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114화 - 또 다시 상점. (9)
땅굴 안은 일정 거리마다 굵은 나무가 박혀 있었다. 아마 땅굴의 급작스러운 붕괴를 방지하기 위함이리라.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은 줄에 임시로 매단 랜턴이 어두운 시야를 밝혀줬다. 아직 겨울인지라 사방에선 짙은 한기가 몰려왔다.
파삭-
민성의 발부리에 부딪혀 떨어져 나간 작은 돌멩이들이 앞사람의 뒤꿈치를 두들겼다.
“조심해.”
그러자 용병은 슬쩍 고개를 돌려 민성을 노려봤다. 굴이라는 특성상 큰 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눈빛만으로 그 의도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민성이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자, 눈을 부라리던 용병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되는 거야.’
벌써 수십 분은 내려간 것 같건만 이놈의 행군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긴장을 놓칠 수는 없었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했다간 도미노 꼴이 날 것이다. 나무와 흙으로 임시로 만들어 놓은 계단도 점점 엉성해짐을 느꼈다. 슬슬 길이 더 험난해지려는 느끼려는 찰나,
“어?”
앞쪽에서 작은 감탄사가 들려왔다. 민성은 목적지가 그리 멀지않았음을 깨달았다. 잠시간 더 종아리에 힘을 주고 걷자 가파르던 길이 서서히 평평해지기 시작했다. 좁은 길은 점차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들을 거대한 동공으로 인도했다.
“와!”
여기저기서 미세한 탄성이 들려왔다. 혹시라도 울림에 동공이 무너질 것을 염두에 둔 용병들의 작은 감탄사였다.
“여긴 도대체…….”
민성 역시 두리번거리며 작은 탄성을 뱉어냈다. 아까까지의 좁은 땅굴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게 하는 방대한 동공도 놀라웠건만, 무엇보다 민성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넓은 한옥이었다. 하지만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담장을 봐선 단순한 한옥은 또 아닌 것 같았다. 언뜻 크기를 가늠했을 땐 작은 궁궐이라 봐도 무방했다.
‘기왓장을 봐선, 한옥이긴 한옥인데……. 응?’
담장 언저리를 살피던 민성은 눈매를 좁히고 좌측을 주시했다. 동공의 벽면에는 넓적한 구멍이 나 있었고, 그 안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돌계단이 보였다.
‘무식한 새끼들……. 설마 입구가 있는데 찾을 생각도 안 하고 뚫은 건가?’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 걸로 보아 저쪽이 원래의 입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만들었다.
“오오! 이런 곳이 있다니! 도굴꾼 놈들도 멀었군.”
민성이 다른 곳에 한눈판 사이, 행렬의 끝에 위치해 있던 김도진까지 동공에 들어왔다. 김도진은 동공의 붕괴여부는 아랑곳 않는지 연신 커다란 탄성을 질러댔다.
“너무 큰 소리 내시면 안 되는데, 눈치가 너무 없으시네요. 난 눈치 없는 남자는 별로던데.”
담장 중심의 대문을 살피던 여인은 싱긋 웃으며 그의 행위를 책망했다.
“무너질 것 같지는 않은데…….”
김도진은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럼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알아서 움직일게요, 그럼. 백야 님?”
여인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소년을 내려다봤다.
“더 지체하면 늦는다. 이동하자.”
“당연하죠! 놈들이 독점하게 놔둘 수는 없어요. 얼른 가요, 백야 님!”
여인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원래 던전은 이리 쉽게 들어오지 못한다. 열리는 날짜는 고사하고 시간조차 예측할 수 없는 게 그 이유였다. 거기다 열리는 장소마저 불확실했기에 던전을 찾는 일은, 일부 극강 세력을 제외하곤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었다.
‘미국 놈들이 우리보다 더 양아치라니까.’
다른 집단과 달리 놈들은 과학을 바탕으로 던전을 찾아낸다. 과거에 벌였던 이라크 전쟁만 해도, 던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침략을 감행했던 놈들이었다. 그리고 과정만 다를 뿐, 이곳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국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자각사나 눈을 부라리고 혈교의 행사를 방해하는 마교. 그 두 집단은 아직 던전을 탐지할 수 있는 방도를 구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덕에 미국이 아시아권에서 더 난리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혈교는 백야의 예측능력을 기반으로 던전을 찾아냈다. 혈교 십대장로들 중 둘이 그의 호위를 맡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판단돼 혈령대까지 데려왔으니, 그만큼 백야가 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했다.
‘만약 우리도 백야 님이 없었다면…….’
모르긴 해도 놈들에게 털린 던전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물론 혈교에 소년을 대체할 카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던전의 존재를 발견한 뒤, 유사시를 대비해 유망주들을 여럿 뽑았었다. 하지만 소년만큼 정확성 높은 예측을 보이는 자질들은 없었다.
“백야 님 손 잡고 뭐 하냐? 또 발정 났어?”
심드렁한 남자의 목소리에 여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검밖에 휘두를 줄 모르는 무식한 놈이 툭하면 성질을 건든다. 근례에 백야 님 앞에서 너무 무례한 모습만 보여드렸었다. 무식한 저놈은 그렇다 쳐도, 그녀는 자중할 필요성을 느꼈다.
“호호호. 백야 님 얼른 가요.”
여인은 터진 입술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할짝이며 소년의 손을 상냥하게 잡아끌었다.
‘몰랐으면 몰랐지. 알게 된 이상, 그냥 넘겨줄 생각은 없지. 오히려 우리가 차지해야만 해.’
미국 놈들이 먼저 한 발 걸치긴 했지만, 결국 결실을 챙겨가는 것은 그들이 될 것이었다.
“저 미친년 또 시작인가 보네.”
여인의 입가에 걸린 악독한 미소를 본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대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여인과 소년이 뒤따랐다.
쾅-
‘저놈들도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민성은 놈들이 들어가고 굳게 닫힌 대문을 노려봤다.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모습을 봐선 이곳의 명확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만복 노인과 연관이 있는 만큼 그가 정보제공자가 아닐까 싶었다.
“저희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민성은 아루의 작은 소곤거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좀 지켜보고요.”
성급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노인이 그에게 제공한 정보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더 조심하며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용병들이라는 좋은 방패를 활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였다.
민성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용병대열의 중심에 서 있는 김도진을 바라봤다. 연유는 모르지만 그는 민성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보냈다. 그 감정을 잘 이용하면 분명 이득으로 연결되는 실마리를 잡아올 수 있을 것이다.
“자! 우리도 출발하자! 용병은 첫째도 목숨, 둘째도 목숨이다. 위험한 일은 없다고 하지만 뒤지면 너희 마누라만 호강시키는 거야, 알았어?”
김도진이 호쾌하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일부 용병들은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근데 아까 놈들은 뭔데 먼저 들어가는 겁니까? 혹시 저희가 받은 정보와는 차이가 있는 것 아닙니까?”
조심성 없는 혈교 무리의 움직임은 용병들의 의심을 사기 충분했다. 낯선 곳에서 거칠 것 없이 움직이는 작태가 못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들이 칼밥을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김도진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 지르며 말을 이었다.
“두당 천만 원짜리 작업이다. 거기다 성공보수로 이천을 더 챙겨주는데, 정보의 절대적 차이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 아냐!”
“…….”
용병들은 단합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사실 김도진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제공된 정보가 부족하다고 푸념하기엔 이번 일에 걸린 액수가 너무 컸다. 정보의 부족함을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금액.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도 쉽사리 만져보기 어려운 돈이었다.
“겁쟁이는 필요 없다. 지금이라도 빠지고 싶은 새끼는 돌아가.”
김도진이 손가락을 펴 그들이 나왔던 땅굴을 가리켰다. 하지만 누구도 등을 돌리지 않았다. 여기서 돌아가면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다시 토해내야 했다. 받은 돈을 뱉어내는 일만큼 가슴 아픈 일도 없었다. 거기다 전쟁터를 전전했던 전사의 자존심이 철수를 허락지 않았다.
“새끼들. 돌아갈 생각도 없었으면서 앓는 소리 하긴.”
이탈자가 나오지 않자, 김도진은 장난스럽게 말을 던지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나갔다.
“나 역시 빌어 처먹을 의뢰주 새끼에게 받은 정보가 없으니, 브리핑은 없다!”
“푸하하하!”
용병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도진은 손을 들어 소리를 잠재웠다.
“앞전에 말했듯이 대단위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만 내 통제에 따르고, 나머지는 각 용병대장의 주관에 맡긴다. 단순한 작업이지만, 한순간의 방심은 곧 목숨의 위기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옙!”
용병들의 큰 목청이 마음에 들었는지 김도진은 잠시 구레나룻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몇 번 헛기침해 목을 가다듬곤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가보자! 돈 귀신 새끼들아!”
“와아아아아!”
용병들은 큰 환호성을 지르며 김도진의 연설에 호응했다.
“대열의 좌측, 팔성 용병대부터 차례대로 진입한다!”
그리곤 그의 명령에 따라 차례차례 집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민성이 끼어 있던 용병대의 차례가 되자, 민성은 일행들과 함께 집 내부로 진입했다. 진입 직전 들은 김도진의 연민 가득한 한마디는 덤이었다.
含弘門(함홍문).
대문 위에는 작은 목패가 걸려 있었다.
“고요.”
한옥 안으로 들어선 이신의 첫마디였다. 민성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는 생각 이상으로 넓었다. 내부 곳곳에 배치된 한옥 건물들은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던 건물들을 쏙 빼닮았다.
민성은 뒤편에 위치한 담장을 슬쩍 어루만졌다. 세월의 흐름을 빗겨갔는지, 땅속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갈한 외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곳,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머리를 굴리던 민성은 이윽고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이곳은 과거에 놀러갔었던 경복궁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경복궁을 작게 축소시켜 놓은 크기였으나, 건물의 배치가 완벽히 일치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굳이 이런 곳에 건물을 지었을까? 희대의 폭군이라더니 어지간히도 할 짓이 없었나보네.’
묘지의 주인을 떠올리자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정은 없는 것 같다. 계속 이동한다!”
김도진과 그의 용병대가 선두에서 함정 확인을 끝냈는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생각을 접은 민성은 용병들을 따라 더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호수에 위치한 정자를 지나치고 몇 개의 가옥들을 보내자, 그들은 다른 한옥들보다 유독 거대한 크기의 건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강녕전(康寧殿).
과거 조선의 임금들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로 활용했다는 건물이었다. 여타의 건물들과 달리 지붕에 달린 용마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던전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 같은데. 이거 사실 유적탐사대 아니야?’
앞서 들어간 혈교 놈들이나 미국 측의 인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고즈넉한 느낌의 옛 건물들뿐. 단체로 몰래카메라라도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민성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대기 중인 용병들을 바라봤다. 저들은 그저 희희덕대며 어디에 돈을 사용할지 즐거운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답답함에 민성이 재차 한숨을 내쉬려는 그때,
띠링-
[피에 젖은 충의의 길이 던전의 숨겨진 비사를 비춥니다.]
‘응?’
느닷없는 안내음과 동시에 민성의 시야에 한편의 영상이 비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