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3화 - 안전지대 (2)
“헉, 헉.”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 남자와 아가씨 태가 나는 여자는 가느다란 선혈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릎까지 꿇은 걸 보아 거동조차 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검을 붙잡고 남자를 노려보는 소녀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입에서 간헐적으로 새어나오는 피가 그녀의 상태를 짐작케 했다.
“음?”
그들을 빤히 바라보던 민성은 곧 떨떠름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가 했더니, 다름 아닌 주점에서 그의 번호를 받아갔던 소녀의 일행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재회하게 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현상금 헌터들이라고 했었지? 그럼 상대하는 남자는 수배범일 거고.’
주위에서 외치는 1억은 아마도 남자의 몸에 걸린 현상금이 분명했다. 이긴다면야 꽤 큰 액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재미도 없는데, 슬슬 끝내자. 돈에 눈먼 새끼들은 전부 뒤져야지, 그치?”
눈매에 살기가 가득 담긴 남자가 말꼬리를 올리며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남자의 말투를 보니 아무래도 선수를 친 건 소녀 측인 것 같았다.
“큭!”
검을 치켜들어 겨우 남자의 검을 막아낸 소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남자는 소용없다는 듯 히죽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대지의 창.”
촤악-
소녀가 있던 자리에서 흙빛이 도는 굵은 창이 솟아올랐다. 소녀는 공중으로 몸을 날렸으나, 굵은 창은 뱀의 아가리마냥 소녀를 추격했다.
챙-
“꺅!”
와중에 소녀는 겨우 검을 틀어 창을 막아냈지만 그녀의 몸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이 컸는지 소녀는 몸을 부들거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병신 같은 연놈들. 그러니까 꺼지라고 할 때 갔으면 서로가 좋았잖아.”
입꼬리를 올려 그들을 비웃던 남자는 검을 매만지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대장!”
그녀의 동료들이 소녀를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소녀는 쓰러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어이구, 큰일 났네. 처음만 해도 헌터들이 이길 줄 알았는데……. 이래서 1억 이상인 놈들에겐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거였구나.”
“누가 좀 도와줘야 하는 것 아냐?”
“돕긴 누굴 도와. 애초에 저 치들이 역량도 모르고 덤빈 탓이지. 듣자하니 수배범들끼리 조직도 만든 모양인데. 자칫 찍혀서 가족까지 몰살당할 일 있어?”
사람들은 소녀와 일행의 안타까운 미래를 점칠 뿐,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에 적응한 이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심히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는 이가 없었다. 그저 소녀의 목과 몸이 분리되는 상황을 떠올리며 안타깝게 혀를 찼다.
“잘 가라.”
마침내 소녀의 앞에 다가간 남자는 광기 서린 미소를 지으며 가차 없이 검을 내려 그었다. 그때,
챙-
피분수가 쏟아질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의 귓가에 청량한 금붙이 소리가 울렸다.
“응?”
사람들의 시선은 새로이 등장한 낯선 인물에게 쏠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을 지닌 남자의 손에는 검은 대검이 들려 있었다. 전신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대검. 일반인은 들기조차 버거워 보이는 대검을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은 없던 경외마저 불러일으켰다.
끼릭-
검은 대검은 상대방의 검과 맞물려 묘한 쇳소리를 만들어냈다.
“어……. 어? 가만……. 저놈은?”
민성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들은 손가락을 치켜들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고…… 고간킬러다!”
“8억짜리 수배범!”
“희대의 살인마다!”
부르는 것도 가지각색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모든 것들이 민성을 지칭한다는 것이었다.
“후…….”
민성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대검으로 남자의 검을 밀쳐냈다. 예상은 했지만 긍정적인 뜻을 가진 명칭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나설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소녀가 검에 찔리기 직전, 그녀와 눈이 마주쳤던 게 화근이었다. 그를 알아본 소녀는 처연하면서도 담담한 눈빛을 보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 눈빛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아니, 혹은 그것마저도 핑계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까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순간 아련한 과거가 떠오르자 민성은 고개를 휘저었다.
“어떤 새끼가…….”
대검에 밀려 뒤로 물러난 남자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불청객을 죽일 듯 노려봤다.
“넌……?”
하지만 민성의 얼굴을 확인하곤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을 띠었다.
“뭐, 새끼야.”
심기가 불편했던 민성은 낮게 욕설을 뱉으며, 남자를 쏘아봤다.
“저…… 저기…….”
“…….”
등 뒤에선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괜히 아는 척이라도 했다간, 애먼 인생 하나 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쓰레기, 인성 말종 수배자와 일면식 있다는 사실이 매스컴을 타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
민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면에 대검을 겨누었다. 빨리 매듭짓고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뭐 해, 빨리 와.”
민성은 비어 있는 왼손을 까딱거리며 남자를 도발했다.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검 끝을 지면과 맞닿게 내리며 전투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드디어…….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오히려 그를 기다렸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얼굴에는 열망이라는 감정이 희미하게 담겨 있었다.
‘뭐지? 일부러 방심을 유도하는 건가?’
여태껏 만났던 놈들 중에는 머리 굴리는 놈들이 허다했다. 눈앞의 놈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
민성이 얼굴을 구기며 대검을 들어 올리자, 남자는 서둘러 얘기를 이어갔다.
“그간 저희는 민성 님을 뵙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민성 님의 행적을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뵙게 되다니…… 그야말로 운명이라고밖에는…….”
“어, 관심 없어.”
민성은 손을 까딱거리며 남자의 말을 끊었다. 언뜻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다만 그들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이 거슬렸다. 그저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민성 님께서는 관심 없으실지 몰라도 저희는 아닙니다. 제 얘기를 들으시면 생각이…….”
“하……. 관심 없으니까 그만 가라.”
더 들을 가치를 느끼지 못한 민성은 재차 남자의 말을 끊으며 대검을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곤 등 뒤에 있는 소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야, 얼른 일행 챙겨서 빠져.”
“네……. 네?”
“내 할 일 다 했으니까, 네 일행들 챙겨서 빠지라고.”
민성은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소녀의 입장을 생각한 그의 마지막 배려였다.
“자…… 잠시만요!”
소녀의 안타까운 목소리에도 민성은 끝내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후…… 이제 안전지대로 가볼까.’
어차피 돌아가는 꼴을 보니, 싸움도 소녀 측이 먼저 건 것 같았다. 남자도 싸울 의사는 없어 보이니 구태여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응?’
민성이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남자는 괴이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뭐 하자는 거냐?”
“민성 님의 무력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기회인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바보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싸우자는 소리지?”
더 들어주기 힘들었던 민성은 대검의 손잡이를 움켜잡곤 그대로 남자에게 쇄도해 들었다.
챙-
가슴 언저리로 날아오는 대검을 간신히 막아낸 남자는 황급히 외쳤다.
“기회를 놓친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들어야 돼?”
빠른 태세 변환에 민성은 차갑게 말하며 남자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민성이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남자는 지면을 구르거나 몸을 힘껏 비틀며 겨우 공격을 피해냈다.
“남자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의 한 번을 여기서 사용하겠습니다!”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뜰 놈이었다.
“시끄러워!”
챙-
몰아치는 공격을 간신히 피해내던 남자는 검을 들어 목 언저리까지 다가온 대검을 겨우 막아냈다.
“큭!”
하지만 그 대가로 남자의 몸은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났다.
“겉보기와 달리 근력이 상당하시군요. 오히려 소문이 과소평가한 것 같군요. 역시 저희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어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민성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것보다 왜 같은 수배자끼리 싸우는 거지?”
“알게 뭐야. 싸우다가 부상이라도 입었으면 좋겠다. 두 놈 다 대책부에 넘기면 9억이라고! 9억! 잡기만 하면 대박인……. 어, 뭐야! 밀지 마!”
9억이라는 숫자에 싸움을 관전하던 사람들의 눈에 욕망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이미 무기를 쥐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끝내야겠어.’
더 시간을 끌었다간 엄한 적들을 늘리게 될 판이었다.
“골렘의 굳건한…….”
“잡아라!”
민성이 스킬을 사용하려는 찰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인파를 뚫고 그들에게 달려왔다.
‘저놈은…….’
무리의 선두에는 익숙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둥근 안경 밑에 감춰진 차가운 눈매가 민성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이런……. 대지의 창.”
민성과 대치하고 있던 남자는 혀를 차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들에게 다가오는 대책부 요원들의 발밑에서 굵은 창이 솟구쳤다.
“끄아아악!”
창에 복부를 관통당한 남자 요원이 피를 뿌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저 새끼가……. 정지! 발밑을 조심해라!”
이종범의 명령이 하달하자, 호기롭게 달려가던 요원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곤 바닥을 살피며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창을 경계했다.
“기회가 된다면 어떻게든 찾아뵙겠습니다.”
혼란한 틈을 이용해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곤 잽싸게 줄행랑쳤다. 남자는 금세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더니, 이내 찾아볼 수 없었다.
“4조! 놈을 추격해!”
“예!”
곧장 요원들이 그의 뒤를 추격했으나 아마 잡기는 어려울 듯했다.
‘이제 나도 도망쳐야겠…….’
놈들은 무섭지 않았지만 이종범을 따라다니던 그 여자는 상대하기 버거웠다. 민성이 인파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저…… 저기…….”
민성은 그의 옷깃을 붙잡는 느낌에 급히 뒤로 돌았다.
“……안 갔어?”
도망갔다고 생각했던 소녀가 그의 옷깃을 잡고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민성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고맙다는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하아…….”
기껏 노력했던 일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자, 민성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른 척하고 도망쳐주는 게 더 고마웠을 일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그녀의 일행은 소녀의 부축 없이도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체력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됐고. 시간 없으니까 잘 들어.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지금 네 일행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
“……네?”
요원들과 사람들이 엉켜 혼선을 빚는 사이, 민성은 소녀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