, 갑자기 배에서 신호라도 온 거 아닐까? 돌도 싸야 될 거 아냐.”
“큭…….”
긴장이 풀렸는지 시답잖은 농담도 오갔다.
“혹시 아까 그 청년이 무슨 수라도 쓴 거 아닐까? 모양새가 딱 청년을 쫓는 것 같았는데…….”
생존자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자 곧바로 여기저기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동료애가 강한 놈들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동료가 죽어서 다 눈 돌아간 것 같았는데…….”
“흠…….”
“흥, 망할 새끼들. 꼴에 동료애는 있다 이거지. 퉤, 싹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쏟아져 나왔으나, 동료애가 강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근데 그 청년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싸우고 또 도망치려면 체력 소모가 만만찮을 텐데…….”
생존자들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 방향을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괜찮을 거야…….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어. 분명 잘 살아남아 도망갔을 거야.”
“하여튼 덕분에 살았네……. 고맙기도 해라.”
“그런데 뭐 하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강했던 걸까? 능력잔가?”
“글쎄…….”
의외로 해답은 금세 나왔다.
“거…… 한창 인터넷 달궜던 그 청년이잖아. 고간 킬러인지 뭔지 하는. 수배서도 돌고 꽤 유명한 양반이었는데. 그나저나 세상사 참 모를 일이야. 살인마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연명하게 될 줄은…….”
“예? 살인마였다고요?”
민성의 정체를 들은 사람들은 당황하여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젠장. 살인마고 나발이고 그게 뭔 상관이야! 도와줬으면 은인이지! 오히려 옆에서 방관한 새끼들이 살인마 아니야? 어?”
누군가의 외침에 피난민들은 맞장구치며 경계선을 죽일 듯 노려봤다.
“맞아! 빌어먹을 새끼들. 제 목숨 아까운 줄만 아는 놈들 같으니…….”
“저 새끼들은 다시 괴물 놈들이 들이닥쳐도 방관만 할 새끼들이라고!”
“더러운 방관자 새끼들. 에이, 퉤!”
골렘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군인들은 경계선 밖으로 나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요절내버리고 싶었으나, 놈들 목에서 덜렁거리는 소총 덕에 생존자들은 애꿎은 마른침만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