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124화 - 분기점 (10)
“이 미친 정령이 또…….”
분명 저돌적으로 바뀐 레이나의 성격 이면에는, 저 망할 정령이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죽어라!”
소녀의 몸에 빙의한 불의 정령은 신난다는 듯 소리치며 싸움에 난입했다. 오른손에 들린 화염검으론 왕의 목을 노리고, 비어 있는 다른 손은 무언가를 준비하는지 연신 휘적댔다.
“호오. 인격이 두 개인 여아로구나.”
능숙하게 대검을 막아내던 광해군은 목 언저리로 다가오는 화염검을 슬쩍 피해냈다. 그리곤 새로이 난입한 적을 보며 모호한 웃음을 지었다.
“아까랑은 다를 거다!”
소녀의 왼손이 움직임을 멈추자,
빠직-
광해군이 있는 자리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균열은 금세 넓게 확장되더니, 이내 그들이 위치한 제전까지 확장했다.
‘이런 미친!’
언제 끼어들지 타이밍을 재며 전투를 관전하던 민성은 경악하며 급히 몸을 피했다.
펑-
민성이 제전을 벗어남과 동시에, 옥좌가 있던 자리에서 붉은 용암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년아!”
마찬가지로 광해군과 합을 겨루던 남자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급하게 몸을 내뺐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뒤이어 계단과 시전자가 위치한 자리에서마저 용암이 뿜어져 나왔다.
‘저번 건 완전히 애들 장난 수준이었네.’
민성은 흘낏 등 뒤를 살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거, 그녀와의 전투로 얻은 경험이 유용하게 작용했다. 만약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까지 애먼 피해를 입었을 게 뻔했다.
“누구는 대형스킬 안 쓰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나! 하여간 젊은 것들은 배려란 걸 몰라요!”
민성은 용암지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소년을 끌어안고 악다구니를 지르는 여인을 바라봤다.
적아를 떠나서 그녀의 말은 일리 있었다. 협동공격을 하려면 범위가 넓은 스킬은 자제하는 것이 옳았다. 자칫 아군마저 집어삼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옥도 자제하고 있었건만.’
새로운 스킬을 사용해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지만, 민성은 일부러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는 문구가 영 찝찝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단일개체에게 사용하기에 껄끄럽다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그의 상식범위를 뛰어넘는 행위를 보였다.
‘이제 어쩐다.’
민성은 아직 그 기세를 이어가고 있는 용암 줄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 용암은 그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보기보다 재밌는 잔재주도 쓸 줄 아는구나.”
“이놈! 내 딸을 건드린 대가를 치러라!”
정확힌 백발소녀의 손짓을 따라 용암이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여댔다. 민성은 마그마에 덮여 녹아내리는 제전과 계단을 보며 이내 결론 내렸다.
‘전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자.’
가장 확실하면서도 완벽한 비책이었다. 남이 그랬다면 얍삽한 행위라고 욕했을 것이다.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법이었다.
“조심해서 써라, 알았냐?”
‘화이팅.’
민성은 재차 격전지로 돌아가는 남자를 응원하며 후방을 살폈다.
“키아아아아!”
“뒈져, 좀! 제발!”
여전히 용병들과 망자들이 얼기설기 얽혀 격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형국에도 한쪽은 우세함을 보였다.
퍽-
“크로오오!”
‘다들 무사한 것 같으니, 저들이나 좀 도와줄까. 이참에 빚도 좀 쌓아두고.’
일행의 안전을 확인한 민성은 대검자루를 다잡곤 이내 망자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키아아아!”
“흡!”
민성은 살짝 몸을 숙여 놈이 휘두른 부식된 검날을 피한 뒤, 망자를 향해 대검을 대각으로 비스듬히 휘둘렀다.
푸확-
놈의 갑주를 뚫고 어깻죽지에 파고든 대검은, 허리 부근을 뚫고 검은 검신을 드러냈다.
“크어어…….”
‘초반의 놈들보다 검 쓰는 게 능숙한 것 같은데.’
민성은 이내 형체를 잃고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망자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확실히 광해군이 소환해낸 망자들은 처음 상대했던 망자들과는 격이 다른 듯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던 놈들과 달리, 능숙한 몸놀림과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전의 모습과 상당한 연관이 있지 않나 싶었다.
‘그래봐야 상관없긴 하지만.’
아무리 망자의 격이 올라갔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간 상대했던 능력자들에 비하면 갓난아기나 다를 바 없는 놈들이었다. 민성은 땀에 살짝 내려간 대검 자루를 다시 꽉 붙잡았다.
“끄아아아악!”
“살려줘!”
이제는 생존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줄어든 용병 무리에선 간헐적인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저긴 완전히 글렀구나.’
민성은 아직 끝나지 않은 학살의 장을 슬쩍 곁눈질했다. 발을 속박하던 얼음은 일정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도 한참 기운 상태였다.
“버텨! 버티라고!”
그나마 김도진을 필두로 뭉친 용병들이 악착같이 항전을 펼치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정작 부하들의 사기를 고취시켜야 하는 당사자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는 것부터가 결말을 예상케 했다.
“문만 부수면 돼! 시발, 이런 빌어먹을!”
“제발……. 제발!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쾅-쾅-
용병들은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줄도 모를 정도로 미친 듯이, 개머리판으로 문을 찍어댔다. 하지만 최후의 희망은 그들에게 끝없는 나락만을 선사할 뿐이었다.
“내 최후가 시체 밥이 될 줄은 몰랐는데…….”
이미 체념한 듯 피 묻은 소총을 가만히 부여잡고 있는 용병들도 다수였다. 그들의 동공에는 절망과 좌절의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들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새로이 펼쳐진 전장을 응시했다. 꺼져가는 조명탄을 대신하듯 때맞춰 솟아오른 불기둥이 내전을 훤히 비췄다.
“빌어먹을 새끼들…….”
한 용병은 싸움도 잊은 채, 붉은 기둥을 멍하니 바라봤다. 엄청난 능력을 지닌 자들.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들이 가진 능력이라면 분명 지금의 상황을 뒤집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일말의 기대를 품었지만, 그들의 답변은 무관심이었다. 저들은 그들만의 전투를 치르느라 여념 없어 보였다.
“저런 능력을 갖고 있으면 좀 도와줘도 되는 거잖아…….”
힘없는 용병의 음성은 그저 작은 넋두리에 불과했다.
“키아아아!”
죽을힘을 다해 버티던 용병들은 점차 하나둘, 놈들에게 사지를 뜯기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나마 검은 대검을 든 수상쩍은 인물이 연신 망자들을 쓸어 담듯 몰살시키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제 끝인가…….”
용병들이 모든 것을 체념하려던 그때,
“크아아아!”
유독 고급스러워 보이는 갑주를 걸친 망자가 큰 괴성을 질러대며, 검을 들어 민성을 가리켰다. 그러자 바닥에 어지러이 펼쳐진 창자를 주워 먹던 놈들과, 용병들을 학살해 나가던 망자들은 나무토막 같은 목을 비틀어 민성이 위치한 곳을 노려봤다.
“키아아아!”
그리곤 너 나 할 것 없이, 괴성을 지르며 민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뭐, 뭐야.”
당황한 용병들은 멀어져가는 망자들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얼씨구. 이젠 대가리까지 쓰나 보네.”
민성은 사방에서 달려오는 망자들을 바라보며 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차라리 저들을 상대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쾅- 쾅-
민성은 물결처럼 몰려오는 놈들 너머에 위치한 옥좌를 살폈다. 거대한 화염덩이와 얼음덩이들이 한 폭의 지옥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빠져나오길 잘했지. 일단 계속 잡놈들이나 줄이면서 상황을 지켜봐야겠어.’
물론 밥줄 스킬을 사용한다면야 저들의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나와 쿨타임 그리고 타이밍. 삼박자가 어우러졌을 때,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생각을 정리한 민성은 그에게 달려드는 수십 구의 망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격했다.
“우리는…… 왕의…… 안위를…… 지킨다…….”
생전에는 궁궐을 지켰을 무사의 형태를 지닌 놈들은 가래 낀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제는 말까지 해? 너네 혹시 아이템 같은 건 안 떨구냐?”
“죽……어……라!”
질문의 답변은 사방에서 들이치는 녹슨 칼날이었다. 민성은 그의 복부와 머리, 그리고 안면으로 날아오는 칼날들을, 몸을 좌우로 비틀어대며 가볍게 피해냈다.
“거지면 거지라고 하든가.”
그리곤 대검을 위로 치켜든 뒤, 역으로 놈들의 머리통 부근을 빠르게 그었다.
푸확-
“그어어어…….”
놈들은 두 동강난 머리를 붙잡고 외마디 괴성을 질러댔다. 허나 곧 머리부터 부스러져 내리더니, 이내 가루로 변해 한 줌의 먼지가 되었다.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 도망이라도 가든가 하지.”
“쿠어억…….”
민성은 벼를 추수하는 농부처럼 망자들을 베며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뭉쳐! 뭉치라고!”
그에게 망자들의 적의가 쏠린 사이, 김도진은 생존자들을 파악하고 문 앞으로 집결시켰다.
‘괜히 총대 매고 대장직을 맡고 있는 건 아니었네.’
그 모습을 본 민성은 그의 결정이 현명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의 무게 탓인지 원래 그런 건진 몰라도, 포기할 만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생존을 모색하는 모습은 충분히 본받을 만했다.
“쿠아아아아!”
고개를 주억거리며 현장을 바라보던 민성은 매섭게 달려드는 망자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단칼에 내리그었다.
‘새끼가 어딜…….’
언제나 여유는 갖되 방심은 금물이었다.
“고맙다!”
‘응?’
그리곤 재차 망자들에게 돌격하려는 찰나, 김도진의 커다란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주어가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분명 그에게 향해 있었다.
‘아저씨, 이미 버스 떴어요.’
민성은 재차 일행의 안전을 확인한 뒤,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쿠아아아!”
“와라, 새끼야!”
그리곤 다시금 망자들에게 돌격하려는 찰나,
콰지직-
‘이번에는 또…….’
불길한 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밑으로 돌리자, 땅에 새로이 새겨진 작은 균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미친년이 진짜! 꺼져!”
“쿠어억!”
민성은 본능적으로 달려오는 망자의 면상을 검면으로 쳐내곤 급히 몸을 피했다.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서 작은 분화구가 생기더니 뜨거운 용암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크어어억!”
“왜 갑자기…….”
민성은 용암에 녹아내리는 망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 컨트롤하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그가 모르는 이변이 펼쳐진 모양이었다.
“이런 미친……. 피해!”
뿐만 아니라, 망자들과 용병들의 주위의 땅에서도 용암이 분출되었다.
“…….”
“크록…….”
흘러내리는 용암은 그의 일행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런…….’
민성은 용암의 물결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는 그의 일행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일행의 안전은 책임져야 했다. 그리곤 아직 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곳을 노려봤다. 용암을 넘어 일행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뒤로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방법은 세 가지. 용암을 사용하는 년을 멈추게 하거나, 아직 확인조차 못해본 스킬을 사용하거나, 미친년에게 힘을 보태는 것뿐. 선택지는 많았지만, 사실상 결론은 이미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젠장!”
민성은 눈앞의 망자들을 검면으로 쳐내며 격전지로 급히 전진했다. 터져 나오는 불길들도 기민하게 피해냈다. 닿으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