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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캐쉬상점 쓴다-126화 (126/303)

# 126

126화 - 분기점 (12)

후퇴를 결정한 것은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주인도 몰라보는 고양이 새끼는…….”

“야! 야! 야, 이 흑마 새끼야!”

백호와 격렬한 혈전을 벌이던 남자는 그를 부르는 동료의 목소리에 이맛살을 구겼다.

“아, 왜! 도와줄 것 아니면…….”

“후퇴한다!”

“뭐? 어이쿠.”

딱-

남자는 놀란 듯 소리치며 백호가 들이미는 굵은 이빨을 피해냈다.

“귓구멍에 쌓인 먼지 좀 치우고 살라고 했지! 후퇴라고!”

“정말로? 싸우지도 않으면서 후달리냐? 아니면 혹시 바지에 지린…….”

여인의 높다란 목소리에 남자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재차 되물었다.

“백야 님의 명령이야.”

“그럼 따라야지.”

백야의 이름이 언급되자, 남자는 두말없이 여인의 말에 따랐다.

“비켜, 이놈아!”

남자는 그의 대검을 물고 늘어지는 백호의 뺨을 검면으로 힘껏 후드려치곤 일행이 있는 장소로 몸을 날렸다.

“준비는 다 된 거야?”

남자의 질문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에 카일이 했던 것처럼,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슉-

그리곤 그들도 곧 자리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응? 이런 미친!’

“이 개새끼들아!”

한 발 늦게 그들의 전술적 후퇴를 확인한 민성은 침까지 튀기며 괴성을 질러댔다. 어쩐지 몰리는 상황에도 여유가 있더라니, 저런 수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딜 보는 것이냐.”

그러나 광해군은 그의 상황은 상관없다는 듯 화염검을 휘둘렀다.

“이크.”

재빨리 머리를 숙였지만, 머리카락 몇 올이 걸렸는지 탄 냄새가 풍겨왔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이 빌어먹을…….’

“여유가 없어진 모양이구나. 동료가 도망가서 그런 것이냐?”

“…….”

광해군의 질문에도 민성은 생존을 위한 가설을 세우기 바빴다. 분명 놈들이 도주한 이유는 승기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 그 역시 도주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어쩌지. 그나마 갖고 있는 도주수단이라곤 비밀스러운 집 열쇠가 전분데.’

하지만 유일한 탈출기도 열쇠구멍이 없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눈앞의 왕이자 던전의 보스를 죽이는 길뿐이었다.

화악-

“시발…….”

민성은 전신을 덮을 만큼 큰 용암의 파도를 피해내며 낮게 욕설을 토해냈다. 상대를 하면 할수록 그와의 격차가 느껴졌다. 도망간 놈들이 남기고 간 부산물들은 계속 그의 움직임을 제하고 괴롭혔다.

“전장에서 잡생각은 금물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이런!’

광해군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무형의 기운이 날아왔다. 피하기엔 늦었다. 민성은 급히 대검을 쳐들었다.

쾅-

“크윽…….”

대검 너머로 묵직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민성은 충격에 피를 왈칵 뱉어내면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빠지면…… 끝이다.’

뒤편에 유유히 자리하고 있는 용암에 발이라도 디밀었다간, 세상과 작별을 준비해야 할 게 뻔했다.

“쿨럭……. 후욱, 후욱.”

민성은 입가에 묻은 시뻘건 피를 닦아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와중에도 광해군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어. 절대……. 절대로.’

“흠…….”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격렬한 공세를 이어가던 광해군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곤 용암으로 새로운 옥좌를 만들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어찌하여 도망가지 않는 것이냐?”

“…….”

‘도망갈 길이 있어야 도망가지, 새끼야. 구멍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든가!’

민성은 숨을 몰아쉬며 흘낏 후방을 살폈다. 아직 용암에 갇혀 있지만, 무사한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남아 있는 일행이 있는 것이로구나.”

광해군이 계속 질문하는 와중에도 민성은 끊임없이 살 방도를 모색했다.

‘어쩐다, 어쩐다. 아니 애초에 이놈은 충분히 끝낼 수 있는데도 왜 시간을 끄는 거지? 혹시…….’

살 수도 있다! 질문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순간, 일말의 가능성을 엿본 민성은 눈을 빛내며 왕을 바라봤다. 굽혀야 하는 현실이 슬펐으나, 굽힐 때는 굽혀야 했다.

“대답하거라!”

“적이 눈앞에 있는데 부상 입은 아군을 두고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호오……. 과연…….”

민성이 헉헉대면서도 진중히 말하자, 광해군은 눈을 이채롭게 빛내며 그를 바라봤다.

“네게 한 가지 물으마. 변혁을 이끌어가는 자는 항상 수많은 시련을 맞닥뜨린다. 그때,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당연히 임전무퇴의 마음가짐 아닙니까.”

민성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질문에 답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나아가고자 하는 신념을 지닌 자는 늘 주위의 핍박과 유혹에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갖고 있는 신념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마음, 어떠한 적을 맞닥뜨리더라도 쓰러뜨릴 수 있다는 마음인 임전무퇴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민성은 생각에 잠긴 광해군의 얼굴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흠……. 그 또한 정답이 될 수도 있겠구나.”

나름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민성은 그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너는 그러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나?”

“…….”

‘아니, 하나만 질문한다며!’

민성은 급히 머리를 굴렸으나, 이내 들려오는 광해군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아니다. 물을 필요도 없었구나.”

그는 아직 그를 겨누고 있는 검은 대검을 보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좋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살려주시는 겁니까?”

광해군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내전을 맴돌던 용암은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어어어…….”

“어, 어? 이게 어떻게 된……?”

뿐만 아니라, 남아 있던 망자들 역시 먼지가 되어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그럼 문을 열어주시면…….”

“여봐라!”

민성의 말을 끊은 광해군이 크게 외치자,

“예이, 전하!”

사라졌던 내시가 다시금 그의 옆에 나타나 그를 보좌했다.

“그것을 가져오거라.”

“예이, 전하!”

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서 사라진 내시는, 이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있사옵니다.”

“음…….”

광해군이 내시에게서 받아든 것은 작은 옥함이었다.

“네가 갖고 있는 최고의 수를 보여 봐라. 마음에 든다면 목숨뿐만 아니라, 비보도 네게 주도록 하마.”

“예?”

광해군은 민성의 물음을 묵살하곤 내시를 바라봤다.

“저자를 회복시켜라.”

“예이, 전하.”

내시가 손을 들어 중얼거리자,

“…….”

갓 던전에 들어왔을 때처럼, 몸이 깔끔하게 회복됐다.

“자, 이제 네가 가진 최고의 수를 보여 봐라. 혹시, 단순히 입만 산 놈은 아니겠지?”

“조건이 있습니다. 최고의 수를 펼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저의 일행까지 휩쓸릴 수 있습니다.”

“……좋다.”

광해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던전 안의 생존자들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 뭐야!”

“으어어어어!”

생존자들의 놀란 목소리가 내전을 울렸다.

“감사합니다.”

민성은 애매모호한 감정을 뒤로하고 왕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됐다. 이제 이곳의 생존자는 오로지 너뿐이다. 그러니 보여 보거라.”

‘시발…….’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스킬 ‘수옥’. 위력도, 능력도 감히 가늠이 되지 않는 스킬. 지금 그것을 이곳에서 사용하고자 마음먹었다. 요구조건인 물 한 방울이야 차고도 넘쳤다.

‘친절하게 마나까지 채워줬는데, 한번 가보자!’

민성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때기 시작했다.

“수옥.”

민성은 곧 다가올 이변을 대비했다. 하지만 내전은 잠잠하다 못해 고요했다.

‘뭐지? 마나는 빠져나갔는데…….’

당황한 민성은 재차 수옥을 외쳤다.

“설마 날 우롱한 것이더냐.”

광해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스륵-

저 멀리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하고 청량한 소리는 점차 뚜렷할 정도로 커져갔다.

쾅-

그리곤 무엇이 내전을 강타했는지 커다란 마찰 소리가 안을 울렸다.

‘맙소사…….’

곧 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민성은 경악한 채 천장을 응시했다. 천장이 박살나 잔해물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거대한 파도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흐읍!”

민성은 본능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대검을 쳐들어 다가올 충격을 대비했다.

콰과광-

높이,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파도가 순식간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읍읍!”

궁궐 안은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 속에 잠식됐다. 물속에 잠긴 민성은 눈을 감고 그저 위를 향해 헤엄쳤다. 와중에 슬쩍 뒤를 살피자, 목을 붙잡고 물거품을 뿜어대는 광해군과 내시의 모습이 보였다.

‘꼴좋다. 망할 새끼들.’

하지만 그 역시도 곧 저들과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민성은 재차 몸을 돌리려는 찰나,

‘아, 맞다!’

민성은 발버둥치는 광해군의 옆에 놓인 옥함을 보곤 급히 선회했다. 열심히 헤엄쳐 그의 곁에 다가간 민성은 재빨리 옥함을 집어 들고, 다시 위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하지만 옥함에 시간을 소모한 탓인지, 벌써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이제 곧 숨을 뱉어낼 것만 같았다.

‘안 돼. 안…….’

민성은 옥함을 꼭 쥐고 안간힘을 다해 헤엄쳤다. 하지만,

꼬로로록-

결국, 참았던 숨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렇게……. 응?’

민성은 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있는 그의 폐부를 바라봤다. 물속에서도 숨이 쉬어진다!

“후읍! 후읍!”

어벙한 표정을 짓던 민성은 반복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꼬로로록!”

감탄사 대신 거품방울들이 나오긴 했지만 분명 숨이 쉬어졌다.

‘어쩐지 아무런 충격이 없더라니.’

민성이 실실 웃으며 계속 헤엄쳐 나가는 와중,

띠링-

[던전 필천궁(必天宮)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끝났구나.’

민성은 새로이 들려오는 메시지에 이번 일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예측불가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민성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숨이 다했는지 이제는 잠잠해진 광해군과 내시의 신체가 눈에 들어왔다.

‘성불하쇼. 근데 이미 죽은 자들인데 익사가 가능한 건가?’

문뜩 의문이 들었지만, 이미 던전을 클리어한 만큼 호기심은 이내 민성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슉-

이윽고, 민성의 몸도 빛에 휩싸여 사라져갔다. 침입자들이 내전을 뜨자, 물에 잠긴 내전에는 공허한 침묵과 어둠만이 맴돌았다.

민성의 신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잠시 후,

번뜩-

죽은 줄만 알았던 광해군과 내시는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물속임에도 그들은 개의치 않는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짐의 연기가 괜찮았느냐?”

“완벽, 완벽 그 자체였사옵니다, 전하. 헌데 전하! 어째서 저런 무뢰한들을 살려 보내셨습니까. 거기다 비보까지 들려가면서…….”

그의 옆을 보필하던 내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되었다. 어차피 언젠간 벌어졌을 일이다. 날 잠에서 깨운 이가 얼마 전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더냐. 그리고 나의 나라를 패망에서 건져낸 후손을 어찌 죽일 수 있겠느냐. 다만 그냥 비보를 줄 생각이 없을 뿐이었지.”

광해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라면 이미 사회의 중추로 활동하고 있을 터. 곧 시작될 변혁 속에서 조국을 잘 이끌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뿐이다.

“폐하의 은덕이 조선에 하해와 같이 퍼질 것이옵니다.”

“글쎄…….”

띠링-

[필천궁(必天宮)이 클리어됨에 따라 미사일이 벽을 요격합니다.]

“시작됐군.”

덜컹-

이미 걸레짝이 된 천장이 두 쪽으로 갈라지자, 광해군은 안타까움과 묘한 열기가 섞인 눈빛으로 그것을 올려다봤다.

“네 선조부터 흘러내려온 피를 다시금 믿어보마, 충무공의 후예여.”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란한 빛이 물을 뚫고 던전 내부를 비추어갔다.

“고되고도 고된 인생이었다. 미안하오, 중전. 이로써 내 업을 조금이나마…….”

파스슥-

던전을 비추어가던 빛이 광해군의 전신을 덮자, 그의 신체는 조각난 돌처럼 천천히 부서져 내려갔다.

쾅-

그와 동시에 갈라진 천장 사이로 거대한 물체 하나가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쳐 어디론가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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