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121화 - 분기점 (7)
“크아아아!”
“시끄러워, 인마.”
퍽-
민성은 발로 망자의 신체를 무너뜨린 후, 곧바로 그 위를 넘어오는 망자들의 가슴팍을 일자로 쭉 그었다.
“크어어어!”
열댓 마리의 망자들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리는 가슴을 잡고 비틀린 괴성을 질렀다. 그리곤 놈들의 신체는 이내 힘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미친…….”
용병들은 학을 떼며 민성의 칼부림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봤다. 여유가 없을 땐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말도 안 되는 무력은 현실을 상당히 벗어났다는 것을.
“저놈…… 어디 소속이야?”
민성이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용병들은 곧장 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저 대검……. 혹시 아까 그 애송이들 중 하나가 쓰던 거 아냐?”
누군가 대검을 보고 확신을 얻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에이, 설마. 일단 얼굴이 다르잖아. 애초에 이 난전 속에서 녀석들이 아직도 살아남았을 거라 생각해? 아마 죽은 놈이 쓰던 걸 주워 사용하는 거겠지.”
“……그런가? 하지만…….”
“키아아아!”
퍽-
화살 몇 대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민성의 뒤편에서 달려들던 망자들의 머리에 박혀들었다. 용병들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둘, 열셋…….”
애송이의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애송이가 연신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정말 아까 그 8억짜리 놈이랑 동일인물인 건가?”
“능력자라더니, 확실히 뭐가 있긴 있나 봐.”
용병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신과 민성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 새끼들은 왜 또 멍청하게 가만히 있는 거야.’
민성은 사납게 대검을 휘두르며, 용병들을 슬쩍 노려봤다. 기세를 올릴 불씨를 만들어줬으면, 얼른 합세해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용병이라는 것들이 전세도 읽지 못하고 멍하니 구경하는 꼴이 참 가관이었다.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 새끼들이 진짜…….’
“키아아아!”
민성은 그의 팔뚝을 노리는 썩은 얼굴을 두 쪽으로 쪼개며 힘이 빠진 듯 슬슬 뒤로 물러났다.
“헉, 헉.”
그러곤 일부러 숨을 크게 몰아쉬며 용병들이 있는 방향으로 냅다 줄행랑쳤다.
“키아아아!”
그러자 망자들은 괴성을 지르며 그의 뒤를 쫓았다.
“어어?”
“힘이 빠졌나 보다. 다시 준비해!”
망자들을 압도하던 민성이 갑작스레 내빼자, 당황한 용병들은 이내 소총을 붙잡고 소리 질렀다.
“키아아아!”
“으아아아아!”
‘좋아. 일부러 숫자를 맞춰줬는데 안 싸우면 곤란하지.’
민성은 슬며시 고개 돌려, 인간과 망자들이 격돌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솔직히 체감상, 그가 베어 넘긴 망자의 숫자만 해도 세 자리 수는 될 터. 지금이라면 용병들이 놈들과 다시 맞붙어도 충분히 해봄직할 것이었다.
“고생.”
민성이 전투지대를 빠져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이신이 그를 마중했다. 그의 옆에는 버티다 결국 다시 탈진한 것으로 보이는 아루가 크로스의 등 위에 엎어져 있었다.
“고생이라뇨. 지원해주셔서 감사해요.”
민성은 피식 웃으며 손사래 쳤다. 고생이라 할 것까지도 없었다. 단순한 움직임, 거기다 신성력의 힘 덕인지 대검에 스치기만 해도 가루가 돼버리는 시체무리를 상대하는 건 누워서 떡 먹는 일에 가까웠다.
“아니다.”
“뭐, 그래도 최소한의 밥값은 해줬으니까 저희는 좀 쉬죠.”
그에게 쏠렸던 망자들의 지대한 관심은 다시 용병들에게 넘어간 듯했다.
“아까보다 적어! 이대로 끝내자!”
“전부 죽여!”
“카아아아!”
민성은 일행들과 함께 인간들과 망자들의 교전을 여유롭게 지켜봤다. 잠시간 치열하게 부딪히던 양 전선은 이윽고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어갔다.
“크아아아!”
퍽-
용병들의 대검이 망자들의 면상을 파고 들어갔다. 숫자의 우세를 잃은 망자들은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이것도 못 이기면 병신이지.’
밥 먹으라고 식탁에 밥이고 반찬이고 차려줬는데, 다행히도 잘 받아먹는 모양새였다.
“키아아아!”
“끄아아아악!”
그렇다고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민성은 슬슬 끝이 보이는 전투에서 시선을 거두곤 재차 쏘아져 올라가는 조명탄을 올려다봤다.
피유우웅-
조명탄이 천장에 박히자, 궁궐 내부는 재차 붉은 빛에 감싸였다. 좀 전까지야 여유가 없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유가 있을 때 내부를 확실히 살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딱히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지는 않네. 제발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다시금 살펴봐도 수백 년 묵은 나무 크기의 기둥들만이 보일 뿐, 특별하거나 경계할만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나열된 기둥들 끝에 위치한 황금 옥좌였다.
“키아아아아!”
“얼마 안 남았다! 전부 죽여 버려!”
하지만 옥좌는 비어 있었고, 옥좌와 이어진 계단 밑에서는 여전히 격한 고함소리와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몰린 망자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에헴, 크흠.”
와중에 격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헛기침 소리가 내전을 울렸다. 여유롭게 전투를 관전하던 민성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투로 소란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커다랗게 들린 헛기침 소리가 희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응?’
그리곤 이내 눈을 번쩍 뜨곤 옥좌가 있는 정면을 노려봤다. 언제 자리했는지, 비어 있던 옥좌 옆에는 사극에서나 보던 짙은 초록빛의 예복을 갖춰 입은 미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햇빛을 받지 못한 것만 같은 새하얀 피부는 약간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제 나타난 거지.’
아무리 내전이 시끄러워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도, 조금 전까지 시선을 주었던 장소였다. 민성은 어깨에 걸쳐놨던 대검을 슬며시 내리며 그를 예의주시했다.
“크흠, 크흠.”
미남자는 연신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준비가 됐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상전하 납시오!”
고운 미성이 내전을 울리자, 비어 있던 옥좌 위로 진중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맴도는 표정을 지닌 젊은 남자가 순간이동 하듯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쿠어어어!”
“키아아아아!”
전투를 벌이던 망자들은 갑자기 누구나 할 것 없이 옥좌를 향해 오체투지 했다.
“이건 도대체…….”
용병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엎어져 있는 망자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슬쩍 고갤 들어 용포를 입은 젊은 남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망자 놈들이 몸까지 덜덜 떨어대는 걸 보아, 옥좌에 앉은 인물을 상당히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은…….’
한눈에 그의 정체를 알아본 민성은 눈가를 거칠게 긁적였다. 대검이 보여준 영상 속의 젊은 남자, 광해군이었다.
‘설마 광해군이 던전의 보스 같은 건가?’
민성은 던전이라는 특수성, 자각사의 인스턴트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결합해봤다. 충분히 있을 법한 가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시점에 느닷없이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띠링-
[던전 필천궁(必天宮)의 보스 광해군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레 나타난 메시지가 그의 가설을 확신으로 탈바꿈시켰다.
‘광해군을 죽이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고, 제일 현실성 있는 답안이었다. 그러나 민성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버섯에서 얻은 경험은 전투만이 해답의 전부가 아니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민성은 대검을 움켜쥔 채, 광해군을 바라봤다.
“상당히 재미있는 물건들을 사용하는구나.”
젊은 남자는 팔걸이에 각인된 용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그들을 내려다봤다.
“과거에 왜인들이 사용하던 화승총을 개량한 것이더냐?”
그의 관심은 용병들이 든 소총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상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는 용병들은 침묵한 채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짐이 묻지 않느냐?”
광해군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내전의 분위긴 차갑게 얼어붙어갔다.
쩌적-
심지어 분위기뿐만 아니라, 실제로 바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문제는 바닥과 더불어 그의 발목까지 함께 얼어붙어버린 것이었다. 민성은 경악하며 발목에 힘을 줘봤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크어어…….”
“이런, 시발! 이게 뭐야!”
바닥에 바짝 엎드린 망자들은 물론이고 용병들의 발도 함께 얼어붙었다.
“다시 물으마. 과거에 왜인들이 사용하던 화승총을 개량한 것이더냐?”
잔잔한 미소와 함께 평온한 목소리가 내전을 울렸다.
‘이번에도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곱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소리겠지. 후, 그나마 아직 적대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다행이긴 한데…….’
발목을 얼린 것은 아마 일종의 경고에 가까울 것이었다. 그나마 곧장, 대검으로 발목까지 올라온 얼음들을 슬슬 긁어냈기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민성은 머리를 굴리며 용병들을 흘낏 바라봤다.
깡-
“이런, 시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와 달리, 용병들은 개머리판으로 발목을 감싸고 있는 얼음을 내려찍기 바빴다. 그러나 강한 충격에도 얼음에는 작은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으아아아! 시부랄!”
아무래도 저들이 광해군의 물음에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쯧…….”
그렇다고 용병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어느 정도 상대방의 능력을 파악하기 전까지, 쓸데없는 마찰은 피하는 게 나았다. 민성은 낮게 혀를 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화승총의 개량판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호오, 그래?”
다행히도 광해군은 그의 답변에 관심을 보이는 듯 했다.
“우민들의 후손이라 염려했건만, 다행이구나. 진보해야 그만큼 미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법이니.”
“…….”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민성은 최대한 말의 요지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래, 이미 모두 지나간 일. 흘러간 세월을 잡겠다고 손을 뻗는 것도 참으로 추한 일이로구나.”
‘뭔 개소리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나의 궁궐에 침입한 연유가 궁금하구나. 너희도 비보를 얻으러 온 것이냐? 충무공의 후예여.”
“예?”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한 민성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떴다.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느냐?”
“…….”
아까와는 다르게 목소리에서 어딘가 인자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민성은 그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봤다.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김 씨고 충무공은 이 씬데, 내가 왜 충무공의 후예야. 설마…… 대검 때문에 그런 건가?’
민성은 들고 있는 대검을 슬며시 바라봤다. 분명 그가 쓰고 있는 대검이 충무공이 쓰던 것과 똑같은 것이긴 했다. 하지만 광해군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아니, 대검이 비사를 비췄던 걸 생각하면 아주 연관이 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민성은 일단 한 발짝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좀 더 정보가 필요했다.
“지나간 세월의 흐름을 보아 이미 옅어질 대로 옅어진 핏줄이겠지만 그 정통성은 사라지지 않는 법. 나를 속이려 드느냐? 그 대검을 하사한 이가 나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