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캐쉬상점 쓴다-108화 (108/303)

# 108

108화 - 또 다시 상점. (3)

“이번 일이 끝나면 죽이셔도 됩니다.”

“……정말인가요?”

“그보다는 박 회장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잖습니까?”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박 회장님께서 그를 죽이시는 것과는 별개로, 저는 그를 계속 이용할 겁니다.”

‘설마 제가 죽이지 못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노인의 말을 즉각 이해한 박 회장은 발끈하여 쏘아붙이려 했다. 하지만,

“이해……했습니다.”

속내와는 다른 말을 뱉어냈다. 그녀의 위치를 감안했을 때, 이 이상 노인을 자극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였다. 여인이 고분한 태도를 보이자 노인은 가벼이 손뼉을 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드디어 내일! 우리가 염원하는 진화의 길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날입니다. 어리석은 양놈들은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놈들의 콧대를 확실하게 꺾어버립시다!”

“맞습니다! 그라운드 마켓 따위로 저희의 시야를 가리려 했던 양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

노인이 목청을 높이자, 그 뒤를 좌중들이 환호하며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새로운 시작과 우리 빅스를 위해 잔을 듭시다! 아참, 그 전에 새로이 소개할 얼굴들이 있습니다.”

“정 회장님이 끝 아니었습니까?”

좌중들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정 회장을 끝으로 당분간 모임에 추가인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던 이가 김 회장이었다. 헌데 이리 갑작스럽게 인원을 추가한다고 하니 그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이번에는 제 소개로 오신 분들입니다. 들어오게.”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노땅들이 상당히 많군.”

등에 거대한 대검을 이고 있는 남자가 좌중을 보며 피식거렸다.

“무례하게 좀 굴지 마. 자각사 일도 말아먹은 놈이 입만 살아서.”

붉은 머리의 여자가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그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진짜 작작 좀 해라. 맨날 생리 하냐?”

“이 새끼…….”

“그만.”

병약해 보이는 소년의 한마디에 옥신각신하던 남녀는 말다툼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리곤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뭐…….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하지만 이미 남자의 말을 들은 좌중들의 눈초리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 상황을 예기치 못했던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냉랭한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했다.

“우리들의 계획에 상당한 도움을 제공해줄 사람들입니다.”

노인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좌중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김 회장님……. 아무리 회장님의 추천이라 하더라도 사전에 언질은 주셨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건 좀 불쾌하…….”

“것 참. 쫑알쫑알 시끄럽네.”

쾅-

조심스럽게 의사를 피력하던 정 회장의 가랑이 사이로 묵직한 대검이 내리꽂혔다.

“어……. 어……?”

얼어붙은 채 눈만 끔뻑이던 정 회장은 그의 발치를 살폈다. 검날이 은은한 빛에 반사되어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한 치만 더 깊이 들어왔더라도 그의 중심부는 온전치 못했을 것이었다. 그제야 상황을 직시한 정 회장은 몸을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바지에선 옅은 지린내가 올라왔다.

“회장님!”

시중을 들던 가면들이 허리춤에 달고 있던 권총을 꺼내 남자에게 겨누었다.

“좋아! 이제야 좀 분위기가 사는 것 같네.”

“하아……. 결국 또…….”

남자의 돌발적인 행동에 여인은 깊은 탄식을 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쏠 거면 빨리 쏴. 그래야 나도 움직이지.”

총부리들이 그를 위협했지만, 남자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가면들을 도발했다.

“이 미친 새끼야! 그만하라니까!”

여인의 악다구니에도 남자는 사나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상황이 점점 험악하게 돌아가자 여인은 옆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은 마치 이 일과 무관한 사람처럼 그들의 행위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백야 님…….”

소년이 가만히 서 있자 작게 한숨을 내쉰 여인은 더 이상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그리곤 소년을 따라 그저 상황을 주시하기만 했다.

“얼른 쏴보라니까! 안 그러면…….”

“…….”

남자는 바닥에 꽂힌 대검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의 이동경로를 따라 총부리도 같이 이동했다.

“히익!”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정 회장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가 땅을 기는 속도보다 남자가 다가오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제자리에서 수영하듯 팔을 휘젓던 정 회장이 미친놈처럼 주절거렸지만,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앞에 도착한 남자는 정 회장을 내려다보고는 손을 높이 쳐들었다.

철컥-

더 이상 지켜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가면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자네도 거기까지 하게. 이쯤 하면 무력시위론 충분하지 않았나?”

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와 가면을 동시에 제지했다. 그러자 남자는 마주 미소 짓더니 그대로 손을 정 회장 쪽으로 뻗었다.

“으아아악!”

정 회장의 괴성이 실내를 울렸다.

“아, 이것 좀 뽑으려고. 겁 많은 노땅이네.”

남자는 씨익 웃으며 정 회장의 앞에 박혀 있는 대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곤 등을 돌려 일행이 위치한 장소로 돌아갔다.

“…….”

그제야 좌중들은 입에 고여 있던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었다.

“저 친구가 참…… 장난기 넘치죠? 하하…….”

침묵이 길어지자, 붉은 머리의 여인은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호전시키려 했다. 하지만 냉랭해진 분위기는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후……. 어쨌든 이들이 주축이 되어 탐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이의들 있으십니까?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노인이 미소와 함께 침묵을 깼다. 하지만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노인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약간 괴팍한 면들이 있긴 하지만, 저들은 저희의 목적을 충분히 완수해줄 인재들입니다. 혹시나 실력에 의심이 간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언질을 주셔도 됩니다.”

“…….”

노인의 친절한 어투에도 좌중들은 역시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대검을 들고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저 미친놈이 다시 날뛰면 어떡하지?’

동일한 생각이 좌중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분명 중무장한 가면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음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좌중들은 가면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정 회장을 바라봤다. 그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액체로 추정되는 것이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 한국에선 내로라하는 위치에 오른 인물들이었다. 목숨,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 존재했다. 자존심. 한 기업을 대표하는 얼굴이자 정신적 지주인 그들을 유지시키고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자존심이었다. 헌데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소변을 지린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잃는 것보다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추태를 보이는 것만큼 굴욕적인 일도 없었다.

“으으으…….”

좌중들은 부축을 받으며 홀을 나가는 정 회장의 등을 응시했다. 모두의 말문이 막힌 가운데, 그나마 눈치를 살피던 이 회장이 잽싸게 말문을 텄다.

“회장님의 고매한 안목이야 세상사람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허허, 이 회장님. 저는 그렇게 큰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노인은 작게 손사랫짓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자그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부간 더 의견들이 없으신 것 같으니, 저들을 빅스의 새 식구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소년은 말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년의 양옆에 있던 일행도, 좌중들도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박수쳤다.

“김 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들을 필두로 내일 있을 던전 탐사에서 큰 수확을 거둬봅시다!

와중에 이 회장은 제일 열정적으로 박수치며 노인의 말에 호응했다.

“자, 잔을 듭시다! 자네들도 이리 오게.”

노인의 손짓에 이방인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밀착했다. 그리곤 가면이 건네는 잔을 받아들었다.

“인간의 껍질을 탈피하고 한 차원 더 높은 개체가 되는 그날과, 앞으로도 영원할 빅스를 위하여. 건배!”

노인이 와인 잔을 가슴팍 위로 높이 쳐들자,

“빅스를 위하여!”

좌중들 역시 그를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백야 님. 저희도 할까요?”

여인은 소년의 의중을 물으며 술잔을 코에 갖다 대었다. 그녀의 머리색과 같은 선홍빛 액체에서 비릿한 혈향이 올라왔다.

“이건……. 하…….”

액체의 정체를 눈치챈 여인은 헛웃음을 흘리며 잔을 멀찍이 떼어냈다.

“늙을수록 욕심만 많아진다더니. 우리보다 더 심한 것 같은데?”

그리곤 옆에 있던 남자에게 다가가 작게 소곤거렸다. 남자 역시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움직임에 따라 대검이 살짝 흔들거렸다.

“머리 좋은 놈들일수록 단순한 것에 더 집착한다더니…….”

여인은 낮게 혀를 차며 멸시의 눈빛을 보냈다. 인간을 먹는 것. 과거 혈교에서도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 극성분자들이 벌인 행위였을 뿐, 혈교의 지향점은 아니었다. 그나마도 그것이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 결국 극성분자들은 매장당하고 말았다.

‘부려먹을 하인들을 먹으면 어쩌자는 건지.’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잔의 내용물을 들이키는 좌중들을 응시했다.

“근데 너도 늙을수록 못난 낯짝에만 신경 쓰니까 비슷한 거 같은데?”

“이 새끼가 또…….”

남자의 빈정거림에 발끈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이려는 찰나, 소년이 천천히 잔을 들었다.

“혈교를 위하여.”

그리곤 말릴 틈도 없이 액체를 입으로 흘려 넣었다.

“엇!”

“백야 님!”

뒤늦게 이 사실을 인지한 여인이 급히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소년은 왼팔을 뻗어 여인의 접근을 막았다. 그리곤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고 나서야 잔을 놓았다.

“역겹군.”

“아직 온전한 상태도 아니시건만 왜 굳이 이런 불순물을…….”

노인이 좌중들 쪽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한 여인은 소년이 건넨 잔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대업이 눈앞이다. 적당히 구색만 맞춰주고 나갈 것이다. 준비해라.”

병약한 얼굴 속에는 냉혹한 한기가 서려있었다.

“예…….”

여인이 작게 복명하자, 소년은 좌중들과 담소를 나누는 노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근데, 이거……. 우리도 먹어야 하냐?”

여인은 잔을 흔들며 안에서 회전하는 찐득한 액체를 꺼림칙하게 쳐다봤다.

“백야 님이 드셨는데 설마 안 먹으려고 했어? 이거 완전 배은망덕한 년이네?

“…….”

반박할 틈도 없이 남자가 곧장 잔을 들이켜자, 여인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놈이 한 말이라 그런지 거북감이 느껴졌다. 잠시간 잔을 만지작거리고 나서야 여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혈령대만으론 부족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 다른 놈들도 냄새를 맡았을 것 같은데.”

여인은 잔 속에 갇혀 있는 핏빛 호수를 응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