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 변혁의 시작 (1)
29. 변혁의 시작.
*
“엄마…….”
소녀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다시는 못 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의 이름을 재차 불러봤다. 하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회사가 무너지고, 어머니는 그녀를 떠났다. 정확힌 언제나 만취해 폭행을 일삼는 아버지의 행태에 지치신 게 분명했다.
“하아…….”
어둠이 싫었다. 한 칸의 작은 방이 싫었다. 아버지가 싫었다. 소녀는 찬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도 누인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이미 몸 여기저기에 새겨진 멍에서 밀려오는 고통이 더 아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힘들게 한 건, 빛 한 점 없는 지금의 공간이었다. 아버지의 손에 끌려 이곳에 갇힌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안다 한들 의미가 있을까?
“죽으면…… 편할까?”
소녀는 차라리 죽으라며 던져줬던 굵은 밧줄을 손에 꼭 쥐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까칠한 촉감이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마치 죽지 말라는 듯.
달칵-
‘빛이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작은 개구멍 사이로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아니 그 미친놈이 문에 구멍을 뚫어 임시로 만든 식사 투입구였다. 소녀는 빛을 탐닉하듯 그곳으로 미친 듯이 기어갔다. 금방 닫힐 걸 알면서도.
탁-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투입구는 이내 빠른 속도로 닫혔다.
“아……아아…….”
소녀는 점차 가늘어지는 빛을 보며 떨리는 팔을 뻗어보았다.
‘안 돼. 제발……. 제발.’
그녀의 애원에도 빛은 매정하게 그녀의 손길을 거부했다.
투입구가 완전히 닫히자, 문 너머에선 테이프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미친놈이 한 줌의 빛조차 방 안에 드리우지 않기 위해, 개구멍을 막는 중일 것이었다.
“아아…….”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금 쏟아져 나왔다.
퐁당-
볼을 타고 떨어진 눈물방울이 미친놈이 넣고 간 그릇에 떨어졌다. 소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밥그릇을 잡아들었다.
차가운 물밥.
그래도 딸내미라 식사는 챙겨주는 건지, 아니면 살인마가 되기 두려운 건지, 이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란한 가정은 이제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이 좁은 방, 지옥 같은 이 공간에서 나가고 싶었다.
“우욱…….”
밥그릇을 들어 얼굴에 갖다 대자, 역한 쌀내음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소녀는 꾸역꾸역 물밥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토악지기를 겨우 참아내고 나서야 한 고비를 넘긴 것을 실감했다. 그리곤 찬 바닥에 다시 몸을 눕힌 뒤,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아무도 날 찾아주지 않지? 사람이 없어졌으면 신고해줘야 하잖아?’
아무리 인정이 메마른 세상이더라도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설마 이렇게 죽는 거야?’
몇 번이고 자살을 결심했지만, 실천할 용기가 없었다.
‘사실 이건 실험 같은 게 아닐까?’
겁쟁이는 어디까지 몰려야 자살을 시도하는지 알아보려는 잔인한 실험일지도 몰랐다.
‘그보다…… 내 이름이…… 뭐였지……?’
단번에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미친 듯이 어둠에 잠식당한 기억을 뒤졌다.
‘내 이름……. 내 이름……. 그래! 아루! 아루였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이름을 찾아내자, 안도한 소녀는 그제야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나이……. 나이는! 그래 18살. 18살이야.’
소녀는 이름을 시작으로 하나둘, 잠식됐던 기억들을 어둠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 또 다른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지금이야 기억해냈지만, 나중에는?’
안 된다. 나중에도 기억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무섭다. 이렇게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방도를 마련해야했다.
“아루는 18살이고 한빛고등학교 학생이야. 그리고 사과를 좋아하고…….”
“아루는 18살이고 한빛고등학교 학생이야. 그리고 사과를 좋아하고…….”
이윽고, 소녀는 그녀가 기억해낸 정보를 중얼거리며 반복적으로 읊었다.
“아루는 18살……. 누가…… 도와줘……. 제발…….”
부디 어둠이 정신을 완전히 갉아먹기 전에.
*
“푸하!”
민성은 왜인지 코에서 쏟아지는 물을 닦아내며 주위를 살폈다.
‘돌아……왔나?’
주변을 살피자, 무덤으로 들어가기 전의 베이스캠프가 눈앞에 보였다. 처음과 달리 확연하게 숫자가 줄어든 용병들이 정비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돌아왔다. 확실히 돌아왔다.
“으…….”
안도감이 들자, 동시에 차가운 한기가 흠뻑 젖은 그의 몸을 덮쳐왔다.
“민성!”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민성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용병무리에서 빠져나온 이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이건…….”
민성은 이신이 내미는 수건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이런 건 또 언제 챙겼나 싶었다. 이신은 대답 대신 조용히 메고 있던 가방을 가리켰다.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고마워요.”
민성은 수건을 받아 젖은 머리를 닦아냈다. 그러면서도 용병들의 동태를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괜히 왜 안 도와줬냐고 시비 걸면 골치 아파져.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야겠어.’
이미 다수의 동료를 잃어버린 그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했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귀찮은 일은 조금이라도 방지하는 편이 좋았다.
“몸.”
한마디였지만 이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챈 민성은 슬쩍 미소 지어 보였다.
“네, 괜찮아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궁금할 법도 하건만, 이신은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왜 젖어 있는지 묻지 않는다. 오히려 홀로 남았던 그의 몸 상태를 걱정했다. 배려인지는 몰라도 민성은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건?”
대신 민성이 갖고 있는 옥함에 호기심을 보였다.
“아, 이건……. 탈출하다가 던전 구석에 놓여 있는 걸 보고 잽싸게 챙겨왔어요,”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자, 민성은 대충 얼버무리며 옆구리에 끼고 있던 옥함을 주섬주섬 아이템 창에 넣었다.
“잘했다.”
이신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물욕이 없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것보다 아루 씨는 어디에 있어요?”
민성은 슬쩍 질문을 던져 대화의 화제를 돌리고자 했다.
“저기.”
이신은 손가락을 펴 베이스캠프를 가리켰다. 민성은 이맛살을 좁히며 베이스캠프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광해군이 던전 밖으로 이동시키면서, 본의 아니게 한데 뭉친 모양이었다.
“아루 씨만 데리고 얼른 나가죠.”
민성은 뒤따라오는 이신에게 중얼거리듯 말하며 달리듯 걸어갔다. 이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랐다.
‘아차차…….’
걷는 와중에 인피면구를 벗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미국이나 혈교 놈들을 마주치면 곤란했다. 전력의 한계를 깨닫고 후퇴한 이들이다. 헌데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놈이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분명 생존한 이유는 둘째 치고 비보의 행방을 물을 게 뻔했다.
‘어떻게 얻은 건데……. 망할 놈들.’
절대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놈들과 싸우는 것도 무리라는 판단이 섰다. 혈교 측은 몰라도 레이나의 능력은 확실히 인지했다. 그녀와 벌였던 저번 전투는, 장소가 협소한 덕에 그가 이득을 봤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방금처럼 궁궐 같은 넓적한 장소에서 싸웠다면 된통 당했을지도 몰랐다. 민성은 베이스캠프에 다가가면서도 연신 그들의 존재유무를 살폈다. 다행히도 놈들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끼릭-
“…….”
베이스캠프로 접근하자, 총기 꼬질대로 총열을 거칠게 쑤셔대는 용병들이 보였다. 일부는 그저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표정이 그들의 현 상황을 짐작케 했다.
‘쯧쯧. 그런 일을 겪고 멀쩡한 게 이상한 거지.’
그렇다고 안쓰러워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성은 그저 옅게 혀를 차며, 이신의 인도를 받아 아루가 있는 베이스캠프 구석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창백한 안색을 한 채, 크로스를 등받이 삼아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그녀의 감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본 민성은 혀를 차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아루 씨! 아루 씨!”
그녀에게 다가간 민성은 몇 차례 그녀를 불러봤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민성은 재차 그녀의 몸을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힉!”
천천히 눈을 뜬 아루는 경기를 일으키며, 민성을 거칠게 밀쳐냈다.
“아루 씨! 왜 그래요?”
당황한 민성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조심스레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헉, 헉.”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던 그녀의 거칠어진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어갔다.
“괜찮아요?”
“……네. 죄송해요…….”
“악몽이라도 꾸셨나 봐요. 움직일 수 있어요?”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었던 악몽. 그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갔다. 민성은 아루의 사과에 고개를 저으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도 거동이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루는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그들을 따라왔다.
“얼른 돌아가요.”
민성은 다정하면서도 미안함을 담은 어조로 일행들을 격려했다.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성은 그들과 함께 슬며시 베이스캠프를 벗어나려 했다.
“죽은 놈들에게는 적절한 보상이 나갈 거다. 그리고…… 미안하다.”
용병들의 곁을 지나치는 와중, 김도진의 낮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성은 고개를 돌려 그들의 정황을 슬쩍 살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짙은 피로와 패배감에 절어 있는 김도진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용병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의 구레나룻도 주인을 따라 힘없이 축 처져 있는 것 같았다.
“…….”
그러나 용병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냉랭하고도 차가운 분위기의 원인이, 비단 불어오는 겨울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이래서 높은 자리에 있어 봐야 골머리만 아프지.’
냉정하게 봤을 때, 엄연히 김도진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는 그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다만 결과가 과정을 뒷받침해주지 못했을 뿐. 어쨌든 결과에 책임지는 것 또한 수장의 역할일 터, 이제 남은 일은 생존한 용병들이 결정할 일이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아무리 단순한 탐사임무라 하더라도 평소처럼 철저하게 준비하는 게 맞았습니다.”
“맞습니다. 저희의 준비가 부족한 탓이지, 이건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들…….”
김도진 역시 붉어진 눈시울로 생존자들을 응시했다.
‘어이고, 잘들 논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훌쩍임에 민성은 고개를 저으며 남아 있던 관심을 거두었다. 그리곤 일행들과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
‘이러다 얼어 죽겠네.’
이신이 준 수건으로 물기를 최대한 닦아냈지만,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는 탓인지 푹 젖은 옷에는 살얼음이 끼고 있었다.
“그래……. 이미 죽은 식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산 사람은 훗날을 도모해야겠지. 이번 일은 의뢰주에게 책임을 묻겠다. 단순한 유적탐사라고 거짓말한 대가는 치러야지. 일단 전원 복귀한다!”
“예!”
“그리고 앞에! 얘들아!”
이미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건만, 김도진의 우렁찬 소리는 민성들의 뒷전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