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101화 - 납치? (5)
탁-
남자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어? 어어?”
순간 민성의 몸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민성은 갑작스레 몰려오는 어지러움을 딛고 겨우 몸을 가누었다.
‘……뭐지?’
지배자가 수작을 부린 건가 싶었다. 하지만 어지러움이 어느 정도 가시자, 민성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
아름답다. 어둡던 반쪽짜리 세상에 새로운 빛이 들어온다. 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밝았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활짝 걷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완전한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었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민성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얼얼했다. 확실하다. 꿈이 아니다. 이건 엄연한 현실이자 지금이었다.
“어……어?”
마음은 잔잔하기 그지없었지만, 왜인지 눈에는 맑은 물이 천천히 고이기 시작했다. 왼쪽 눈가에 고인 눈물이 주는 간질거림마저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잘 보이나 보네.”
민성의 반응을 본 지배자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민성은 작게 중얼거리며 감사에 감사를 거듭했다.
“그렇게 감사할 필요 없어. 작은 소원이었으니까.”
“지배자님에게는 가벼운 부탁이었을지 몰라도, 저는 잃었던 세상의 반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에게는 작은 겨자씨 같은 부탁일지라도, 당사자인 민성이 느끼는 것은 몇십 년은 족히 나이를 먹은 거목과 같았다.
“그렇게 감사하면 다음 전투도 부디 승리해줘. 솔직히 우리 차원은 다른 지배자들이 꽤 탐낼 만한 곳이라. 나도 좀 불안하거든.”
민성이 연신 감사를 표하자, 남자는 손을 저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어. 난 우리 인간들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설령 언젠가 패배하는 상황이 오게 되더라도 적어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
민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지배자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얘기를 이어갔다.
“늙은 할배랑 대화하는 것도 지겨울 테니, 이만 돌려보내줄게.”
“아,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민성은 조심스럽게 운을 땠다. 지배자는 물어보라는 듯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혹시 아까 루크라는 자와 이야기하실 때 언급하셨던, 토토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혹여나 그의 심기를 건드릴 경우 다시 눈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민성은 내내 갖고 있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무례라고 할 것까지 있나? 사실 인간들도 엄연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인데 말이야.”
다행히 지배자는 모호한 웃음을 흘리며 오히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알려주시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그건 조금 힘들 것 같네.”
지배자는 정원에서 과실을 수확하는 레이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내가 놈들을 박멸하거나 쓰레기장이 터지거나.”
“…….”
의미 모를 소리에 민성은 그저 의례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슉-
“지배자님! 큰일 났어요! 서쪽 구역이…….”
그때, 그들 사이로 분홍머리를 가진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잠깐 놀란 눈으로 민성을 쳐다보던 그녀는 상당히 다급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이런, 아무래도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네.”
남자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보니,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또 공헌도 1등을 한다면 다시 뵐 수 있는 겁니까?
호기로운 물음에 남자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성을 쳐다봤다. 그리곤 피식 미소 지었다.
“쉽지 않을 텐데. 뭐, 그때가 온다면 지금보단 조금 더 많은 얘기를 들려줄게.”
“예.”
조금 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한 번에 모든 걸 얻을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에도 무조건 1등을 차지해야겠어.’
지배자와 버섯이 연관돼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은 이상,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었다.
“그럼 처음에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내줄게.”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남자는 인자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민성의 몸은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다시 자각사 인근의 보도로 돌아온 민성은 주위를 살폈다. 아직 겨울이라 그런지, 길지 않았던 대화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변에는 이미 어둠이 끼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돌아온 터라 혹여나 이목이 쏠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지배자의 배려 덕인지 사람들은 그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민성은 호주머니를 뒤적여 마스크를 꺼내 착용하곤 그의 왼쪽 눈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보인다. 너무 잘 보여서 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재차 왼쪽 눈을 깜빡거려 봐도, 역시나 잘 보인다. 웃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자꾸 행복에 겨운 미소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려 했다.
‘그나저나 녀석은 또 어디로 간 거지.’
웃음을 겨우 억누른 뒤에야 민성은 티노를 찾았다. 내심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한가득이었지만 녀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가 갑작스럽게 소환된 동안, 새로운 구경거리를 찾으러 간 모양이었다. 혹시나 근방에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민성은 재차 도로변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역시나 녀석의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녀석을 다시 만나려면, 또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젠장…….’
결국 마음을 비운 민성은 구멍을 찾은 뒤, 열쇠를 꺼내 문 안으로 들어갔다.
*
다음날, 이능력자 대책부 회의실 안.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TV를 주시하고 있다.
“전일 17시경, 세계적으로 방송된 관리인의 전언이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간 수많은 실종자들과 사상자들을 냈던 전쟁이 끝났다는 발언과 함께, 공헌도 정산식이라는 의문의 행사를 벌였는데요. 전투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친 10명 가운데 1등을 차지한 이가 한국인이라는 소식에 각국의 이목이 크게 쏠리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자, 엘프와 의자에 앉아 있는 10명의 인간들이 화면에 잡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엘프의 진행에 따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성이 의자에서 일어나 엘프가 들이미는 마이크에 입을 바싹 붙인다.
“강민성입니다.”
“오오! 확실히 공헌도 1위라 그런지 대화에 임하는 자세조차 다른 놈들…… 분들과는 많이 다르군요. 1위나 하실 정도면 특별히 소속된 곳이 있을 법한데, 있나요?”
“없습니다.”
“호오. 무소속이신 분이 1등이라니……. 전례가 없던 일이군요. 특별히 비법이라든지, 그런 것이 있나요?”
“예. 있습니다.”
“오오오오오! 뭡니까! 1등의 비법!”
“노력하시면 됩니다. 많이 하세요. 이상입니다.”
“……예? 어이고! 제가 귀가 길어서 그런지 잘못 들은 것 같군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력 많이 하세요. 그러면 됩니다.”
“노오오오력이요?”
“네, 노력.”
민성의 말을 마지막으로 화면은 다시 아나운서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능력자 대책부에서 지정한 강력 범죄자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자국 언론은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는 평가부터, 범죄자는 결국 범죄자라는 비난까지.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처우에 따라 향후 능력자들에 대한 대책도 상이해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입니다. 그로 인해 향후 대책부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관리인은 그 외에도 여러 내용을 언급했는데요. 그 중 안전지대…….”
탁-
“이게 어제 자 뉴스다. 각자 보고 생각한 바를 읊어봐.”
이종범의 한없이 낮은 목소리에 수하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그 중 남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래, 얘기해.”
“저희는 여태껏 나름의 수확을 거두어 왔습니다. 아직 지방의 모든 곳까지 신경 쓰지는 못하는 실정이지만, 그 역시도 대책부의 인원을 확충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실제로 저희는 근 한 달간 불순한 능력자들을 사살 및 포획하고, 상당수의 능력자들을 국가에 등록시켰습니다. 또한 그 능력자들에게 돈을 쥐여 주며 범법자들을 잡게 하는 일도 큰 성과를 보이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약간의 예외사항은 존재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예외사항들에 더 많은 인력을 붙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남자는 눈치를 살피면서도 그의 소신을 또박또박 밝혔다. 그의 말이 끝나자, 이종범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미 녀석들에게 맡기긴 했지만…….’
이종범은 얼마 전, 그를 찾아왔던 한 무리를 떠올렸다. 그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을 빌려준다고 했었다. 물론 대가 없는 노동은 없다고 했다. 놈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놈들이 갖고 있는 스킬들은 그를 상당히 혹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정체 모를 그들을 그의 휘하에 두었다. 그리고 특이점 1호에게 당할 뻔했을 때, 그들의 무력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강민성이 특이한 능력자라 하더라도 특수부대에서 단련하고 단련한 몸이건만.’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이종범은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리며 담배를 꺼내 빼어 물었다. 놈을 너무 얕봤다. 아니, 은연중에 능력자들을 얕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종범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총기 사용의 합법화.
이 법안만 통과될 경우, 능력자들과 특이점들 그리고 그가 손잡은 괴이한 놈들까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백날 하늘을 날고 바다를 갈라봐야 결국 인간들이었다. 이미 어쭙잖은 능력을 사용했다가 총알에 목숨을 잃은 해외사례도 여럿 보도되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과연 배에 구멍이 나도 그 잘난 대검을 휘두를 수 있을지 기대됐다.
“그래, 다음. 얘기해봐.”
이종범은 옅은 미소를 흘리며, 손을 든 다른 부하를 지목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당장 저런 특이점을 가진 놈들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관리인이라는 자가 말한 안전지대를 빠르게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관리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간 숨어 있던 대다수의 능력자들이 안전지대에 올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로, 저희가 먼저 그곳을 완전히 포위하는 것도 한편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특이점들도 결국 그곳으로 올 테니까 말이야?”
이종범은 안경을 고쳐 쓰며 남자를 바라봤다.
“예, 그렇습니다! 구태여 저희가 놈들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남자는 정자세를 유지하며 힘차게 답했다.
“……합당하군. 좋아. 조회는 이것으로 종료한다. 우리는 안전지대를 조사하러 간다, 준비해.”
“예!”
이종범의 명령이 떨어지자,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분주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