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화 - 변혁의 시작 (5)
“도대체 어떤 놈이 어린 아이들을 투입시켰나 했더니, 회장님이 보내신 겁니까?”
“보기보단 꽤 유능한 이들일세.”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저희 뒤에 숨어 있었던 겁니까?”
김도진의 비아냥거림에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활잡이 청년은 좀 쓸 만하더군요. 하지만 이상한 새를 다루던 처자는 내내 패닉 상태였습니다. 대검을 들고 있던 청년은 보이지도 않았고요. 그런데도 유능하다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잠깐……. 대검을 든 청년이 보이지 않았다고?”
노인의 물음에 김도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인에게 불만은 많았지만, 어쨌건 고용주에게 진행여부와 결과를 알리는 것 역시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보스가 등장한 궁궐 안에 들어간 이후로 저희도 망자 새끼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아, 대신…….”
잠시 말을 멈춘 김도진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청년과 똑같이 생긴 대검을 쓰던 남자는 있었습니다.”
“음? 같은 사람은 아니었나?”
노인은 눈을 빛내며 김도진의 답을 기다렸다.
“아닙니다. 못해도 50대는 돼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대검으로 망자들을 찢어 놓을 때는, 희열마저 느껴지더군요. 어쨌든 그 사람 덕에 전멸을 면했죠.”
“그래서, 그 남자가 유물을 챙긴 건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보스랑 뭔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곧 저희는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그것이 김도진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흠…….”
상념에서 깨어난 노인은 잠시간 턱에 손을 괴곤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이내 책상 한쪽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래. 그 민성이라는 놈 휴대폰에 위치 추적기 붙였었지? 얘들 몇 보내서 밀착감시 시켜. 그래, 그리고 놈의 동료랑 좀 전에 나간 놈들 전부 인원 붙여. 어디 사는지, 뭘 먹고 마시는지, 어떠한 스킬을 사용하는지, 최근에 얻은 스킬은 뭔지.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해와!”
노인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
“푸하하하! 등신.”
민성은 침대를 뒹굴며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침대 한쪽에 던졌다. 그리곤 이내 입을 씰룩이더니 미친 듯 폭소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돈을 들인 만큼, 나름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유물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말에 감추지 못한 그 허탈감이란. 한 방 먹여줬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에서 뿌듯함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이템 창.”
민성은 겨우 웃음을 멈추곤, 아이템 창을 열어 투박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옥함을 꺼내들었다.
‘도대체 이게 뭐기에 놈들이 그렇게 원했던 걸까? 설마 어마어마한 스킬이나 아이템이?’
민성은 도주하기 직전까지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광해군을 쏘아보던 카일을 떠올렸다. 비단 혈교 놈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놈들의 반응을 떠올린 민성은 곧 탐욕적인 자세로 옥함을 살피기 시작했다. 뭔지는 몰라도 상자 안에서 대박의 냄새가 물신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역시 이쪽이 입구 부분이겠지?’
잠시간 옥함을 돌려보던 민성은, 옥함 정면의 중앙에 있는 작은 버튼을 발견했다. 민성은 마른침을 한 번 꿀떡 삼키곤 버튼에 손가락을 뻗었다.
딸칵-
그러자 옥함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작은 틈이 생겼다. 민성은 틈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옥함의 뚜껑을 열어 젖혔다.
‘응?’
그의 기대와 달리 옥함 안에는, 빨간 포장에 둘러싸인 작은 열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멀뚱히 열쇠를 내려다보던 민성은 뒷목을 긁적이며 열쇠를 집어 들었다.
[이름 모를 열쇠]
등급: ?
설명: ?
효과: ?
횟수제한: 1/1
‘이건 뭐…….’
설명을 확인한 민성은 멍한 표정으로 열쇠를 바라봤다. 검지만 한 크기에 튀어나온 마디마다 녹까지 슬어 있는 허름한 열쇠. 기대를 처참히 무너뜨리는 보상이었다. 백번 이해해 외관이야 그렇다 쳐도, 설명이 없으니 아무리 살펴도 도무지 사용법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하아……. 내가 이런 걸 얻으려고 그 고생을 한 게 아닌데.”
열쇠를 만지작거리던 민성은 푸념하듯 중얼거리며 열쇠를 아이템 창에 넣었다.
‘후……. 그래도 어딘가 쓸 곳이 있긴 하겠지.’
그러니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것을 원하지 않았나 싶었다. 애써 실망한 마음을 가다듬은 뒤, 민성은 아이템 창을 찬찬히 살폈다. 간만에 여유가 생겼으니, 이참에 정리할 것은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놈의 조각들은 진짜.’
민성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조각들을 보며 혀를 찼다. 하나하나 내재된 스킬들은 좋을지 몰라도, 조각 그 자체는 아이템 칸만 잡아먹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었기에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알’과 ‘이빨 빠진 도끼’를 확인한 민성은, 그 중 알을 꺼내 조심스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선 도대체 뭐가 나오려나.’
화염을 머금은 우드 플랜트, 그리고 완전히 미친 머드 가고일의 아름다운 희생으로 이루어진 완성작. 여전히 1년에 가깝게 남은 대기시간은 마음 아팠지만,
‘루비만 모으면 모든 게 해결될 일이지.’
민성은 히죽이며 새하얀 알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6성짜리니 뭐가 나오든 꽤나 유용하게 쓰일 것이었다. 결말이 찝찝하긴 했지만, 어제 사용했던 수옥만 봐도 대략적인 윤곽이 나왔다. 물론 궁궐 안에 있던 터라, 스킬의 정확한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다음에는 바닷가라도 가서 제대로 된 실험을 벌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루비……. 또 루비인가.”
잠시간 홀린 듯 알을 쓰다듬던 민성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로 알을 넣었다. 상점에서 사용할 것과, 농장에서 자라고 있을 영겁나무의 성장까지 생각하면 루비의 추가보급이 절실했다.
‘적어도 한 번 사는 인생, 을질만 당할 순 없지.’
민성은 어제 있었던 전투를 떠올리곤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
창문을 가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널따란 내부를 비춘다. 하지만 방 크기와 다르게 내부에는 가죽으로 된 의자와, 업무를 볼 수 있는 책상이 자리했다.
딸칵-
누군가가 문을 열고 적막한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인물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중년에 가까운 여인은 나이가 무색하다 느껴질 정도로 고혹적인 미모를 갖고 있었다.
“…….”
가죽의자에 푹 파묻혀 있던 여인은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얼굴에 새겨진 작은 칼자국이 남자의 미모를 가리고 있었다.
“앉아.”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예. 그런데 어쩐 일로……. 회장님 것은 항상 최상급으로만 보내드렸습니다만…….”
남자는 여인의 눈치를 살피며 엉덩이를 소파에 맞댔다.
“발주 건 때문에 부른 건 아니야.”
여인의 말에 남자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와 거래하는 고객들 중 가장 큰 손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했을 때, 함부로 입을 놀리거나 불손한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는 그저 먹이를 갖고 오는 벌레에 불과했으니까. 다행히도 상품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남자는 풀리는 긴장의 끈을 꽉 조여 매고 여인을 응시했다.
“그럼 어쩐 일로 부르신 건지……?”
“복귀했대. 알지? 작업할 때 머리는 깔끔하게 해서 나한테 보내줘.”
여인은 오만한 눈빛으로 남자를 보며, 나가보라는 듯 작게 손짓했다.
“……누굴 말입니까?”
남자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멍청하긴! 누구겠어!”
“죄…… 죄송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먹어?’
여인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자, 남자는 심히 죄송스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아들.”
“저번에 보여주셨던 그 사진 속의 고등학생입니까?”
“그래. 근데 옛날 사진이니, 이걸 참조해.”
여인이 종이 한 장을 건네자, 남자는 두 손으로 공손히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종이 속의 인물을 보곤 두 눈이 커다래졌다.
“이…… 이놈은!”
남자는 종이 한쪽에 걸린 뻔뻔해 보이는 얼굴을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왜?”
“아……. 아닙니다.”
여인의 물음에, 남자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종이를 꽉 움켜쥐었다.
현상수배범
이름: 강민성
생년월일: 940218
죄목: 다른 범죄자들과 작당해 수많은 일반인들을 살해한 혐의. 이능력자 대책부의 요원 수십 명을 무참히 살해한 혐의. 안전지대 인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을 자행한 범죄자.
등급: 특급
특이점: 가방이 넓다. 대검을 사용하며 몸이 단단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다.
현상금: 2,000,000,000원
대지진 이후로 놓친 놈. 그 역시 수배서가 돌고 나서 그를 찾느라 혈안이 됐지만, 놈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헌데 놈이 박 회장의 아들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머리는 남겨와. 머리를 보면서 와인 한잔하고 싶으니까 말이야. 알았지?”
여인의 명령에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히려 그가 원하는 바였다.
‘이 새끼 때문에 며칠 동안 잠 못 든 걸 생각하면…….’
조각상 안의 USB. 주요 고객들의 정보가 담긴 자료이자 그들의 목숨줄인 그것을 빼앗기고 불면증에 시달린 걸 생각하면 머리를 분리하는 것도 부족하다. 지금도 자다가 번뜩 잠에서 깨곤 했다.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남자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보이곤 등을 돌렸다.
“아참, 그리고 이거.”
여인의 말에 남자는 다시 등을 돌렸다. 그리곤 날아오는 작은 물체를 받아들었다.
“이건…….”
“발신기야. 그게 있으면 추적하기 한결 수월하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남자는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발신기를 꽉 쥐었다. 그리곤 재차 공손히 인사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아들이랑 와인 한잔할 수 있겠네.”
여인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올려놓은 수배서를 지그시 바라봤다.
*
‘후…… 춥다.’
비밀스러운 집을 나온 민성은 새롭게 꺼낸 파카를 여미며 문 밖으로 나왔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인피면구를 착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이동장소로 선택한 곳은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명동거리였다.
‘오늘은 고생을 한 나에게 상을 주는 날이지.’
물론 식사 외에도 떨어진 식자재와 옷가지 등,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밥이 우선이었다. 민성은 사전에 핸드폰으로 파악해 둔 맛집을 탐색하며 길거리를 헤맸다.
“자기야! 저것 좀 봐! 랍스타야, 랍스타!”
“정말? 완전 맛있겠다!”
여전히 사람이 많은 동네였다. 일상적인 사회로 돌아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가끔은 괜한 괴리감마저 들기도 했다.
‘이미 난 저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건 아닐까?’
점심 시간대라 그런지 북적이는 커플무리를 보던 민성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에 이 여유로운 일상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는 편이 이득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