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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캐쉬상점 쓴다-122화 (122/303)

# 122

122화 - 분기점 (8)

“…….”

광해군의 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순간 민성은 여태껏 그가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 ‘피에 젖은 충의의 길’의 설명을 재차 읽어봤다.

‘류성룡이 빼온 건데요?’

역시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루비로 지른 장비를 보고 충무공의 후손이라 여기는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민성은 그의 말에 동의하듯 되물으며 그 사실을 설명하지 않았다. 후예라는 타이틀 덕에 분위기가 훈훈하게 전환된 것 같기도 하니, 구태여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내 비록 그와 전시에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으나, 그의 친우를 시켜 비밀리에 지급했었지.”

‘거짓은 아닌 것 같은데.’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 미묘하게 변한 남자의 표정에서 진실성이 느껴졌다.

“그렇군요.”

민성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대검의 비사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대검의 주인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히려 궁금한 점은 따로 있었다.

‘애초에 이런 곳은 왜 존재하는 걸까? 그리고 광해군 같은 인물이 왜 이곳의 보스 역할을 하는 걸까?’

던전을 탐사하며 느꼈던 수많은 의문점들 중, 유독 그의 궁금증을 자극했던 두 가지 의문.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 뿐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업적 덕에 대 조선의 명맥을 유지했으나…… 그마저도 부족했지. 아쉽고도 아쉽구나.”

“아쉽군요.”

민성은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대화 속에서 해답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이리 세월을 넘어 그의 후손을 만나게 되다니, 하늘도 참 얄궂구나.”

광해군은 회안의 빛이 가득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이내 다시 민성을 내려다봤다.

“너의 이름을 듣고 싶구나.”

“이민성입니다.”

거짓을 할 거면 완벽하게 하는 편이 좋았다. 민성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성을 바꾸어 말했다.

“이민성……. 이민성이라……. 좋은 이름이로구나.”

“예…….”

광해군은 마치 원래 알던 사이였던 것처럼, 이것저것 잡다한 질문을 던졌다.

‘거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옥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역사적인 폭군이며, 비사대로라면 잔혹한 군주였다. 또한 망자들의 위에 군림하는 던전의 보스이기도 했다. 헌데 어째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말투는 그가 과연 폭군인지 의심이 들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띠링-

[운용되고 있던 제1 던전이 클리어됐습니다.]

의미불명의 새로운 메시지가 뜨자 광해군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곤 그를 내려다봤다.

“반가운 시간은 여기까지구나. 간만에 즐겁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

“별말씀을……. 근데 어째서 당신 같은 분이 이런 곳에서 그런 역할을 맡고 있는 겁니까?”

대화가 파장나려 하자 민성은 궁금했던 점을 떠보듯 물어봤다. 그러자 광해군의 얼굴에선 서서히 미소가 사라져갔다.

‘글렀나…….’

아무래도 시기상조의 질문인 모양이었다. 혹여나 벌어질 전투를 대비해 대검에 힘을 꽉 주었다.

“글쎄…….”

굳은 얼굴에선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배다른 동생을 죽인 업일지도…….”

그 말을 끝으로 광해군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잠겨들었다.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몰라……. 보스가 광해군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구만, 당최 뭔 소린지 알아먹어야 말이지…….”

광해군이 침묵에 잠기자, 용병들의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그러나 민성은 옥좌에 앉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곳, 던전의 실질적인 열쇠 역할을 할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광해군뿐이었다.

“그래, 충무공의 후손이여. 너에게 다시금 물으마. 너 역시 비보를 얻으러 이곳에 온 것이겠지?”

다시 눈을 뜬 광해군은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아마 그가 말하는 비보는 일종의 던전 클리어 보상이겠지. 미국이나 혈교, 그리고 망할 만복 노인네가 원하는 물건일거고.’

잠시간 고민하던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보를 얻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광해군은 잠시간 용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인자한 시선으로 민성을 바라봤다.

“그런가……. 포기하는 것은 어떠하냐? 너희는 엄연히 나의 궁궐에 들어온 침입자들. 나의 궁궐에 들어온 일도, 시종들을 죽인 일도, 원래대로라면 죗값을 물게 해야겠지만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죄를 묻지 않으마. 충무공의 후손을 위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다.”

“신경 써주신 점은 감사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성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수많은 이들이 노리는 비보. 이곳까지 온 이상, 그 역시 비보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뭔지는 몰라도 기회가 되면 내가 차지하는 편이 났지.’

다른 망할 놈들이 비보를 차지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구나.”

아까와 달리, 차갑게 내려앉은 그의 눈빛에선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이곳에서 죽기를 원하니, 나로서도 더는 어찌할 수가 없구나. 이곳에서 죽기를 원한다면 소원대로 죽여주마.”

광해군은 끝말을 맺으며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이곳의 수장이자 보스 격인 광해군이 움직인다. 민성은 대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직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 만전을 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일단 너희는 다른 침입자들을 죽이도록 해라.”

광해군의 손끝이 용병들을 가리켰다.

“키아아아!”

그러자 바짝 엎드려 있던 망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킨 뒤, 괴성을 지르며 용병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미친!”

“안 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용병들은 악다구니를 지르며 허공에 소총을 휘저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제자리에서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광해군에게 당했던 결빙효과로 인해 아직도 발이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득-

“끄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망자들의 새까만 이빨들이 산 자들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혹은 무리지어 한 명에게 달려들어서 뜨끈한 내장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사태가 벌어지자, 민성은 이마를 좁히고 남자를 노려봤다. 비록 총질한 이들을 용서할 정도의 성인군자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기 어려운 이들을 학살하는 모습도 지켜보기 어려웠다.

“죽여라.”

그러나 광해군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펴 민성을 지목했다.

“키아아아!”

그와 동시에, 용병들의 전투조끼를 헤집고 보드라운 살결을 파먹던 망자들은 피 묻은 손을 휘저으며 그에게 뛰쳐왔다.

‘빌어먹을 놈이……. 권유 두 번 무시했다간 수천 명은 잡겠네.’

민성은 사정없이 대검을 휘두르며 몰려오는 망자들의 머리통을 베어냈다.

“1 던전을 이리도 빨리 돌파할 줄은 몰랐건만…….”

민성이 망자들과 전투를 벌이는 사이, 광해군은 낮게 중얼거리며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이참에 다른 침입자들도 같이 처리하는 편이 좋겠지.”

그리곤 지팡이를 들어 바닥에 기괴한 도형들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내 도형이 완성되자 광해군은 도형의 중심에 지팡이를 내려찍으며 작게 외쳤다.

“이리 오너라.”

슉-

그러자 잠시 후, 도형에서 적은 숫자의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들은……?’

“키아아아……크엑!”

“가만히 좀 있어봐, 새끼들아!”

수월하게 망자들을 베어 넘기던 민성은 그에게 검은 손톱을 들이밀던 망자의 얼굴을 검면으로 거칠게 강타했다. 그리곤 광해군이 행한 이변을 예의주시했다.

도형 위에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인물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카일! 카일!”

붉은 머리에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소녀는 동료로 보이는 남자의 몸을 꽉 움켜쥐곤, 동료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헉, 헉. 난…… 괜찮아.”

반쯤 쓰러지다시피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의 복부에는 기다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그 사이로 선홍빛 액체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지친 기색이 뚜렷해 보이는 혈교 무리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작 협조해서 끝내자니까……. 하여튼 이래서 양놈들이 싫어. 그렇죠, 백야 님?”

여인은 기다란 채찍을 쥐락펴락하더니, 소년을 내려다보며 상냥한 웃음을 지었다.

‘뭐지? 저것들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민성은 망자들의 대가리를 쳐부수는 와중에도, 연신 그들의 언행을 살피며 벌어진 일을 유추해봤다. 광해군이 바닥에 기이한 도형을 그리더니, 느닷없이 놈들이 나타났다.

‘혹, 아까의 메시지와도 연관이 있는 건가?’

제1 던전의 클리어와, 광해군. 그 사이에 연계점이 있을 것 같은 묘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사항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저분해진 행색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험악한 것을 보아, 아무래도 두 그룹이 대립한 것 같았다.

“카일이 죽으면 전부 불태워버리겠어.”

소녀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민성은 낮게 혀를 찼다. 성격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서로 양패구상이라도 했나? 근데 분명 들어간 시점이 달랐던 것 같은데…….’

미군은 앞서 출발했다 했었고, 혈교 측은 그들과 함께 던전에 들어왔었다. 헌데 저들이 동시에 등장하니, 여러모로 아귀가 맞지 않았다. 민성이 재차 생각의 퍼즐을 맞춰가려는 그때,

“너희가 나의 분신을 죽인 자들이로구나. 하지만 너희도 결국 나의 궁궐의 일부가 될 것이다.”

마침내 광해군이 몸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나의 군대여.”

광해군이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치자,

콰르르르-

땅이 울리며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에선 헤아리기 어려운 숫자의 기마병들이 솟아 올라왔다.

푸르르-

“크아아아!”

다만 백골이 훤히 보이는 말들과 위에 탄 병사들은 일반 기마병들과 차이를 보였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민성은 몸을 뒤로 뺐다. 계속 망자들 틈에 껴 있다간 포위될 것이 뻔했다.

‘여태껏 봐준 건가?’

민성은 새로이 생겨난 기마병들을 놀란 듯 바라봤다. 오와 열을 갖추어 늘어선 것이, 잘 훈련된 기사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거, 분신이었어? 어쩐지 보스답지 않더라니.”

“쯧쯧, 허파에 허세만 들어차가지고. 분신도 벅차서 저것들이랑 협력하자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딴청이야.”

“이 미친년이! 내가 언제!”

혈교 쪽에서 남녀가 다투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둘 다 그만.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뒤이어 들린 소년의 음성에, 남녀의 고함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카일…….”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레이나, 부탁 좀 할게.”

카일의 단호한 어투에 머뭇거리던 소녀는 이내 입술을 굳게 물곤, 손에 화염을 생성시켰다. 그리곤 남자의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대었다.

치이익-

남자의 부릅뜬 동공이 그 고통을 짐작케 했다.

“카일…….”

“고마워, 레이나. 걱정 끼쳐서 미안해. 이제 모두 매듭지으러 가자.”

“응!”

전투채비를 끝낸 미국 측도 광해군과 휘하의 군대를 노려봤다.

“이놈까지만 협조하자!”

혈교 측에서 여성의 음성이 울리자,

“좋다.”

카일은 당연하다는 듯 화답했다.

‘이놈들 왜 이리 친해? 그래도 비보는 내 거야, 짜식들아.’

민성은 익숙하다는 듯 의사를 교환하며 전의를 다지는 양측을 어이없게 바라봤다. 그리곤 슬며시 그들 중간의 빈 공간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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