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화 - 변혁의 시작 (4)
“감사해요…….”
아루 역시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답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마침내 일행들이 전부 동의하자, 민성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잖아요?”
민성은 이신에게 슬쩍 미소 지어 보이곤 미리 봐두었던 남자 화장실로 다가갔다. 그리곤 문고리 중심에 자리한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잠시 후, 민성은 커다란 박스 2개를 들고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건……?”
일행들은 느닷없는 민성의 기행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으차.”
민성은 대답 대신 박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내용물이 꽤나 묵직했는지, 작게 쿵 소리가 났다.
“5만 원 권 만든 사람한테 감사해야겠어요.”
민성은 웃으며 박스를 슬쩍 열어보였다. 안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지폐다발들이 한가득했다.
“도대체 이건 어디서…….”
“제가 아이템 창이 좀 널널해서. 어쨌든 묶음당 100장이고, 총 200묶음. 박스당 10억이에요. 확인해보세요.”
“괜찮다. 믿는다.”
이신은 괜찮다는 듯 박스를 번쩍 들었다. 그리곤 민성을 힐끔 바라봤다.
“액수가 크다. 먼저 복귀.”
“그러세요. 아루 씨도요.”
민성은 권유하듯 박스를 가리켰다.
아루는 박스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박스를 들고 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
“크록!”
잠시 뒤, 여자 화장실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빈손이 된 아루가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크로스의 입. 창고로도 쓰거든요.”
“…….”
‘공격용이 아니라 짐꾼이었어?’
크로스의 입 밑에 달린 주머니를 떠올린 민성은 괴조에 대한 정보를 수정해야만 했다. 민성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매장 한편에 걸린 전자시계를 살폈다. 시간은 이미 새벽을 넘어 아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크흠, 어쨌든 결산도 끝냈고, 일도 전부 끝냈으니 오늘은 모두들 돌아가서 푹 쉬세요.”
다들 말은 않고 있었어도, 볼까지 내려온 짙은 피로감이 얼른 이 모임을 파하자고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듯했다. 일행들 역시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일행들과 함께 카페를 나온 민성은 그들을 태운 택시의 뒷문을 닫아주었다.
스르륵-
이신이 창문을 빼꼼 열고 손을 흔드는 민성을 바라봤다.
“너는?”
“두 분은 가는 길이 같으시잖아요. 저도 금방 택시 타고 갈 거예요.”
“조심.”
“네, 조심히 들어가요.”
민성은 금세 멀어져가는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사라지자, 민성은 희미하게나마 유지하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아직 전부 끝난 건 아니지.’
그리곤 불 꺼진 핸드폰 가게 앞으로 다가가 열쇠를 꽂고 돌렸다. 거짓말처럼 문이 열리고 안에서 빛이 나오자, 민성은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스러운 집으로 돌아온 민성은 공터를 지나 곧장 그럴듯한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화분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허브향이 코끝을 자극해왔다.
“냥냥냥냥! 싱싱한 주인 다시 돌아왔다!”
시바의 들뜬 냥냥거림이 들려오자, 민성은 고개를 쳐들었다. 벽에 처박혀 있는 고양이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연신 콧수염을 씰룩이며 그의 귀환을 반겼다.
“아까도 봤으면서 그래요?”
해맑은 녀석의 모습에 민성은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냥냥냥냥! 주인의 무사귀환은 언제나 즐겁다!”
‘짜식……. 몸이 없으니 캣 타워는 힘들 거 같고, 고급사료나 잔뜩 사다줘야겠어.’
사소한 한마디였지만, 괜스레 감동을 느낀 민성은 녀석의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어주곤 침실로 사용하던 방으로 이동했다. 방의 부록처럼 딸려 있는 세면실에서 한껏 온수를 만끽한 민성은, 포근해 보이는 하얀 침대로 몸을 던졌다. 이불까지 뒤집어쓰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좋다.”
민성은 베개에 반쯤 젖은 머리를 비비며 작게 중얼거렸다. 머무를 집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것 같았다. 거기다 그 누구의 통제도, 참견도 받지 않는, 오로지 그만을 위한 집.
‘일어나면 만복 노인과의 일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비보도 내일…….’
피곤에 절어 있던 민성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여파도 알지 못한 채.
*
삐리리리-
“끙…….”
베개 옆에 놓인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자, 민성은 반쯤 감긴 눈을 부비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뭐야.”
하지만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으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알람이 멈췄다.
‘뭔데.’
민성은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살폈다. 부재중 전화 15통. 번호를 확인하니 만복 노인의 것이었다.
삐리리리-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민성은 몇 차례 알람을 흘린 뒤,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 했었지만…….’
민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의 시계를 힐끗 살폈다. 오전 10시.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복귀시간을 감안하면 상당히 조급한 연락이었다.
“여보세요?”
“허허, 전화를 통 받지 않아 무슨 변고라도 당했나 했는데, 다행이군. 무사히 복귀한 것을 축하하네.
능글거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성은 전화기에 전달되지 않을 크기로 비웃음을 흘렸다. 노인의 목적은 얼추 짐작이 갔다.
비보의 획득 유무.
노인의 지대한 관심사이자 아침부터 그에게 전화한 이유일 것이었다.
“네. 염려해주신 덕에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공사다망하신 분이 아침부터 전화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16통씩이나 말입니다.”
“허허…….”
전화기에선 잠시간 노인의 소박한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향후 우리 빅스의 주역이자 중추가 될 사람인데,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놈이 통수를 쳐?’
재차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민성 역시 그를 따라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와 달리 민성의 눈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번 던전 탐사를 갔을 때, 용병들이 저와 일행이 합류한다는 것에 대해 전혀 언질을 받지 못한 것 같던데…….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성은 차분하고도 냉철한 어투로 그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노인은 짐짓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것 참……. 안 될 사람들이군그래. 분명 내 그들에게 자네들이 합류한다고 미리 얘기까지 했건만. 대신 용서를 구하겠네.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어차피 용병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질문해본 것뿐.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아참, 그보다…….”
“던전 탐사 때문에 전화하신 것 아닙니까?”
민성이 그의 말을 자르자, 수화기에서 겸연쩍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잘 아는군. 아무래도 착수금만 15억이 든 일이니 말이야.”
“이해합니다.”
“그래……. 어떻게 됐나? 유물은…… 확보했나?”
사과할 때도 차분했던 목소리가 아주 가늘게 떨려댔다.
“회장님께서 견제하시던 미국 놈들은 그걸 비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군. 유물이든 비보든 아무래도 좋네! 확보했나?”
민성의 애매한 답변에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는 커다랗게 높아져갔다. 언뜻 긴장한 것 같은 노인의 반응에 민성은 올라오는 웃음을 꾹 참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허…….”
민성은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허탈해하는 목소리에 터질 뻔한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그리곤 차분히 대화를 이어갔다.
“장소를 독점한 미국인들이 먼저 선수 친 것도 컸지만, 무엇보다 정보의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던전이 망자들의 놀이터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천운이 따랐다고 생각해야 될 정도였습니다.”
민성은 낮은 한숨까지 섞어가며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토로했다.
“결국 유물은 그들 손에 넘어간 거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면, 혹 자네의 아이템 창 안에 잠들어 있다거나……?”
“예?”
‘이 노인네가…….’
노인이 끝말을 흘리자, 민성은 일부러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분명 질문을 던져 그의 의중을 떠보려 함이 틀림없었다.
“제가 그 레이나인지 나부랭이인지 하는 소녀의 용암에 녹아내릴 뻔한 걸 생각하면, 후……. 보스는 어찌도 그리 강해 보이던지. 저는 살아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거 오히려 착수금이 부족했나 싶기도 하고…….”
민성이 완고하게 나오자,
“……아니네, 아니야. 대신 약속했던 잔금은 주기 어려울 것 같네.”
노인은 허탈해하면서도 와중에 돈 계산은 착실히 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사람이라 염치는 있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하지. 쯧쯧, 그래도 전투에서의 활약과 공헌도 1위라는 타이틀을 믿었건만. 허울 좋은 개살구였나?”
“예?”
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민성은 재차 되물어봤다. 하지만,
뚝-
민성은 일방적으로 끊긴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
“흠…….”
노인은 꺼진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곤 생각에 잠겼다. 용병들에게 보고 받았던 내용과 차이는 없는 것 같았다. 노인은 조금 전, 씩씩거리며 방을 박차고 나간 김도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 일로 용병들 태반이 죽어나갔습니다.”
“허허…….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안타까운 일이요? 지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김도진은 노인의 허허로운 반응에 발끈해 소리 질렀다.
“안타까운 일이지. 나도 고용인들이 죽은 점은 진정 안타깝게 생각한다네.”
하지만 노인의 진정성 없는 위로에 김도진은 분을 삭이지 못했다.
으득-
“백번 이해해서 능력자들은 그렇다고 칩시다. 근데 그놈들은 도대체 뭡니까? 시체가 살아 움직이고, 죽었던 왕이 부활해서 돌아다니고……. 그런 사항은 주신 정보에 없지 않았습니까!”
“사전에 말하지 않았나?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나로서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이야.”
“그건…….”
김도진은 이미 핏물이 새어나오는 입술을 더욱 세게 악물었다.
“내가 괜히 자네들에게 그런 거금을 쥐여 준 게 아니야. 어떠한 리스크가 존재할지 모르니, 그에 따른 합당한 값어치를 측정해서 준 것뿐이지. 계약서에 서명까지 받았는데, 자네한테 큰 소리 들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김도진의 한 맺힌 사과에 노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얻은 건 없다……. 혹 다른 이들이 유물을 얻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나?”
“아까도 말씀드렸듯 미국과 정체불명의 놈들은 한참 싸우더니 결국 도주했습니다.”
김도진은 끌어 오르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혹 젊은 사람들은 못 봤나? 아마 남자 둘, 여자 하나로 구성된 파티일 텐데……. 그 중 한 명은 큼지막한 검은 대검을 사용하지.”
“그들이라면…….”
잠시 기억을 상기한 김도진은 이내 피식거리며 노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