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 안전지대 (1)
“그리고 치안담당 녀석들에게 전해.”
치안담당이라는 말에 남자 하나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
“오늘부터 평소보다 두 배 긴장하고 움직이라고. 우리가 움직일수록 국민들의 피해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우리를 향한 신뢰도는 늘어난다.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움직이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이종범이 가보라는 듯 손을 까딱이자, 남자는 급히 회의실을 나갔다.
“강민성…….”
놈을 잡거든 그냥 둘 생각은 없었다. 놈의 손에 죽은 부하들이 통곡할 일이었다. 작게 중얼거리며 회의실을 나가는 부하들을 지켜보던 부장도 곧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가냘픈 그림자 하나가 그 뒤를 따랐다.
37. 안전지대
*
비밀스러운 집, 궁궐 내부. 민성의 축 늘어진 몸이 침대 위를 뒹굴고 있다. 전날 비밀스러운 집에 오기 전, 민성은 모텔에 들러 수라에게 받았던 USB의 내용을 확인했었다. 그 덕에 대기업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 몇과 거래정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방대한 정보에 민성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별로 얻은 게 없다던 수라의 말은 결국 앓는 소리에 불과했다. 덕분에 민성은 내용을 살피고 조사하느라 밤을 꼴딱 새워야만 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도합 했을 때, 나오는 결론은 딱 한 가지였다. 납치범들의 중심축, 그 커다란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대설이라는 점을.
“싱싱한 주인! 일어나라! 일어나라! 냥냥냥냥냥냥냥!”
“끙…….”
시바의 요란한 음성에, 민성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곤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살폈다. 시계는 오전 8시를 가리켰다.
“고마워요.”
“냥냥냥.”
어젯밤, 시바에게 깨워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이리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해줄 줄은 몰랐다. 앞으로도 자주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한 민성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호오?’
부족한 수면시간을 가졌음에도 몸 상태는 날아갈 듯 가벼웠다. 민성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봤다. 아무래도 궁궐의 설명에 붙어 있던 피로도 100% 회복의 효능인 듯했다. 더군다나 평소 개운치 못한 아침을 자주 맞이하던 그에게는 상당히 반가운 일이었다. 민성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몸을 몇 차례 쓰다듬었다. 그리곤 나갈 채비로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세면실에서 몸을 단장하고 식료품을 모아놓은 박스에서 꺼낸 즉석식품으로 아침을 대체했다. 궁궐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이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요리를 하자니 귀찮은 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볼까.’
“다녀와! 다녀와! 싱싱한 주인!”
모든 준비를 끝낸 민성은 시바의 배웅을 받으며 그만의 궁궐을 나섰다. 민성은 새싹이 삐죽 튀어나온 밭을 지나 나무문 앞에 도착했다.
[돌아가실 장소를 선택하십시오. 장소는 이용자가 방문했던 곳으로 제한됩니다.]
응암동 XX빌라 XX호의 문.
명동 XX모텔 XX호의 문.
.
.
.
목록에는 기존에 있던 문들과 그간 그가 새롭게 개척했던 문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는 이미 정해놓았다. 민성은 목록 중 하나를 선택하고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탁-
민성이 선택한 곳은 여의도에서 가장 인접한 홍대의 모텔이었다. 평일이라 손님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세상만사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는 듯했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이 새끼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민성 덕에, 발가벗은 남녀는 기겁하며 이불을 끌어당겨 그들의 나체를 가렸다. 민성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그들을 바라봤다.
“이 새끼! 뭐 하는 놈이야! 어! 어?”
고함을 지르던 남자는 민성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그리곤 급하게 그의 중심부를 두 손으로 가렸다.
“…….”
‘이거 변태 살인마 칭호까지 추가되는 거 아냐?’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그의 정체를 아는 듯했다. 인피면구를 착용하지 않았던 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음……. 저는 소문처럼 나쁜 놈이 아닙니다. 물론 의도치 않게 두 분의 인구수 증가 프로젝트를 방해했지만……. 후……. 좋은 시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시던 것 마저 하세요, 그럼. 화이팅!”
민성은 슬쩍 고개를 숙인 뒤, 잽싸게 모텔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마스크를 착용하고 도보를 걸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는 참 유용한 범죄자 타이틀이었다. 옛날의 그였다면 감히 생각조차 못 했을 일이지만, 범죄자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일말의 양심조차 사라지는 듯했다.
‘뭐, 다음부턴 다른 모텔을 이용하겠지.’
애꿎은 일반인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모텔 문을 이용할 것이었다. 앞으로 생길 미래의 피해자들에게 미리 사죄하며 지하철역으로 이동했다. 민성은 몇 차례 환승을 거친 후, 목적지인 국회의사당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 굳게 서 있는 타워가 보였다.
‘좋아. 받은 혜택을 최대한 이용해주겠어.’
민성이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다름 아닌 모아둔 루비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유적탐사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이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다. 준비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준비하는 게 좋았다.
“흠?”
민성은 눈앞의 난잡한 광경을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분명 상점의 자유이용 혜택을 받은 이는 그를 포함해 10명이었건만, 역 인근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어이! 거기 앵글 좀 제대로 잡아!”
그중에서도 유독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민성의 시선에 들어왔다. 렌즈에서 반사되는 햇빛이 그의 눈을 따갑게 찔러댄 탓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바삐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건현장에는 언제나 형사보다 기자들이 먼저 도착해 있다더니.’
민성은 대책부가 미리 자리 잡고 통제하는 상황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정작 자리를 메우고 있는 건 수많은 방송국 차량들과 기자 떼거리였다. 기삿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었다. 특히나 대책부 요원들을 학살하는 그의 동영상이 업로드되면서, 언론은 요 며칠간 그를 통렬하게 비난했고 지금도 진행 중에 있었다.
특히 NBS와 드롭일보가 그를 비판하는 선봉장들이었다. 질이 나쁜 범죄자부터 시작해, 지나가던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했다는 되도 않는 루머까지 양산시켰다.
‘자꾸 사람 삐뚤어지게 만든단 말이야.’
애초에 언론이야 정부 편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사건의 전말도 알지 못하면서 싸질러 놓은 댓글들을 봤을 때는, 가라앉던 화도 다시 들끓어 올랐다. 민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분주히 움직이는 기자들을 노려봤다. 혹시라도 정체를 들킬 경우, 저들에게 훌륭한 가십거리가 되어줄 터. 떨어지는 게 상책이었다.
“자, 안전지대로 들어가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준비한 안전지대 입장티켓 팝니다. 단돈 50만 원! 싸다 싸! 이것만 있으면 능력자로 인식돼서 들어갈 수 있다고! 어허, 진짜라니까? 믿기 싫으면 말든가. 어이, 기자양반! 이런 곳보다 안전지대를 찍어야 돈이 되지! 싸게 해줄게, 이리 와!”
이 와중에도 사기꾼으로 보이는 남자는 종이를 흔들며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관리인의 설명을 허투루 들었는지, 그 외에도 장사치들 여럿이 기이한 물건들을 입장권이라 외치며 사람들을 현혹했다.
‘이래서 사기도 머리 좋은 놈들이나 치는 거지. 사람 많은 곳이라고 무조건 대목인 줄 아나, 등신들.’
어딜 가나 사기꾼들 천지인 세상이라지만, 저들은 장소부터 잘못 골랐다. 더군다나 아직 보이지 않지만 언제 또 대책부 놈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푼돈에 목숨 걸다가 한순간에 가는 법이다. 고개를 저은 민성은 커다란 타워가 보이는 정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휘잉-
뻥 뚫린 넓은 평지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타워를 향해 걷고 있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강바람이 그들의 볼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검이나 쇠붙이 따위의 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민성도 앞서 가는 사람들의 등을 보며 그 뒤를 따랐다.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진짜 더럽게도 많네.’
인파를 바라보던 민성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첫째론, 안전지대의 시작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멋모르고 오는 능력자들을 공격한다. 대책부에 등록하지 않은 능력자를 포획할 경우 현상금을 제공한다 했으니 상당히 일리 있었다.
둘째, 미지의 공간을 선독점한다. 그처럼 범죄자 신분을 가진 이들에겐 어떻게 보면 가장 안락한 공간이 될 수도 있는 곳이다. 만약 그런 공간을 독점한 뒤 여러 가지 시설을 올린다면 그 역시 상당한 메리트가 될 수 있었다.
“싸움이다!”
민성이 머리를 굴리는 와중,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순간, 모두의 이목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쏠렸다.
‘싸움?’
민성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많은 곳에는 언제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 역시 대책부와의 마찰을 감안하고 이곳에 왔지만, 다른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호기심이 동한 민성은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싸움이래. 벌써 누가 낚아채고 있는 것 아냐?”
“아니 분명 홈페이지에선 다 같이 모여서 사냥하자고 하지 않았어? 우리도 끼자!”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일단 가서 상황을 지켜보자고.”
일부 무리들이 정체 모를 소리를 읊으며 민성과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상당수의 무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홈페이지? 뭐야, 이것들은.’
뒤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목소리에 민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나 안전지대가 주목적이 아닌 모양이었다. 거기다 사냥이라는 단어는 그의 심리를 상당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먼저 가서 얼른 살펴만 보고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을 굳힌 민성은 그가 낼 수 있는 최대로 속력을 높였다. 그리곤 사람들 틈을 헤집으며 순식간에 전방으로 내달렸다.
“꺅!”
“뭐, 뭐야! 이 새끼……. 네가 건드렸냐?”
“죽고 싶나! 뭔데 애먼 사람한테 시비야?”
사람 같은 것이 삽시간에 옆을 스쳐가자, 당황한 사람들은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애먼 옆 사람과 부딪히거나 충돌을 벌였다. 정작 해프닝을 만들어낸 민성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목적지로 접근했다.
챙-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
‘저긴가?’
민성은 속도를 줄이며 정체되어 있는 구간을 바라봤다. 다수의 사람들이 널따란 원을 만들어 둘러선 채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원의 중심에서 재차 쇠붙이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봐선, 확실한 것 같았다.
“와! 죽여라! 1억이다, 1억!”
“잡으면 진짜 대박이겠네……. 근데 밀리는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려왔다. 민성은 웅성거리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중심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마침내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한 명의 남자와 세 남녀가 서로를 꼬나보며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다. 언뜻 보기엔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해 보였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