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화 - 실화냐? (2)
“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 차를 버리고 급히 운전석을 나오는 사람들.
“다솔아! 얼른 아빠 등에 업혀!”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급히 도망치는 가족의 모습이 창문 옆으로 스쳐갔다.
탕- 탕-
묵직한 총성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런, 시발…….”
이건 진짜다. 꿈이나 환상 따위가 아니다. 남자도 급히 안전벨트를 풀고, 뛰어내리듯 운전석을 빠져나왔다.
“맙소사…….”
저 멀리 빌딩들이 서 있는 곳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차에서 올라오는 불길인지도 몰랐다.
“차라리 꿈이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어어어!”
“이런…… 시발!”
남자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등을 돌려 급히 질주하기 시작했다.
“비켜! 비키라고!”
하지만 도로를 꽉 채운 차들과 대거 빠져나온 사람들 덕에 피난길은 좁고 한정적이었다. 남자는 생존욕구에 따라 앞사람을 밀치며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어어!”
남자는 순식간에 덮쳐오는 그림자를 보곤 힐끗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바윗덩어리가 그가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
으직-
피난민 행렬을 덮친 기다란 팔에선 뼈 우그러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어지럽게 흩어진 차들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가던 민성은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크륵, 크륵.”
녹색 피부에 조잡한 무기. 게임에서나 보던 고블린같이 생긴 것들이 피난민들의 꽁무니를 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노는 저것들을 숲 고블린이라고 지칭했다. 뭉치면 어느 정도 능력을 발휘하지만, 개체 하나하나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들.
“저, 저것들은 도대체 뭐야!”
“도와주세요!”
뿐만 아니라 대로변과 도로 곳곳에서도 생존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제…… 제발 아이만은…….”
“으아아앙! 엄마!”
고개를 돌리자 7살 남짓한 남자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고블린 무리에 둘러싸인 걸 봐선, 아무래도 도망가다 엎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저 새끼들…….”
“지금은 다른 인간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인간!”
민성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티노는 그를 만류했다.
“알아요…….”
“설령 살린다고 한들 인간이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녀석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기껏 살려줬더니 목숨까지 책임지라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물론 바보 녀석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얘기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엄마 괴롭히지 마! 이 못생긴 놈들아!”
꼬마의 외침에 중요한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자 했던 마음이 흔들렸다.
“하아……. 어차피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도와줄게요.”
민성은 눈앞에 보이는 목적지를 흘낏 바라보곤 등을 돌렸다. 아주 잠시 몸을 피할 시간 정도는 벌어주고 싶었다.
“지금은 얼른 인간 편을 끌어 모으고 전력을 키워야 하건만……. 마음대로 해라, 인간. 응?”
티노는 불만스럽게 그의 의견을 표출했지만, 인간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크아아!”
사형을 선고하듯, 숲 고블린은 볼품없어 보이는 몽둥이를 높이 쳐들었다.
“한준아!”
“아아악!”
챙-
재빨리 그들 사이로 파고 들어간 민성은 대검을 쳐들어 아이의 머리로 향하던 몽둥이를 가볍게 막아냈다. 그리곤 곧장 고블린의 몸에 검신을 쑤셔 박으려다 멈칫했다. 아이 앞에서 살인을 해도 되나 싶었다.
“키익!”
“쩝…….”
그 틈을 이용해 놈들은 재빨리 거리를 벌리고 그를 경계했다.
‘힘은 없어도 잔대가리는 잘 굴리는 종족이라더니.’
민성은 티노가 알려준 정보를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크아아아!”
민성은 그를 노려보며 울부짖는 숲 고블린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갈 거니까 기다려.”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민성은 놈들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훅-
“키익!”
놈들이 들고 있는 단소 같은 물건에서 다트들이 쏟아져 나왔다.
“느린 걸 쓰네.”
민성은 히죽이며 대검을 횡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키익?”
다트들이 전기 채에 닿은 모기마냥 맥없이 떨어져 나가자 놈들은 몸을 흠칫거렸다.
“뭘 놀라. 이제 시작인데.”
‘키가 작으니까 몸보단 머리를 노리는 게 낫겠지.’
민성은 이죽거리며 순식간에 놈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곤 대검을 낮고 빠르게 휘둘렀다.
툭- 툭-
민성의 대검이 움직일 때마다, 고통에 일그러진 고블린들의 머리통이 하늘로 솟구쳤다.
“키익!”
일부 놈들이 몽둥이나 녹슨 검 따위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툭-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기적을 맛봐야만 했다.
“풍년이구나!”
흥이 오른 민성은 과일 수확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대검을 휘둘렀다.
“키이……이익!”
삽시간에 몇십 마리에 달하는 일족이 죽어나가자, 놈들은 주춤거리며 몸을 뒤로 내빼기 시작했다.
“키이익!”
그리곤 이내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의 고블린들이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모습은 나름 장관이었다.
“와…….”
“그르륵…….”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간들과 저쪽 세계의 주민들은 감탄과 경계심을 보냈다.
‘후…….’
민성은 남아 있는 주민들에게 다가오면 죽이겠다는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민성은 힘없이 감사를 표하는 그녀의 다리를 슬쩍 내려다봤다. 종아리 부근에는 자그마한 다트가 박혀 있었다.
“엄마! 나 이 형 알아! 인터넷에서 봤어! 고간 킬러야!”
민성의 얼굴을 알아본 아이는 엄마의 소매를 흔들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놈의……. 그냥 쓸 걸 그랬나.’
난리 통인 상황에선 맨 얼굴이 더 움직이기 좋았던 탓에 인피면구는 벗어놓은 지 오래였다.
‘그나저나 그 난리 통을 보고도 이런 반응을…….’
나중에 큰 거목이 될 떡잎 같았다.
“일어날 수 있습니까?”
민성은 여인을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일어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일 테니까.
“네……. 으…….”
여인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다리를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다리에 박혀 있는 다트가 움직이는 데 걸림돌인 모양이었다.
“형이 도와주면 안 돼요? 형은 영웅이잖아요!”
하지만 민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등을 돌렸다. 그는 영웅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 중 하나일 뿐.
“으으……!”
“거기 총각! 좀 도와줘요! 차 안에 우리 아들이 있다고요, 제발!”
“여기! 여기! 부상자가 있어!”
그의 활약상을 지켜본 사람들은 민성을 부르짖으며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민성은 그런 이들을 무시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 시발 새끼야! 도와달라고! 그런 힘이 있으면 좀 도와줘도 되는 거잖아!”
“흑흑흑…….”
민성은 이맛살을 좁히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높여 목적지로 질주했다.
“거봐라, 인간.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버섯이 생긴다!”
어느새 날아와 옆에 달라붙은 티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알아요. 단지…….”
“단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아직은 저도 인간이라는 걸.”
민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내달렸다.
“와……. 하늘 좀 봐요.”
진우는 가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시꺼메진 하늘을 가리켰다. 먹구름과는 다른 종류의 거뭇함이었다. 낮 시간대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태평해질 수 있니?
옆으로 다가온 지혜는 그를 타박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에서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저 멀리서 산 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광경이 이러할진대, 다른 곳은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도대체 저것들은 뭘까?”
지혜는 도로변을 돌아다니는 괴이한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몸서리쳤다. 끔찍하다. 도로는 이미 통제 불능이 됐고, 사람들은 저 괴이한 생명체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게에 틀어박혀 상황을 지켜보는 일뿐.
“지금이라도 나가야 돼! 도망가야 한다고!”
“어디! 어디로 도망갈 건데? 빌딩 입구에서 서성이는 놈들 못 봤어? 그 기다란 천을 두르고 있는 귀신같은 놈들 못 봤냐고! 막무가내로 도망가자는 소리만 하지 말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보라고!”
“뭐? 너 몇 살이야, 인마!”
지혜는 가게 한쪽에서 격렬한 의견대립을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점장님은 그런 그들을 말리며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게 노력하고 계셨다.
“살려줘! 끄아아악!”
또 다시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지혜는 떨리는 팔을 꽉 움켜잡았다. 의연한 척하고 있을 뿐, 속은 타들어가다 못해 재가 돼버렸다. 가족들은 무사한지 걱정됐다.
“하아…….”
똑- 똑-
“꺄아악!”
지혜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작은 울림에 기겁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엔 이내 반가운 미소가 걸렸다.
“뭐, 뭐야! 민성아!”
“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언쟁을 구경하던 진우도 급히 고개를 돌렸다. 창틀에 매달려 미소 짓는 민성이 보였다.
“형!”
“세상에……. 세상에……. 여긴 어떻게 올라왔어!”
3층 높이에, 무엇 하나 잡고 올라올 것 없는 매끈한 빌딩이었다.
“누나. 문 좀 열어주세요.”
“아차차! 잠시만! 세상에…….”
지혜는 호들갑 떨며 급히 창문을 열곤, 민성을 도와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읏차.”
그러나 민성은 팔목에 힘을 실어 그대로 창문을 넘었다.
“오랜만이에요. 잘들 지내셨죠?”
민성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아니, 그것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거야! 밑에 깔려 있는 놈들 못 봤니?”
“봤죠. 그래도 제가 좀 빠른 편이라…….”
날선 그녀의 목소리에 민성은 뒷목을 긁적였다.
“하아…….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형! 연락 좀 하시라니까…….”
“미안. 그간 일이 좀 많았어.”
가볍게 해후를 나눈 민성은 가게 내부를 살폈다.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왔어? 도망갈 길이 마땅치 않았구나?”
지혜는 후줄근한 민성의 옷차림을 보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여러분을 데리러 왔어요.”
“어?”
뜬금없는 민성의 말에 지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성은 짧고 간략하게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우리가 외계인의 침략이라도 받았다는 소리야? 하지만 침략이라면 이미 타워가…….”
지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타워 속의 전투도 엄연히 다른 차원의 침략을 방어하는 전투였으니 말이다.
“뭐……. 비슷해요. 다만 타워에서 현실로, 범위가 더 확장된 것 같아요.”
민성의 씁쓸한 미소에 지혜와 진우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해갔다. 이해는 갔다. 가게만 탈출하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이 무너져 내린 탓일 것이다.
“큰일이구나. 그럼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갈 길은 없는 거니?”
윤민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민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워낙 갑작스러운 이변이라…….”
“그렇구나……. 그래도 이렇게 살아서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구나.”
민성이 말꼬리를 흘리자, 점장은 힘없는 웃음을 보이면서도 민성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래……. 지능이 부족한 놈들 같으니까 건물로 올라오진 않겠고. 가게에는 식료품도 많으니 당분간 버티기엔 충분하겠지.”
점장은 여전히 다투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예측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방법 말고도 도망갈 방법은 있어요.”
“아끼고 아끼면 대략 한 달……. 뭐?”
느닷없는 민성의 발언에 윤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민성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