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111화 - 또 다시 상점. (6)
‘왜 하필 광해군의 묘지가 던전이라는 걸까.’
인터넷을 이용해 사전조사를 한 바로는, 광해군의 묘지는 그저 작디작은 봉분에 불과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걸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은 있었다. 노인이나 미국 측이 허름한 묘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게 첫째였고, 그가 쓰고 있는 대검의 주인과 묘지의 주인이 아주 연관이 없지 않다는 점이 둘째였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특별히 추측할 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그래. 내가 너무 앞서간 걸지도 몰라.’
그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은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민성은 피식 웃으며 막연한 추측을 접었다.
“저……. 이제 다시 탑승하셔야 합니다…….”
운전기사 역할을 하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민성들을 불렀다.
“어차피 바로 앞 아니에요? 아루는 걸어갈래요.”
내비게이션에 찍혀 있던 지도를 떠올린 아루는 주저 없이 앞장서더니 직진하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는 걸어서 30분가량.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민성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운전기사를 바라봤다.
“일행이 그렇다고 하니, 여기서부터는 저희끼리 가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그러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걸 들고 가십쇼.”
민성이 살짝 고개를 숙이곤 이동하려 하자, 남자는 급히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강민성 님과 일행 분들의 신원을 증명해줄 ID카드입니다. 회장님께서 이미 언질을 주셨다고는 했지만, 혹시 모르니 챙겨가라 하셨습니다.”
민성을 소심하게 바라보던 남자는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민성에게 ID카드를 넘긴 남자는 황급히 차에 올랐다. 그리곤 차를 돌리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뭐지?’
예사롭지 않은 남자의 반응에 민성은 눈가를 긁어내리며 점이 되어가는 차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자.”
신이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아루를 가리켰다.
“그러죠.”
민성과 신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공허한 차도를 따라 걷자 곧 그들 앞에 넓은 통제선이 나타났다. 도로에는 차량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와 임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검문소 인근에는 얼룩덜룩한 회색 무늬가 들어간 군복에 중무장한 병력들이 여럿 돌아다녔다. 그들은 민성들이 점차 가까이 접근하자 경계와 위협의 눈길을 보냈다.
‘미군인가?’
걸음을 멈춘 민성은 그들을 가만히 주시했다. 복장도 그가 알고 있던 군복의 색깔과 달랐거니와 무엇보다 확연히 다른 피부와 눈동자색이 확신을 주었다.
“어떡하죠?”
아루의 물음에도 민성은 침묵한 채 미군을 노려봤다. 광해군의 묘지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저 통제선을 거쳐야만 했다.
‘미국이 주축이 되어 조사한다더니, 설마 주한미군을 이용한 건가?’
묘지를 조사한다고 했을 때부터 들었던 의문 중 하나가 풀렸다.
아무리 폭군의 묘지라 하더라도 엄연히 조선 임금의 묘지였다. 말이 조사지 분명 무덤을 파헤칠 게 뻔하다고 생각했었다. 거기다 참배하러 오는 일반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만큼 무엇보다 기밀유지가 최우선 사항이었을 것이었다. 헌데 그것을 미군이라는 카드로 해결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혹시 모르니 두 분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훈련이라 빙자하고 실탄을 들고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여나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의 일로 애먼 두 사람이 피해를 입기 원하지 않았다. 민성은 아이템 창에서 대검을 꺼낸 뒤, 통제선 쪽으로 접근했다.
“Stop!”
민성이 100m 가량의 거리까지 접근하자, 미군들은 파지하고 있던 총을 민성에게 겨누며 위협했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써, 이 새끼들아.’
“그쪽으로 지나가고 싶습니다.”
아직 ‘바람을 타다’의 쿨타임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민성은 대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비쳤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수군대던 미군들 사이에서 건장한 몸집의 미군 하나가 민성 쪽으로 다가왔다.
“주한미군 소속 대위 켄 그리피입니다. 이곳부턴 통제구역입니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그리피는 살짝 어눌하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의 한국어를 구사했다. 그는 의무적인 작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들고 있는 M4소총의 총구를 민성에게 겨누었다. 그리곤 바닥에 놓인 민성의 대검을 간간히 바라봤다.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금일부터 며칠간 안에서 합동훈련이 진행됩니다. 들어가시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희는 탐사를 위해 왔습니다.”
그리피가 난색을 표하자 민성은 남자에게 받았던 ID카드를 내밀었다. ID카드를 받은 대위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어이!”
그리피가 손짓하자 병사 하나가 소총을 덜걱거리며 빠르게 달려왔다.
“확인해봐.”
“예!”
ID카드를 받아든 병사는 어디론가 급히 뛰어갔다. 잠시 후, 아까의 병사가 안쪽에서 달려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위님! 김 회장 소속입니다!”
‘뭐라는 거야.’
민성은 습관적으로 왼쪽 눈가를 긁다가 느껴지는 고통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빠른 대화속도와 영어가 합쳐져 내용을 유추하기도 어려웠다. 영어 좀 공부해둘 걸 그랬다.
“바리케이드 치워!”
그리피의 명령이 떨어지자 미군들은 도로를 점령하고 있던 바리게이트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들어오십쇼.”
허가가 떨어지자 민성은 내려놓았던 대검을 회수하곤 일행에게 손짓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시면 베이스캠프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일행과 합류하신 뒤 차후 내려올 통제를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피는 손을 들어 두 갈림길 중 우측 길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민성은 가볍게 목례하곤 일행들과 함께 통제선을 넘어갔다.
*
임시로 설치된 베이스캠프의 한 막사 안. 병사 하나가 급하게 막사 안으로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아 있는 붉은 머리 소녀에게 거수경례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입구까지 다 판 거야?”
레이나는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지, 입을 삐죽거리며 그를 쏘아봤다.
“예! 그렇습니다!”
병사는 경직된 것처럼 꼿꼿이 서서 소녀의 말에 답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위에서 돌가루 하나라도 떨어지면…… 알지?”
“최…… 최선을 다해 설치했습니다!”
“흥, 마음에 안 들면 불쏘시개로 만들어버릴 거야.”
소녀는 생글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상관에게 그녀의 성격을 들었던 병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허공만 바라봤다.
“그만해, 레이나. 저들이 있기에 우리도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거야.”
옆에서 서류를 살피던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소녀를 말렸다. 그리곤 병사에게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병사는 재차 거수경례를 해 보인 뒤, 급히 막사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지루해! 지루해 죽겠어!”
병사가 나가자 소녀는 몸을 배틀며 소리쳤다.
“이제 곧 출발이잖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땐 마음껏 움직일 수 있어.”
그러자 카일은 서류를 내려놓곤 상냥한 미소를 보이며 그녀를 다독였다.
“근데 우리들만 가는 거 아니었어? 걔네들은 뭐야? 응? 나한텐 얘기 안 해줬잖아!”
그녀가 말하는 걔네들이란 분명 불편한 동업자를 말하는 것일 터. 카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입구까지만 동행하고 그 뒤엔 각자 움직일 거야.”
사실 그 역시 냄새나는 동양인들과 함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 값과 일부 냄새를 맡은 놈들 덕에, 본국에서 새롭게 떨어진 지령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레이나가 알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처럼 순수한 동심을 가진 소녀의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다.
“그래도 우리끼리만 가는 줄 알았는데…….”
“레이나도 알잖아. 던전은 인원이 많은 게 전부가 아니란 걸. 나올 때는 우리만 나오게 될 거야.”
카일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녀의 머리를 보석 만지듯 쓰다듬었다. 오롯이 둘만 있을 때, 레이나는 평소 보이지 않던 어리광을 부린다. 그녀의 풀어진 모습을 독점하는 것. 어찌 보면 특권에 가까운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 그놈들이랑 싸우면 안 돼? 응? 꽤 강해 보였는데, 죽으면 못 싸우잖아!”
그녀가 말하는 놈들이란 필시 황인 놈들을 이끌던 세 명의 남녀가 분명했다. 그 중 묵직한 대검을 든 놈과 요사스러운 년을 봤을 땐, 쉽사리 승부를 장담할 수 없긴 해도 밀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창백한 소년의 공허한 동공은 왜인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었다.
‘마치 내 속내를 읽히는 것만 같았어. 설마 정신계통의 능력자인가……. 아니야, 그런 고급 스킬을 일개 용병집단의 대가리가 갖고 있을 리 없지.’
하지만 다시금 떠올려 봐도 거부감이 드는 눈빛이었다.
“싸우면 안 돼? 응? 싸우면 안 돼?”
레이나의 독촉에 퍼뜩 정신을 차린 카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통령 아저씨가 레이나가 말 안 들었다고 실망하실 텐데?”
그러자 레이나는 머리를 붙잡고 잠시간 갈등했다. 그리곤 이내 결정한 듯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럼 할 수 없지! 이번에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럼 또 대통령 아저씨가 칭찬해 주겠지?”
레이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카일은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던전 탐사를 완수했을 때 들었던 칭찬을 아직 잊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칭찬만 해주시겠어? 새로운 장난감도 주실걸?”
“새로운 장난감?”
레이나는 눈을 반짝이며 카일을 올려다봤다. 그의 머리에서 떨어진 은빛 머리카락 한 올이 코를 간질였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이제 나가자. 얼른 끝내버리는 거야!”
“응!”
이번 탐사는 이곳에 있는 두 명과 일개 중대급 인원수가 진행한다. 과거에 레이나가 벌였던 사고 덕에, 상부는 기존보다 최소한의 군인만 데리고 갈 것을 요구했다. 그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인원수가 늘어봐야 오히려 그들에겐 방해가 될 뿐이었다.
“이번에도 방해된다고 막 불 지르면 안 돼?”
“알았어!”
카일은 재차 레이나에게 확인을 구했다. 군인 한 명이 불타오를 때마다 그가 써야 하는 보고서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큰 의미는 없는 행위였지만, 그래도 침묵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가자.”
카일은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잡았다. 본국이야 한국에 있는 던전을 독점하려 그라운드 마켓을 설립했었지만 그는 달랐다. 이 자그마한 아시아 땅에 온 목적이 있었고 뜻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의 시발점이자 입구. 그가 알아낸 던전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보고 덕에, 본국은 그저 자원이 좀 많은 던전이라 생각할 것이다. 혹시나 싶어 연구원들의 입도 단단히 단속시켜 놨다. 그렇다고 그들을 마냥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탐사가 끝날 때까진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이다. 가족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