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148화 - 퍼지는 씨앗들. (8)
“아직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어차피 도망갈 곳도 없으니까요.”
마지막 채널이 나가기 전 보도됐던 뉴스 중 하나가 바로 도피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민들이 나타난 곳은 비단 육지만이 아니었다. 공중과 해상을 장악한 주민들 덕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육로뿐이라는 보도. 민성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그런가? 자네 정도라면 이미 세력을 형성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인데.”
검마는 안도한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갸아아아악!”
상점 저 멀리서 강화에 실패한 이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흠. 벌써 시간이 이리 됐나. 쯧…….”
검마는 중얼거리며 애꿎은 잔만 툭툭 두들겼다.
“자네.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마교로 들어오라는 말씀 말입니까?”
검마는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그 제안은 유효하네. 다만 이번이 마지막 권유가 되겠지.”
“그 말씀은…….”
“이번 사태로 우리는 본국으로 철수할 계획이네. 언제 또 대면할지 모를 거야.”
검마는 롱코트의 버튼을 찬찬히 잠그며 계속 말했다.
“아직도 자네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가? 지금이라도 자네가 승낙한다면 함께 본교로 이동할 생각이야. 현 상황에서 안전한 곳이 있을까 싶지만, 적어도 한국보단 안전할 거라고 장담하지. 그리고 자네를 위한 거주공간도 마련해주겠네. 통역도 손자 놈이 아닌 전문 통역사를 붙이고 말이야. 어떤가?”
진중한 그의 말투에 민성은 잠시간 침묵했다. 그러나 이내 결정하곤 입을 열었다.
“절 그토록 높게 평가해주신 점,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지켜야 할 사람들도 있고요.”
“그렇구먼.”
민성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은 아쉬움으로 돌아왔다. 검마는 혀를 차며 천장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그래도 운명 덕에 아쉬움 한 조각 줄일 수 있어, 다행이군.”
검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잔을 테이블 좌측의 빈 구멍에 넣었다.
“혹시라도 혜정을 보게 된다면 안부나 전해주게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인연이 닿을 때까지 강녕하게. 아차.”
검은 중절모를 푹 눌러쓰고 걸음을 떼려던 검마는 순간 몸을 멈칫했다.
“그리고…… 적합한 때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네. 잊지 말게. 그럼.”
그 말을 끝으로 검마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남은 미련이 없는지,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코트의 끝자락이 잘게 흔들렸다.
‘스스로 만들어 간다…….’
민성은 검마의 신형이 손님들 사이로 섞여 들어갈 때까지,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연륜이 묻어나온 한마디는 그의 심경에 옅은 파문을 일으켰다. 아니, 이제 못 본다는 말에 생긴 아쉬움이라는 감정일지도 몰랐다.
“후…….”
아무리 고민해봐도 이 감정은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다.
‘여기서 궁상떨고 있어 봐야 뭐 하겠어. 일단 돌아가자.’
눈가를 벅벅 긁어내리던 민성은 컵을 빈 구멍에 넣은 뒤, 자리를 벗어났다.
“스킬 보고 가세요, 스킬!”
“발톱 다듬기가 무려 800코인밖에 안 합니다!
민성은 호객행위를 벌이는 좌판 주인들을 뒤로하고 상점 문을 열었다. 7층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다른 사용처에 쓰기로 맘먹었다. 상자에 더 투자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다만 루비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기왕이면 조금 더 확실성이 높은 곳에 투자하는 것이 맞았다.
*
끼익-
“서둘러! 얼른 이동해!”
‘뭐지?’
타워 밖으로 나온 민성은 황당한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1소대! 빨리 움직여!”
무력하지만 평화로웠던 아까의 분위기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진 듯했다. 군인들은 굳은 표정을 한 채,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임시 막사를 설치하던 군인들도 장비를 내팽개치고, 소총을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이 이렇게 다급하게 움직일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외부의 침입. 그러나 민성은 저들의 반응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안전지대. 전투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아니면, 설마…… 효과가 끝난 건가?’
지배자가 설치한 공간.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다. 막말로 유통기한이 있는 공간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상점 이용하는 데 꽤 애먹을 수도 있겠는데……. 확인이 필요하겠어.’
어차피 돌아가려면 안전지대를 나가야 했다. 나가는 김에 상황을 살피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민성은 얼굴을 찌푸린 채, 달려가는 군인들의 뒤를 따라갔다.
‘이건…….’
안전지대 외곽에 도착한 민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
“제발! 들여보내주세요! 제발!”
외곽 너머의 경계선에선, 군인들이 아우성치며 안전지대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상부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억지로 밀고 들어올 것 같으면 발포해버려!”
무전기에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군 간부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아마 경계선에 위치한 군인들과 교신하는 듯 했다.
“니들이 사람 새끼들이야! 엉?”
“제발! 제발 들여보내주세요! 아니…… 아니면 제 아이만이라도 부디…….”
피난민들의 절규소리가 뚜렷이 들려오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군인들의 표정은 더욱 딱딱해져갔다.
“제길……. 우리 부모님도 저 안에 계신 거 아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쿵- 쿵-
그때, 전방 저 멀리서 거대한 충돌음이 불규칙하게 울려왔다.
“오…… 오나 봅니다.”
“수색대에서 보고 받은 게 정확하군. 준비해!”
‘주민들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건가?’
군인들의 거친 고함소리로 지레짐작한 민성은 상황을 더 자세히 살피고자 경계선 쪽으로 이동했다. 들어올 때와 달리, 군인들의 시선이 한 곳에 쏠린 덕에 이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어어어어!”
피난민들의 후방부 쪽에서 거대한 괴성이 들려왔다. 민성은 눈매를 좁혀 시선을 그쪽으로 집중시켰다.
“꺄아아아악!”
“살려줘! 아아악!”
콰직-
‘저 새끼들이 또…….’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그런 그들을 짓밟는 락 골렘들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는지, 놈들의 주먹과 다리는 진득한 핏물과 허연 뇌수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놈들은 만족하지 않았는지 거침없이 주먹을 놀렸다.
탕-탕-
“막아! 민간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놈들의 발밑에서 일부 군인들이 총격을 가했으나 소용없었다. 총알은 놈들의 두터운 외피를 뚫지 못했다.
“그어어어!”
“끄아아악!”
오히려 놈들의 공분을 샀는지, 그들이 휘두른 팔에 휩쓸려 곤죽이 되어버렸다. 금세 잔챙이들을 처리한 락 골렘들은 괴성을 지르며 피난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화투판 돈 쓸어 담듯 팔을 휘두르자, 수십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신형이 하늘로 떠올랐다.
“아아아아악!”
허공으로 떠오른 사람들은 팔을 버둥거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쾅-
“…….”
민성은 그의 앞에 떨어진 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괴상하게 목이 꺾여 몸을 꿈틀거리는 모습은 어딘가 기괴스럽기까지 했다.
“얼른, 얼른 앞으로 가!”
“빌어먹을, 얼른 앞으로 꺼지라고!”
사람들은 비명과 절규를 지르며 앞사람을 떠밀기 바빴다. 그러나 경계선에 가로막힌 대열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선 쪽에선 간헐적인 총성마저 들려왔다.
‘말리기 전에 얼른 내빼야겠어.’
생존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 저들의 처지가 딱하긴 했지만 도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민성은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의 틈새를 빠르게 통과하는 것. 변수가 생겼지만, 그의 속도라면 락 골렘을 통과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민성이 도주하려는 찰나,
띠링-
익숙한 알림소리가 들려왔다.
[현무검법 제2장 현무승천의 퀘스트 진행 요건을 달성하셨습니다.]
[강제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퀘스트란이 생성되었습니다.]
‘뭐야 이건?’
느닷없는 알림에 당황한 민성은 걸음을 멈추고 새로 뜬 메시지를 주목했다.
[현무승천]
내용: 북을 관장하는 현무. 현세에 있을 때 그는 오로지 냉정함과 비정함을 가진 괴수에 불과했다. 허나 그 냉정함 속에 티끌만 한 온기가 들어갔을 때, 그는 비로소 사후세계를 담당하는 신수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의 의지를 잇는 연자여. 그대의 마음속에도 그만한 온기가 존재하는가? 증명해보아라!
클리어 조건: 위험에 처한 인간 십만 명을 구하라.
보상: 현무검법 제2장 현무승천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 제공.
실패 시: 현무검법 소멸, ‘피에 젖은 충의의 길’ 사용 불가.
제한시간: 6개월.
현재까지 구한 인간: 0/100,000명
제한사항: 퀘스트는 오로지 현무검법의 계승자만이 이뤄낸 수치를 반영한다.
‘이건 뭐…….’
아무래도 그의 행위가 의도치 않게 퀘스트를 발동시킨 모양이었다. 민성은 퀘스트 내용을 빠르게 훑으며 혀를 내둘렀다. 갑자기 나타난 것은 둘째 치더라도, 퀘스트의 내용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내빼지 말라는 거 아냐!’
비정함과 냉철함을 가진 이로 좋게 포장해준 것뿐, 결론은 그러했다. 민성은 올라오는 욕지기를 삼키며 퀘스트란 하단을 주목했다.
‘이런 빌어먹을 경우를 봤나!’
하단 내용은 더욱 압권이었다. 사람 십만 명을 구하라는 것도 모자라 페널티까지 있었다. 검법의 소멸과 대검 사용 불가. 무조건 퀘스트를 진행하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라도 넉넉하게, 한 10년 정도 주든가!’
주어진 제한시간 6개월은 너무도 빠듯해 보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애검을 잃지 않으려면 무조건 퀘스트를 달성해야만 했다. 민성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퀘스트 창을 닫았다.
‘적합한 때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라네.’
‘아닌 것 같은데요.’
검마가 했던 말이 느닷없이 떠오르자 민성은 고개를 저었다.
“피해!”
“꺄아아아악!”
퍽-
“비켜! 새끼야! 뒤지려면 혼자 뒤져! 어딜 길을 막고 있어!”
겁에 질린 남자가 멍하니 서있던 민성을 거칠게 밀쳐냈다. 그리곤 인파를 뚫으며 화급히 경계선 방향으로 사라져갔다.
“저 새끼가…….”
“그어어어!”
민성은 그의 머리 위로 음영이 드리우자,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돌주먹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쯧. 아이템 창. 골렘의 굳건한 의지.”
민성이 작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쾅-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거대한 주먹이 그가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꺄아아악!”
“빨리! 빨리 가라고!”
그 모습에 사람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앞사람을 다그쳤다.
“그어?”
그러나 정작 민성을 내려찍은 락 골렘은 돌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뭔가 잘못됐다. 아까처럼 벌레들을 찍어 눌렀다고 생각했지만, 주먹에선 묘한 반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