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136화 - 변혁의 시작 (10)
와장창-
“진정하세요, 회장님. 보는 눈이 많잖아요.”
남자는 발광하는 여인의 손목을 능숙하게 붙잡고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또 어떤 놈이 우리 회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요?
“후……
달콤한 속삭임 덕인지, 여인은 난동을 멈추고 거칠어진 숨을 뱉어냈다.
“정 비서……. 또 못난 모습을 보여줘 버렸네.”
“괜찮아요. 저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도 사랑스러워 보이니까.”
“정 비서…….”
여인의 눈빛이 부드러워지자, 정 비서는 그녀를 슬쩍 떼어놓고 수트를 매만졌다. 그리곤 공손하고 격식 있는 자세를 갖추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또 누구입니까?”
“아들.”
“아들……. 아!”
낮게 중얼거린 정비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외주 주신다더니, 놈이 실패했나 봅니다.”
“실패했으니, 그 새끼가 내 방으로 왔겠지?”
“예?”
남자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안위를 살피는 듯한 모습에 박 회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그래도 다친 곳은 없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당장 방을 옮기고, 경비를 더 강화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이번에는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비장하기까지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박 회장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또 도망가게 만들면 그땐 정말 화낼 거야.”
“감사합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서진 테이블 서랍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다행히도 대검의 궤도를 피해갔는지 상태는 양호했다.
“그리고 불 좀 줘.”
부서져 활짝 열린 문을 힐끗 바라본 남자는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그녀가 담배를 집었다는 것은, 사무적인 대화를 종료하자는 뜻이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전, 사람들을 물려놓은 터라 복도는 공허하고 조용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건강에 해로워요. 무병장수하시려 식사도 신선한 것들만 챙겨 드시는 분이.”
남자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항상 말하지만 담배에 관해선 터치하지 말라고 했어.”
하지만 그의 잔소리가 싫지 않았는지, 그녀는 눈웃음치며 그의 품에 안겼다.
“얼른 처리할게요.”
“기왕이면 생포해서 데려와줘. 죽이는 것만으로는 분이 안 풀릴 것 같아. 아, 그리고 전부 중무장해서 데려가. 자기가 죽으면 그땐 진짜 미칠지도 몰라.”
그녀의 투정 아닌 투정에 정 비서의 입가에는 나지막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안위를 챙기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나 오늘 기분 상했으니까, 이따가 달래주러 찾아오는 것도 잊지 말고.”
뾰로통한 그녀의 목소리에 정 비서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속이 다 후련하네.’
‘비밀스러운 집’으로 돌아온 민성은 침대에 몸을 던지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시작에 불과했다. 아직 되갚아줘야 할 일이 많았다.
‘만약 정말 내 납치 건에 그년이 개입돼 있다면…….’
사건의 화살표는 전부 그녀가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듯했다. 하지만 민성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까진 의심일 뿐,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와 아버지의 부재를 틈타 회사를 꿀떡 삼킨 그녀의 행보 탓에, 더욱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그 짓거리에 대한 대가도 치르게 해야 하지만…….’
의심이 확신이 되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더욱이 아버지가 사랑해서 재혼까지 결심하게 만든 여자.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섣불리 죽였다가 훗날 하늘에서 아버지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민성은 매서운 눈초리로 천장을 지그시 응시했다. 조만간 자각사에 들러 확보한 정보가 있나 확인하러 가야 할 듯했다.
“인……!”
그때, 저 멀리서 작은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던 찰나,
“인간!”
집 벽을 뚫고 들어온 티노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그에게 날아왔다.
“오오! 공룡……. 컥.”
간만의 재회에 민성은 두 팔까지 벌리고 환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녀석의 꼬리치기뿐이었다.
“인간! 내가 친히 인간을 위해서 힘겹게 날아왔건만,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다니!”
“아뇨, 조금 전만 해도, 아, 잠깐만요!”
“시끄럽다!”
민성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티노는 꼬리로 연신 민성의 머리를 두들겼다.
“아니, 진짜!”
잠시 후, 민성이 그간 있었던 일을 압축하여 설명하자,
“그럼 미리 말을 하지 그랬나, 인간? 혹시 못 본 사이에 머리가 다시 굳은 것 아닌가?”
오히려 티노는 크게 호통 치며 다시금 그의 머리를 두들겼다.
“제가 말을 말아야죠. 그나저나 여기는 바깥도 아닌데 어떻게 오신 거예요?”
민성은 날아오는 꼬리를 기민하게 피하면서도 의문을 표현했다.
이곳은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공간, ‘비밀스러운 집’이었다. 헌데 열쇠도 없는 티노가 이리 자연스럽게 들어오니 괜한 걱정이 들었다.
‘이거 설마 나도 모르는 곳에 비상출구라도 뚫려 있는 것 아냐?’
하지만 민성의 의심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했다.
“옛날에 내 뼛조각을 먹은 자 곁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티노는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까딱거리더니,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다시금 꼬리를 높이 세웠다.
“아까는 날아오셨다고…….”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인간!”
“아, 좀!”
재차 녀석의 꼬리가 머리로 날아오자, 민성은 낮게 소리치며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짜식. 그래도 돌아와 줘서 고맙다.’
하지만 연신 가격당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따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항복 선언으로 감격적인 해후시간이 종료되자, 민성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으며 티노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이렇게 갑자기 돌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그간 무슨 일 있었어요?”
많이 급해 보였던 티노의 모습은 사뭇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음…….”
티노는 곧 무거운 안색을 띤 채, 민성과 합류하기 전까지 봤던 일들을 차근차근 알려줬다.
“……그래서 내가 급하게 온 거다, 인간.”
“…….”
할 말을 잃은 민성은 눈앞의 작은 공룡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를 생각해준 녀석의 마음 씀씀이는 고마웠으나, 당황스럽다기보다는 어이없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그러니까 티노 님의 말씀대로라면 저희 세계와 티노 님의 세계를 가로막는 벽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그 안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저희 세계에 넘어오는 중이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 원숭이 같은 놈들…….”
민성은 구름원숭이를 떠올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이던 티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화를 지속해 나갔다.
“희한하게도 서쪽 벽만 터진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인간. 어떤 멍청한 놈이 벽에 미사일을 갈겼는지는 몰라도,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다.”
티노는 씩씩거리며 분을 토해냈다.
“왜요? 티노 님의 말씀대로라면 주민들 입장에선 오히려 좋은 거 아니에요? 어찌 됐건 계속 갇혀 있다가 마침내 나올 수 있게 된 거니까요.”
“……그런 건가?”
티노는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으이구, 돌머리는 한결같네.’
녀석의 얼빠진 모습에, 민성은 피식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과 그쪽 세계의 주민들이 공존할 수 있을까?’
싸우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불가였다. 버섯 안에서 겪은 녀석들과의 수많은 사투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설령 놈들이 평화적으로 나온다 해도 인간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인간은 자기보다 나은 존재를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까.’
지금이야 우호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 능력자들을 탄압했던 꼴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른 것 같았다.
“하아…….”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음……. 아닌가?”
민성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티노를 바라봤다. 솔직히 티노가 한 소리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민성은 녀석의 말을 믿었다. 전투에서 함께 쌓아올린 신뢰는 그만큼 컸다.
‘만약 싸우게 되면 누가 이기려나?’
현대문물로 무장한 인간. 괴이한 능력을 사용하는 그쪽 세계의 주민들. 양측이 싸울 경우를 예상해봐도 쉽사리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설마 던전 탐사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니겠지?’
시기가 겹친 건 단순한 우연일 것이었다.
‘후……. 지금 그게 중요한가?’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다가올 일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주민들이 넘어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5일에서 7일 정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찾아올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추가로 루비를 보급해야만 했다.
“어렵군……. 어려워…….”
“티노 님!”
민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직도 중얼거리는 티노를 불렀다.
“음? 갑자기 왜 그러나, 인간?”
“지금부터 버섯을 찾으러 다닐 건데 도와주실 수 있어요? 요즘 통 찾아보기가 어려워서, 위대하신 분의 조력이 있다면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만 인간이 못 찾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보이는 족족 먹어치웠으니 당연히 없을 수밖에. 케케케케케.”
“……예?”
민성이 눈을 치켜뜨자, 티노는 호탕하게 웃으며 몸을 공중에 띄웠다.
“걱정 마라, 인간! 그래도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버섯이 잔뜩 자라나는 걸 봤다. 얼른 가자!”
티노의 말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 민성은 슬쩍 들었던 두 팔을 슬며시 내렸다.
“아참. 그리고 인간.”
문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갑자기 녀석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무거운 안색을 띠었다.
“네?”
민성은 긴장한 표정으로 티노를 바라봤다.
“아직도 TV는 마련하지 않은 건가?”
“…….”
민성의 팔이 다시금 천천히 올라갔다.
*
5일 뒤,
슉-
“후아…….”
도심지로 돌아온 민성은 길게 숨을 뱉어냈다. 이로써 또 하나의 버섯을 클리어했다.
“이제 좀 쉬자, 인간.”
“저도 이제 움직일 힘도 없네요.”
민성은 티노의 말에 동의하며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해 받아들곤 쓰러지듯 테이블에 엎드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많아졌지?’
티노의 말대로 그가 수색할 때는 찾아볼 수 없었던 버섯들이 천지에 깔려 있었다. 그 덕에 민성은 지난 5일간 강행군을 펼쳐야만 했다. 워낙 수많은 버섯을 거쳤기에, 어떤 게임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5일간 벌어들인 루비가 10,000개였으니 만족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기억에 남은 거라곤, ‘네 운을 걸고 달려라’ 정도인가.’
매 회마다 랜덤으로 변경되는 트랙에서 미친 듯이 달리는 게임이었다. 달리다 보면 간간히 아이템이 담긴 박스를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 경쟁자들을 죽이거나 제압할 수 있었다.
‘3위까지만 생존시킬 줄은 몰랐지.’
극악의 생존율 탓에 목숨 걸고 뛰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물론 버섯을 클리어하는 와중에 만복 노인이나 계모의 보복행위도 염두에 두고 움직였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들은 잠잠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노물이랑 미친년이니…….’
언제, 어디서 허를 찌를지 모를 인물들이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그나저나 티노 님.”
“음? 무슨 일인가, 인간?”
지친 기색이 완연해 보이는 티노는 귀찮다는 듯 꼬리를 휘저었다.
“정말 놈들이 오긴 하는 거예요?”
지난 5일간 녀석이 말한 주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민성은 커피를 홀짝이며 장난이 섞인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설마 내 말을 의심하는 건가, 인간?”
“당연히 그건 아니죠.”
녀석이 발끈하자, 민성은 잽싸게 손사래 치며 사과했다.
“저 사람 미쳤나 봐?”
“쉿! 보지 마! 괜히 시비 걸지도 몰라. 원래 미친놈들이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더 무섭다고 하잖아.”
‘응? 아차차…….’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민성은 얼른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 정도 준비했으면 충분하겠죠?”
“앞날은 그 누구도 모르는 거다, 인간.”
티노의 무덤덤한 반응에 민성은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럴 때는 또 현자 같기도 하고…….’
민성이 재차 커피 잔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후드득-
카페 창문 너머로 작은 돌덩이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뭐지?’
민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주시했다.
“꺄아아악!”
“미친! 저게 뭐야!”
조금 전까지 활기 넘쳤던 거리는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무슨 일이……. 설마?’
민성은 재빨리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맙소사…….”
민성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지옥의 전초, 1월 29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