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112화 - 또 다시 상점. (7)
“응!”
소녀의 화사한 미소를 보자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꼈다.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엄연히 그녀의 동료지 보호자는 아니었으니까.
‘제발…….’
그곳엔 틀림없이 레이나를 갉아먹는 화마를 고칠 방도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어째서 이런 자그마한 땅에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레이나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만에 하나 모든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레이나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도록 조작해 놨다. 이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지 도박으로 끝날지 확인할 일만 남았다.
까득-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문 카일은 레이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막사를 나갔다.
*
“그래서 이번에 말이야…….”
임시로 구성된 베이스캠프. 꽤나 많은 사람들이 뜨문뜨문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던전 탐사를 위해 만복노인이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평지였지만, 그들은 제 집 마냥 편히 앉아 있거나 짧은 숙면을 취했다.
끼릭-
혹은 갖고 있는 총기를 스윕하거나 단검 날을 살피며 시간을 죽였다.
“…….”
그리고 그런 그들을 미군들이 넓게 둘러싼 채 감시했다. 실수는 방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목적이 일치한다고 같은 아군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용병 놈들은 총까지 보유한 상황.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표면적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베이스캠프 안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돌았다.
“시팔……. 많이도 불렀네. 후우…… 얼마 받았냐?”
바윗돌을 의자 삼아 앉아 있던 남자는 짙은 담배연기를 뿜으며 상대방을 바라봤다.
“큰 거 1장.”
“……두당 천씩 뿌렸다고?”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이내 인상을 찡그리곤 담배만 빽빽 피워댔다.
“니미럴……. 아무래도 윗놈 새끼가 200 떼 간 것 같은데.”
“뭐? 퉤, 시발 새끼들. 우리같이 몰린 인생들의 돈까지 채가고 싶나!”
상대방이 격한 반응을 보이자, 남자는 피식 웃으며 꺼진 꽁초를 바닥에 던졌다.
“됐어, 새끼야. 끝나고 한 잔 빨면서 가슴이나 주무르러 가자고. 어차피 막장 인생 한껏 즐기다 뒈져야 할 것 아냐? 니기미……. 그나저나 언제 출발하는 거야? 다리 아파 죽겄네. 으차!”
그리곤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반동으로 남자가 메고 있던 소총이 좌우로 흔들렸다.
“거기! 앉아!”
그와 동시에 외국제 소총들이 그를 겨냥했다. 말은 못 알아들어도 총부리가 의미하는 것은 알아먹었다.
“어이구, 코딱지만 한 땅 지킨다고 항상 고생하시는 분들의 말씀이신데 당연히 그래야죠.”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슬며시 돌 위에 엉덩이를 디밀었다. 그제야 미군들도 슬며시 소총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시팔, 양놈 새끼들. 하여튼 겁은 오질나게도 많아가지고.”
남자는 바닥에 침을 찍 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시발, 들으라지! 잘나신 놈들이 우리말을 알아나 듣겠어?”
“자, 자. 진정하라고. 괜히 심기 건드렸다가 난리라도 나면 우리만 손해인 거 알잖아?”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올라온 흥분을 내려앉혔다. 친우의 말대로, 혹시라도 마찰이 벌어질 경우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고 그들의 죽음은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 애초에 용병이란 그런 존재니까.
“이 새끼들……. 이래서 많이 쥐여 준 거 아니야? 미군들이랑 쌈질이라도 하라고?”
한 건에 천만 원이라는 소리에 덥석 물긴 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 꺼림칙한 느낌이 올라왔다. 소수 모집이라던 초기의 말과 달리 이렇게 많은 숫자를 동원한 것도 그랬다. 가벼운 유적탐사라 했을 때부터 의심해봤어야 했다. 목숨 같은 돈이라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짜증이 치솟자 남자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뭐, 별일 있겠어? 쉽게 생각하자고. 돈 많은 양반들이 돈 좀 써주시겠다는데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가야지.”
“……그러길 바라야지.”
“그나저나 돈이 좋긴 한가 봐? 아까 그 놈들도 그렇고, 어린 새끼들이 돈 벌려고 이런 곳까지 기어들어오네, 시발.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뭐?”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려던 남자는 상대방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북적북적하네요.”
민성은 임시로 만든 베이스캠프를 살피며 낮게 말했다. 미군의 인도를 받은 덕에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다. 미군이 펼친 경계망을 봤을 때만 해도 사단이 벌어졌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어? 저기 좀 봐.”
“큭, 오늘 무슨 날인가? 젖비린내 나는 놈들도 보이네.”
모여 있는 이들과 액면가 차이가 나서 그런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곤 그들을 빤히 주시했다. 민성은 금방 그들을 향한 수군거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곤 그들을 빤히 응시했다.
“아루는 무서워요…….”
“크로…….”
아루는 괴조의 목을 끌어안곤 불안한 듯 사람들을 흘낏거린다.
“조심.”
이신도 긴장한 듯 활 자루를 꽉 쥐곤 전방을 주시했다. 민성은 그들의 심경변화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 역시 눈앞의 상황에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망할 노인네. 이런 건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어찌 된 일인지, 이곳에 있는 전원이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미군이야 군인이니 그렇다 쳤지만, 딱 봐도 일반인인 것들이 총을 보유하고 있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활과 대검 그리고 괴조. 현대문물 앞에선 초라하기 그지없는 물건들이었다. 아무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능력자라 하더라도, 총 앞에선 순한 어린양에 불과했다.
‘괜히 데려왔나.’
그야 ‘바람을 타다’를 사용해 여러 가지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지만, 동료들은 아니었다. 언제든 눈먼 총알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뭣 하러 이런 곳까지 왔어? 돌아가서 공부나 해.”
“군대는 다녀왔냐?”
그래서인지 그들은 민성들을 깔보며 업신여겼다. 일부는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기도 했지만 극소수였다.
“반응하지 마요.”
민성이 작게 말하자, 그의 곁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좋다고 시비 걸 놈들이었다.
“어? 가만. 저놈, 방송에 나왔던 놈 아니야?”
민성을 알아본 누군가가 외치듯 말하자 얕보던 눈빛들에 호기심이 서렸다.
“누군데?”
“그 타워인지 뭐시긴지에서 제일 공로를 많이 쌓은 놈이라고 하던데? 등신아. 뉴스 좀 보고 살아라.”
수많은 시선들은 민성이 들고 있는 대검으로 쏠렸다. 총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장난감 같은 물건.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아! 알지. 근데 범죄자 아니었어? 그것도 무려 8억짜리…….”
“뭐? 8억?”
호기심은 이내 탐욕과 욕망 서린 호기로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눈 감고 총질 한 번이면 무려 8억이었다. 여기저기서 K-2소총의 덮개부분 만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서라. 여기서 총질했다간 미군한테 전멸 당할걸.”
“크흠…….”
누군가의 냉철한 한마디에, 현실직시한 사람들은 헛기침하며 슬며시 총을 내려놨다.
‘쓰레기 같은 놈들.’
미군이란 말에 꼬랑지 내리는 꼴들이 우스웠다. 민성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용병들을 노려봤다. 그때, 건장한 남자 하나가 미군의 경계선을 뚫고 무리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길게 자란 구레나룻이 굵은 얼굴선과 꽤나 잘 어울렸다.
“자, 주목! 이제 일어나, 잡것들아! 지금 미국 놈들이 들어갔다!”
남자는 크게 고함치며 사람들의 이목을 그에게로 집중시켰다.
‘누구지?’
민성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했다. 사내 한 명의 등장으로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한 치도 주눅 들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보통 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골의 대장 김도진.
열악한 용병 생활을 10년 가까이 이어가고 있는, 용병업계에선 모르면 간첩 취급 받는 인물이었다. 용병업계에는 우스갯소리로 흔히 이런 말이 있다. 3개월 버티면 오래 살았다고. 탄환과 포탄이 오가는 현장을 누비는 삶이었기에, 제 수명을 누리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었다. 거기다 전쟁의 참혹함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는 이들도 상당한 걸 감안할 경우, 김도진의 용병생활 10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저희는 언제 출발합니까?”
이곳에 모인 대다수의 용병들이 돈을 떠나, 그의 참여를 계기로 모였다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를 바라보는 용병들의 시선에는 존경과 신뢰가 묻어나왔다.
“우리도 이제 곧 출발한다! 그러니까 왔지. 이런 병신 같은 질문을 한 놈은 누구야!”
구레나룻의 고함에 용병들은 킥킥거리며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미군들도 경계의 눈빛을 보낼 뿐, 더 이상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곧 출발한다! 모여! 담배 피울 새끼는 빨리 태우고 와!”
“죽이자! 이쪽으로 집결해라!”
용병들은 잘 훈련받은 군인들처럼 일시분란하게 평지에 정렬했다. 받은 돈만큼 일해 준다. 용병의 철칙 중 하나였다. 담배를 꺼내어 물은 김도진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봤다.
“아직 10여 분 정도 남았으니까 들어가기 전에 각 용병대장들은 식솔들 간수 잘하고! 애먼 데서 자빠져 뒤지게 하지 말란 소리야! 알아먹었어?”
거칠지만 어딘가 다정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말투였다.
“대장님의 식구부터 챙기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흑골들이 섭섭해 하겠습니다?”
“뭐야? 섭섭해 하기는 개뿔! 오히려 잘 먹여서 살만 뒤룩뒤룩 쪘지!”
구레나룻이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올리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도진은 그의 뒤쪽에 정렬해 있는 무리를 바라봤다. 흑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황색 망토를 두른, 그의 자랑스러운 용병대였다. 그가 이끄는 용병대 흑골은 세계각지의 전쟁터를 누비며 그들의 몸값을 올렸다. 그와 동시에 명성도 하늘 높이 치솟았다. 비록 용병이라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분쟁국가들 중 흑골을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장님. 슬슬…….”
“음? 아, 맞다! 그래!”
대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김도진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곤 분주해진 현장을 향해 크게 외쳤다.
“아, 그전에! 우리의 물주님이 보낸 대표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니까, 귓구멍을 활짝 열고 들어야 한다! 특히 레드 비트팀이랑 구르카 팀! 알아들었어?”
이번에 김 회장이 지급한 금액은 단일 임무로는 역대 급 액수였다. 그로 인해 이곳에는 흑골 이외에도 다수의 용병대가 모인 상황이었다. 김도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용병대 둘을 언급했다. 활동지역이 달라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으나, 악랄하지만 일처리는 확실하다는 게 그들의 후문이었다.
“옙! 걱정하지 마십쇼!”
“새끼들……. 하여튼 말만 잘…….”
웃으며 담배를 툭툭 털어내던 김도진이 갑자기 눈을 크게 치켜떴다. 분주히 움직이는 용병들과 달리 얼타고 있는 세 남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김도진의 이마에 분노로 일그러진 주름이 잡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