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화 - 퍼지는 씨앗들. (5)
뒤편에 있는 붉은 철문과 정면에 위치한 검은 철문은 다시금 타워 안으로 들어왔음을 느끼게 했다. 민성은 두리번거리며 백색의 공간을 훑었다. 들어올 때마다 보였던 관리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명색이 지구를 관리한다는 양반인데, 이곳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있겠어?’
아마 이쪽 세상으로 흘러들어온 주민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민성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검은 철문 앞으로 이동했다. 상점 안으로 들어온 민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찬찬히 이동했다.
“먹으면 일정 확률로 랜덤한 스텟이 오르는 하프 포션 팝니다! 단돈 1,000코인!”
“이 배틀 액스로 말할 것 같으면…….”
예나 지금이나 상점 안은 들어찬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흠.’
민성은 좌판에 깔린 물건들을 구경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신기해 보이는 것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민성은 그 중 수상한 액체가 일렁이는 플라스크를 집어 들었다.
[하프 포션]
등급: ★★
설명: 미치광이 연금술사가 생활고에 시달려 만들어낸 포션.
효과: 복용 시 50% 확률로 랜덤한 스텟을 1 올려준다. 하지만 50% 확률로 체내에서 폭발한다.
‘이건 뭐…….’
효과를 확인한 민성은 혀를 내둘렀다. 스텟 1 올리자고 50%에 달하는 위험성을 감수할 손님이 있을까 싶었다. 민성이 다시 플라스크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물건 볼 줄 아십니다, 손님!
좌판의 주인으로 보이는 거대한 말이 발굽을 싹싹 비비며 그에게 다가왔다. 전신을 철갑으로 두른 그의 모습은 어딘가 위압감마저 들게 했다.
“이 물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스텟을 무려 1이나 상승시켜줍니다! 물론 약간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위험성은 감수하고도 남을 만한 물건입죠!
말은 발굽이 닳도록 발을 비비며 물약을 호평했다. 신명나게 설명할 때마다, 그의 콧구멍에선 작은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의 호객행위에도 민성은 고개를 저으며 물건을 내려놨다.
“위험성을 부담하기엔 가진 게 꽤 돼서요.”
“그렇습니까? 그럼 이건 어떠십…….”
좌판상은 급히 다른 물건을 집어 민성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하지만 민성은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곤 옆 좌판으로 이동했다.
‘어차피 코인도 없네요.’
“이런 망할……. 첫 손님부터 거지라니.”
좌판상의 씁쓸한 푸념이 들려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쓸데없는 언쟁을 벌이는 게 더 귀찮았다.
‘볼만한 건 다 본 것 같은데…….’
“많이 파세요.”
잠시간 이동하며 좌판들을 구경하던 민성은 좌판상에게 미소를 보이곤 숙였던 허리를 폈다. 좌판을 둘러보며 물건들을 살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점. 확률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었다. 그가 모르는 스킬과 아이템들도 무궁무진했다.
‘어떤 놈이 어떠한 아이템이나 스킬을 사용할지 모르니.’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정보를 수집하는 일. 앞으로 있을 전투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었다.
‘슬슬 7층으로 올라갈까.’
잠시간 이동하며 좌판들을 구경하던 민성은 발걸음을 상점의 중심부 쪽으로 옮겼다.
“하급 랜덤 스킬 상자 하나 주소!”
“저, 손님. 코인이 부족하신데요? 하급은 어려우실 거 같고, 아무래도 최하급으로 구매하셔야 할 것 같은데…….”
“뭐요? 코인이 부족하긴 왜 부족해! 분명 300코인이 있었구먼! 혹시 그쪽이 200코인 가져간 거 아냐? 엉?”
부산스러운 분위기 사이로 유독 커다란 음성이 들려오자, 민성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스킬 상자를 판매하는 기다란 카운터. 소리는 그쪽에서 들려온 듯했다. 여전히 직원들 앞은 결제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지만, 유독 한쪽 줄만 손님들이 빠지지 않고 있었다.
“예?”
앞내용을 듣진 못했으나, 어이없어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사태를 단숨에 이해시켰다. 돌아가는 대화 꼴을 미뤄봐선 진상이 분명했다.
“그쪽이 내 코인을 가져가고 모른 척하는 거 아니냐고!”
‘저것도 타 차원의 종족인가?’
민성은 눈살을 찌푸리고 목청을 높이는 손님을 주시했다. 생김새는 인간과 유사했으나 그 크기가 남달랐다. 육중한 크기와 우락부락한 몸이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무슨 장사를 이따위로 해! 주인 나오라 그래!”
거대한 괴인은 연신 소리 지르며 묵직한 주먹으로 카운터를 내려쳤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몸집만한 주먹이 눈앞을 오락가락했으나, 직원은 한결같은 미소를 유지했다.
“뭐? 여기서 이러시면?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불과 유황을 다루는 파티아 부족의 대족장, 잔티크를 모른다고?”
‘쯧쯧…….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저놈은 자기가 진상 짓 하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하여튼 생물 살아가는 방식은 다 똑같네, 똑같아.’
민성은 혀를 차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현실이나 타워나 진상이 있는 건 매한가지인 듯했다.
“얼른 네년의 주인을 불러라!”
‘좋아! 잘한다! 계속해!’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진상 짓 하는 거대한 괴인을 응원했다. 궁금했다. 상점의 규율을 어길 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상점. 차원전투에서 승리한 종족만이 누릴 수 있는 이권. 가지각색의 생물체들이 승리자라는 티켓을 거머쥐고 들어오는 곳이다. 게시판에 적힌 룰 덕인지는 몰라도, 그간 아무런 마찰도 없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손님……. 자꾸 그러시면…….”
점원은 입꼬리를 올린 채, 말을 흘렸다.
“네년에겐 관심 없다! 이곳의 주인을 불러라!”
직원이 겁을 먹고 말을 잃었다고 생각한 잔티크는 애꿎은 카운터를 계속 내려치며 우쭐거렸다.
“죽으시는데…….”
“그래! 얼른 네년 주인을……. 응?”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잔티크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죽으신다고요. 그러니 그쯤 하시는 게……. 아, 늦었네요.”
잔티크의 머리 위에 하얀 빛이 머무르자, 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
“쯧쯧…….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이래서 초보는 안 된다니까.”
“어리석은 만용 덕에 초심자 한 명이 또 가겠구나.”
그의 뒤에서 대기하던 손님들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일부는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다렸다. 민성도 그 중 하나였다.
‘어떻게 되려나. 이미 알고 있던 놈들도 꽤 되는 것 같은데. 아, 이제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는 건가?’
민성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점점 선명해져가는 빛을 바라봤다.
“젠장! 이 따위 빛! 없애버리겠다! 아니, 당장 네년의 주인에게 멈추라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아이템 창!”
잔티크는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워 해머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주저 없이 점원의 머리통에 휘둘렀다.
“어이구. 스스로 레드카드를 꺼내 드셨네.”
그러나 직원은 조소를 흘리며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으직-
“이런……. 끄아아악!”
동시에 빛 사이로 뼈 비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민성은 작게 입을 벌린 채, 잔티크를 쳐다봤다. 빛무리에 휩싸인 잔티크의 몸은 마치 알루미늄 캔 찌그러지듯 뭉개져갔다.
“안 돼……. 잘못……. 살려…….”
신체가 반쯤 구겨진 잔티크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허나, 누구도 그에게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으지직-
“살…….”
이윽고 육중했던 몸이 완전히 오그라들어 땅콩만 해지자, 그를 감싸던 빛무리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후……. 먹고 살기 힘드네.”
땅콩을 내려다보던 직원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땅콩을 집어 한편에 배치되어 있는 쓰레기통에 휙 던졌다.
“네, 다음 분 오세요.”
“최하급 상자로 하나 주세요.”
직원이 다시 카운터로 들어가자, 손님들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진열대로 다가갔다.
‘상점 규율을 어기면 저렇게 되는구나.’
꽤나 강력해 보였던 놈이 한순간에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돼버렸다. 민성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상점 안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전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채.
*
스르륵-
백색 원통이 열리자, 민성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곳은 언제 와도 한결같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곳, 상점의 7층. 걸음을 옮길 때마다, 퀴퀴한 먼지가 일어났다. 민성은 곧장 면전에 보이는 자판기로 이동했다.
‘가만 있자……. 어떤 걸 뽑아야 될까.’
민성은 자판기에 붙어 있는 종이를 노려봤다. 주머니에 1만이라는 숫자의 루비를 쟁여놨지만,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있다고 막 쓰면 알거지 되는 건 순식간이지.’
하지만 이성과 본성은 언제나 양극화 성향을 띠기 마련. 그의 생각과 달리 손바닥은 어느새 자판기 한쪽에 있는 손바닥 모양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품목을 선택해주십시오.”
‘그래, 첫 번째는…… 이거다!’
민성은 비어 있는 손을 들어 구석에 박혀 있던 번호 중 하나를 난타했다.
덜컹- 덜컹- 덜컹-
그러자 검은 상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판기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크…….”
상자들이 연이어 떨어지는 모습은 묘한 쾌감마저 들게 했다. 민성은 탄성을 지르며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어부의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상자들을 끄집어냈다.
‘VIP 포인트 달성은 못 한 건가?’
상자를 사면 으레 등장하던 메시지가 나오지 않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관심을 접은 민성은 고개를 돌렸다.
‘공짜도 좋지만 내 돈으로 구매하는 건 또 느낌이 다르지.’
민성은 상자들을 일렬로 깔아놓고 자태를 감상했다.
‘크……. 역시 이 맛에 돈 모으는 건가.’
마치 풍성한 잔칫상을 보는 듯했다.
“풍년이구나, 풍년이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왼쪽 것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열어볼까.’
그가 구매한 것은 랜덤 루비 스킬 상자, 10개였다. 어떤 스킬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잠시간 양손을 비비던 민성은 상자를 집어, 은빛 광채 위에 올려놨다.
‘제발 마나 좀 덜 잡아먹으면서 활용가치 높은 스킬 좀…….’
빛에 감싸인 상자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민성은 문뜩 불안감을 느꼈다.
‘아니지, 뭐가 나오든 좋으니까 빌어먹을 조각만 나오지 마라!’
기껏 힘들게 루비를 모아 구매했는데 그 결과가 조각이라면, 그것만큼 허탈한 일도 없을 것이었다.
“갸아아아아악! 또! 또! 조각이야! 빌어먹을!”
낡은 책 조각을 바닥에 내팽개치는 손님부터,
“제발요…….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그냥 스킬 하나 먹게 해주세요, 엉엉.”
개봉전인 상자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손님들까지.
‘젠장……. 하필 왜 지금…….’
불현듯, 7층에 오기 전에 본 광경들이 떠올랐다. 행운의 부적 역할을 하던 난글러스의 코라도 잡았더라면 불안감이 조금은 가셨을까.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펑-
‘가자!’
마침내 상자가 터지자 민성은 눈을 부릅뜨고 내용물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