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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캐쉬상점 쓴다-125화 (125/303)

# 125

125화 - 분기점 (11)

쾅- 쾅-

“이런 젠장맞을 새끼를 봤나.”

격전지로 접근하자,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소녀의 걸쭉한 욕설이었다. 소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연신 손에 불덩이를 생성시켜 광해군에게 쏘아댔다. 하지만 불덩이들은 지팡이에 가로막혀 픽 소리와 함께 힘없이 꺼졌다.

“아까처럼 더 잔재주를 부려보지 그러느냐.”

광해군은 지금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묘한 미소를 머금고 침입자들을 바라봤다. 붉은 용암이 그의 주변을 유유히 흐르고 있건만, 그는 아랑곳 않는 듯했다.

“이 새끼가……. 수작부리지 마! 또 따라하려고!”

소녀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 지르며 화염검을 휘둘렀다.

챙-

‘따라하다니? 이건 또 뭔 소리야.’

민성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팡이와 화염검이 격돌하는 모습을 쳐다봤다.

“이런 잔재주보단 아까 것처럼 큰 것을 사용해 보거라. 무료하지 않느냐.”

“닥쳐! 이 새끼야!”

왕의 도발에 격분한 소녀는 재차 화염검을 머리 위로 쳐들고 그대로 내려찍었다.

“파이어 소드.”

그러나 광해군은 그녀를 비웃듯 힐끗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왼손에 소녀가 든 화염검과 똑같은 검이 들렸다.

“이 새끼가 또! 또!

화염검에 일격이 가로막히자, 소녀는 단아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침까지 튀기며 열을 올렸다.

“이프리트!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좀 차분하게 대응해요!”

소녀의 옆에서 검을 휘두르며 기회를 엿보던 카일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안 넘어가게 생겼어? 저 새끼가 쓰는 스킬마다 족족 다 베껴 가는데!”

“그래도 레이나를 봐서 참아요!”

어찌된 영문인지 이 던전의 보스는, 그들이 사용하는 스킬을 똑같이 따라했다. 마치 원래 그의 것이었다는 듯. 카일은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왕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시각이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단순한 성격을 지닌 여아로구나.”

“뭐야! 이 새끼가! 우리 레이나가 어때서!”

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입에 걸린 기묘한 미소를 본 소녀는 회까닥 눈이 뒤집혀 돌진했다.

‘호오. 그런 거였나?’

민성은 그들의 대화로 얼추 상황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광해군은 아마도 스킬을 사용하면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듯했다.

‘스킬은 무조건 자제하고……. 것보다 스킬을 복사한다는 건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겠지?’

민성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대검을 꽉 붙잡았다.

“저 새낀…….”

잠시 전투에서 이탈해 숨을 고르던 남자는 느닷없이 왕에게 달려드는 민성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끼어든 건 둘째 치고, 소녀의 범위스킬을 보곤 곧바로 줄행랑친 놈이 멋모르고 달려드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요즘은 자살방식도 다양…….”

“뭐 해, 얼른 싸워!”

남자는 중얼거림을 멈추고 이맛살을 좁혔다. 후방에선 연신 그를 독촉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년. 지가 싸우든가. 쯧, 백야 님만 아니었어도.”

툴툴대던 남자는 이내 대검을 쳐들고 몸을 날렸다.

쾅- 쾅-

“미쳐가지고 내 딸을 욕해, 엉?”

무의미한 공방이 오갔다. 레이나와 카일의 합공에도 광해군의 철벽같은 수비를 뚫지 못했다. 간혹 검 끝이 그의 옷자락에 닿았으나, 작은 생채기조차 입히지 못했다.

“더 보여줄 것이 없나 보구나.”

“네놈이 훔쳐가지만 않으면 보여줄 게 많지.”

광해군이 아쉽다는 듯 말하자, 소녀는 으르렁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 성격만 죽인다면 훗날 좋은 신붓감이 될 수도 있겠구나.”

“뭐? 우리 레이나가 어때서! 엉?”

광해군은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지는 소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곤 그를 둘러싼 다른 침입자들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불손한 의도로 들어왔지만, 덕분에 되풀이되는 가뭄 같은 일상에 단비가 내린 것 같구나. 하지만 슬슬 이 여흥도 끝낼 때가 되었어.”

광해군은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보이곤, 고개를 쳐들어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모습은 어딘가 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흡!”

그러나 계속 빈틈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던 민성은 기회라는 듯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왕을 대검의 사거리 안으로 들여놓은 민성은, 왕의 갈비 부근을 노리고 대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챙-

“어리석고도, 어리석구나.”

불타는 화염검으로 대검을 막아낸 광해군은 정녕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민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또 한 번 도망칠 기회를 주었건만, 그렇게도 죽기를 원했느냐.”

‘이건 또 뭔 소리야. 언제 또 줬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어?’

민성은 맞물린 대검에 힘을 가득 주며 왕을 노려봤다.

“되었다.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

광해군이 화염검으로 가볍게 대검을 밀쳐내자. 민성의 신형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미친!’

예상외로 강한 완력에 놀랐지만, 그보다 문제는 그의 몸이 용암지대로 밀려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헛, 헛.”

민성은 괴이한 탄성을 지르며 아직 용암에 잠식되지 않은 땅을 밟으며 겨우 뒤로 물러났다.

“개그맨 지망생이냐?”

민성이 곡예를 부려 땅에 착지하자, 그의 옆에 있던 레이나는 비꼬듯 그를 놀렸다.

“…….”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는 걸 느낀, 민성도 차갑게 대꾸했다.

“댁이 만들어낸 저 쓰레기 같은 용암들만 없었어도 제가 우세했을 겁니다.”

“호오……. 정말로?”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애초에 협공하고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민성이 그들을 질타하자, 소녀의 입에는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끝을 내자꾸나. 소환 백호.”

“크아아앙!”

광해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옆에는 집채만 한 하얀 호랑이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놈의 노란 눈동자와 살짝 튀어나온 어금니는 언제든 적을 발기발기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저것도 혹시…….”

민성은 호랑이의 몸에 새겨진 검은 줄무늬를 멍하니 보며 중얼거렸다.

“눈치는 빠르구나. 저놈 스킬이지. 보스 놈, 분신 잡을 때 사용했던 건데……. 쯧.”

소녀는 그의 예상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펴, 얼굴을 붉히며 백호를 노려보는 혈교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광해군이 악단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손을 놀리자, 용암과 얼음덩이들이 살아 움직이듯 허공에서 활개 쳤다.

“저건…… 우리 건데……. 아주 그냥 지 것처럼 사용하는구나.”

“맞으면 골로 가겠는데요.”

“그치? 원주인이 누군데!”

소녀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폈다. 민성은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온다! 이프리트!”

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요동치던 용암과 얼음덩이들이 폭사하듯 그들에게 쏘아져왔다.

“이런, 미친…….”

민성은 욕지기를 뱉으며 대검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타다당-

사람 몸뚱이만 한 얼음덩이들이 검면에 부딪쳐왔다. 충격은 고스란히 몸으로 전달됐다. 용암은 차마 막을 자신이 없었기에 날아오는 족족 몸을 날려야만 했다.

“크윽…….”

민성은 나지막한 신음을 뱉으며 여유 가득해 보이는 왕을 노려봤다. 멀찍이 떨어져 관전할 땐 몰랐는데 직접 겪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크아아아앙!”

“이 개새끼가 이제 주인도 못 알아봐!”

한쪽에선 대검으로 백호의 아가리를 틀어막고 버티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카일과 레이나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럴 거면 그냥 사용하는 게 낫지 않아요?”

민성이 비명 지르듯 소리치자,

“안 돼! 저 새끼 더 강해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곧바로 부정적인 답변이 날아왔다. 민성은 몰아치는 자연재해에 가까운 불과 얼음의 폭우를 피해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약점 같은 건 없어요?”

“있었으면 진자악 내가 쳐 죽였지! 이러언 빌어먹을!”

“그럼, 분신은 어떻게 죽인 건데요!”

“어떻게…… 죽이긴! 대가리를 날려줬지! 애초에…… 복사 능력은…… 없었다고.”

레이나의 답변을 들은 민성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런데도 스킬을 사용하지 말라고?’

아무리 광해군에게 스킬을 복사하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작금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선 스킬을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인 것 같았다. 마침내 결심한 민성은 급하게 입을 땠다.

“골렘의 굳건한 의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바람을 타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인간이다! 죽이자! 죽이자!]

[키가 큰 놈들은 전부 죽어야 돼!]

민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망령이 된 망자들이 왕을 향해 날아갔다.

“이 미친 새끼야!”

레이나가 절규하듯 소리 질렀지만, 민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든 사물들이 잔잔한 강 흘러가듯 느리게 움직인다. 레이나의 고함조차 몇 박자나 느리게 들려왔다.

‘간다.’

가볍게 숨을 한 번 내쉰 민성은 발포된 포탄처럼 왕에게 날아갔다.

“새로운 여흥이로구나.”

광해군은 그의 곤룡포에 주렁주렁 매달린 난장이들을 신기하게 내려다봤다. 조그마한 것들이 몸에 달라붙자 몸이 물먹은 솜마냥 무거워짐을 느꼈다.

촤악-

그와 동시에 그의 어깨와 손 사이를 잇는 옷소매에 작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음?”

갈라진 옷소매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이번엔 반대편 어깻죽지에서 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익-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뒤늦게 격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건…….”

광해군은 어이없는 얼굴로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를 살폈다. 여태껏 상처 하나 입지 않았던 그의 몸에는, 선명한 붉은 선이 새겨져 있었다. 재생이 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당한 일격으로 방대한 마나가 빠져나갔다.

“가장 나약한 줄만 알았던 이가 가장 강하다니. 과거나 현재나 세상의 모순은 변함이 없구나.”

촤악-

광해군은 생채기가 늘어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저 혼자 껄껄거리며 웃더니, 이내 정색한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재미있구나, 그래. 과인의 궁궐에 침입했으면 응당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지, 암.”

‘저 양반. 혼잣말 참 좋아하네.’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던 민성은 혼잣말하는 광해군을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지런히 대검을 휘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솔직히 대검이 그의 몸을 갈랐을 때만 하더라도 승리를 예상했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인지.’

분명 항상 베던 것처럼 대검을 휘둘렀건만, 고작 생채기만 낼 줄은 몰랐다. 이를 악문 민성이 재차 대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나도 답례를 해야겠지. 골렘의 굳건한 의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바람을 타다.”

광해군은 민성이 한 것처럼 똑같이 스킬을 읊었다.

[우리를 죽인 놈이다! 죽여! 무조건 죽여!]

[우리를 죽여 놓고도 멀쩡하게 잘 살 줄 알았어?]

그러자 광해군의 몸에서 난장이들의 망령이 튀어나와, 민성에게 달려왔다.

“젠장…….”

민성은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 상황 역시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의 목에 대검을 들이밀었을 때만 해도 죽였다고 생각했건만,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쫓아라! 무조건 죽여!]

난장이들은 확인조차 어려운 민성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듯, 잘도 그를 따라왔다.

“이제야 보이는구나.”

심지어 광해군마저 그의 움직임을 쉽사리 쫓아왔다.

‘미친. 내가 이 속도에 익숙해지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 저럴 줄 알았다.”

광해군마저 시야에서 사라지자, 레이나는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봤다.

“튀자.”

“예?”

“튀자고! 저 새끼가 시간 끄는 동안!”

소녀는 담담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녀의 의견을 표출했다.

“이프리트……. 제가 이곳을 발견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내 딸이 건강하길 바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러다 전멸할 각이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다음도 있는 거다. 이번에는 보스의 패턴을 익혔다고 생각하고 다시 도전하면 돼.”

“…….”

소녀의 냉담한 말투에 카일은 이빨에 피가 밸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 설마…… 내가 완전히 강림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지?”

“……돌아가죠.”

“그래. 잘 생각했어. 얼른 아이템 꺼내. 돌아가자.”

소녀의 말이 끝나자, 카일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리곤 이내 그들의 신체는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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