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100화 - 납치? (4)
‘큭.’
민성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루크를 노려봤다. 이제껏 상대해왔던 강자들의 살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음울한 살기였다. 민성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의 그는 눈앞의 청년에게 상대조차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민성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문제 될 게 있습니까? 오히려 관리인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렇게 인간을 겁박하셔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야 죽어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만, 그쪽 상관 분께서 꽤나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몰려오는 살기에 입술을 악문 민성은 최대한 담담한 얼굴로 관리인의 말을 받아쳤다. 사실 민성이 당당히 그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결국 전쟁은 오로지 인간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건데 왜 니가 지랄이야, 이 시팔놈아.’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인간뿐. 만약 저들도 참여가 가능했더라면 진작 했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시장 등 일부러 편의시설을 만들어준다며 인간들을 독려할 이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뭐가 됐건 그는 엄연히 공헌도 1위에 오른 인간이었다. 만약 눈앞의 청년이 그를 죽일 경우, 언제 또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을 터.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없는 행위였다.
“…….”
루크는 그의 상관인 지배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약 여기서 저 건방진 인간을 죽일 경우, 엄연히 명령을 위반한 것이 돼버린다. 명령위반은 단순한 문책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었다.
“큽……. 시발.”
루크는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리며 민성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리곤 이내 한숨을 폭 내쉬곤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지금부터 위대한 분의 거처로 이동할 거다. 근데……. 지금 그 차림으론 힘들겠어. 얼굴이 못났으면 옷이라도 잘 입어야지, 큽…….”
루크는 민성의 몸을 위아래로 훑곤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
민성은 슬쩍 고개를 숙여 달라진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여태껏 입고 있던 파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근사한 정장을 입은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야 아주 조금 사람같이 바뀌었네. 물론 본판이 워낙 글러먹어서 이게 최선이지만, 큽…….”
‘저 새끼 분명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차마 건들지는 못하겠으니, 괜한 외모로 시비를 거는 게 분명했다. 민성은 폭소하며 바닥을 구르는 루크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슬슬 이동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늦으면 그쪽 상관분이 참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아, 맞다!”
민성의 차가운 말투에, 루크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럼 바로 이동한다.”
루크는 급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민성은 몸이 저절로 이동하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리인의 상관이라……. 과연 어떤 인물일까?’
긴장보다는 묘한 기대감이 전신을 맴돌았다. 이윽고 민성은 루크와 함께 시상식장에서 사라져버렸다.
‘여긴…….’
민성은 눈가를 긁적이며 낯선 공간을 살폈다. 아름답게 꾸며진 거실과 거대한 침대, 그리고 수영장과 정원. 호화로워 보이긴 했지만 특별함이 없었다. 나름 신기하고 괴이한 공간을 예상했건만, 그가 했던 상상에 비하면 이곳은 너무 평범하디 평범했다.
“데려왔습니다.”
루크는 식탁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왔어?”
민성은 생글거리며 그들을 반가이 맞이하는 남자를 슬쩍 바라봤다. 조금 미남일 뿐, 겉보기엔 평범한 일반인들과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모르지.’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었다.
“루크는 고생했으니, 이제 돌아가서 푹 쉬어.”
“정말입니까?”
쉬라는 말에 크게 반색하던 루크는 곧 남자를 의심스럽게 노려봤다.
“정말이지! 속고만 살았어?”
“예.”
“응, 그럼 또 속아. 요즘 자르가 게임이 부족해서 토토 제작 속도가 느리다고 나한테 하소연하더라. 그러니까 얼른 돌아가서 마저 제작해. 내가 휴가 갔다 올 때까지 전부 개선해놔야 돼.”
남자는 싱긋 웃으며 얼른 나가보라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역시……. 하……. 죽고 싶다.”
루크는 부들거리며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토해냈다.
“우리 루크가 또 마법에 걸린 모양이구나, 그럴 때는…….”
“아뇨! 아뇨! 당장 제작하러 가겠습니다.”
지배자가 손가락을 튕기려 하자, 식겁한 루크는 황급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곤 자리를 벗어났다.
‘토토? 게임 제작?’
루크와 남자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민성은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춰야만 했다. 긴가민가했던 가정이 점점 확신으로 뒤바뀌었다. 버섯은 이들과 연관돼 있는 게 분명했다.
“귀여운 녀석.”
루크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싱긋 미소 지은 지배자는 멀뚱히 서 있는 민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사가 늦었네. 어서 와.”
남자는 가벼운 환영인사와 함께 민성에게 자리를 권했다.
“예…….”
민성은 의자를 빼낸 뒤, 조심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진미들이 가득했지만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민성의 머릿속은 이들과 버섯의 관계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이번에 공헌도 1등을 했다고? 내 대에선 처음이네.”
민성을 대견하게 쳐다본 남자는 커피를 홀짝이며 평온하게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 운도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단순히 운만으로 1등을 한다는 건 어폐가 있지.”
“여기.”
남자가 말을 이어가던 와중, 그의 옆으로 금발머리의 소녀가 다가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고마워, 레이첼.”
남자의 다정한 말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고개를 까딱거리곤 정원으로 들어갔다.
“흠……. 과거의 행적을 보면 평범한 일반인인데 말이야. 물론 약간의 예외사항도 있긴 한 것 같은데, 이것만 가지곤 설명이 안 돼.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지만, 그게 강함의 원초적 이유가 되지는 않는데, 흠…….”
종이를 살피던 남자는 민성을 힐끗 바라봤다. 종이에는 민성의 출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공헌도 1등을 할 만한 이유는 보이지 않았다.
‘불행한 과거……? 설마?’
그저 종이를 봤을 뿐인데, 그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 아무래도 종이에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혹, 그가 여태껏 걸어왔던 모든 행보가 적혀 있다든가. 하지만 얘기하는 걸 봐서는, 다행히도 버섯과 관련된 정보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지.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쫄아야 하는 건데.’
그는 그저 야생의 버섯을 만졌을 뿐,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애먼 피해자에 가까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민성은 태연하게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흠……. 너, 설마……. 에이, 상관없겠지. 어차피 강한 인간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잠시 의심의 눈초리로 민성을 쏘아보던 남자는 픽 웃더니, 종이를 찢어버렸다. 민성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종잇조각들을 무심히 바라봤다.
“그보다 식사자린데, 좀 들지 그래? 이래 봬도 레이첼이 정성껏 요리한 건데 말이야.”
남자는 식사를 권한 뒤, 먼저 포크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성도 고개를 끄덕이곤 태연히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곤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었다.
달그락-
두 사람은 묵묵히 음식을 입에 넣을 뿐, 어떠한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냅킨으로 입을 가벼이 닦아낸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첫 1등인데, 갖고 싶은 것 있어?”
“말씀의 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민성은 부지런히 놀리던 손을 멈추고는 남자를 바라봤다.
“내가 지배자가 되고나 서 벌어진 첫 전투야. 나에게는 나름 의미가 깊은 사건이란 말이지. 과연 인간들이 무사히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었거든. 하지만 그들은 내 상상 그 이상의 전과를 올려줬어. 앞서 관리인이 말했듯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차원은 소멸하고, 결국 나도 죽는다는 소리니까.”
민성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가 대단한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전쟁의 승패에 따라 그의 운명도 결정되는 듯했다.
“물론 목숨이 아깝지는 않아. 이놈의 차원도 망하던 말건 내 알 바 아니고. 다만 모아놓은 포인트가 아까워서 그런 거지.”
남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늘어놓았다.
“포인트…… 말입니까?”
“그래, 포인트. 이 위치에 오르면 포인트로 이것저것 할 수 있지. 당장에…….”
민성이 관심을 보이자, 흥이 오른 남자는 설명을 이어가려 했다.
“거기까지. 뚫린 게 입이라고, 이제 막 지껄이는 거지? 응?”
하지만 언제 다가왔는지, 소녀가 남자를 죽일 듯 노려봤다. 소녀의 눈치를 살피던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 음, 레이첼, 그게 아니고……. 알잖아? 나도 언제까지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가볍게 얘기해본 거라고…….”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변명해봤지만,
“닥쳐!”
돌아오는 것은 소녀의 매서운 주먹뿐이었다. 그의 양쪽 눈에 큰 멍이 들고 나서야, 소녀는 씩씩거리며 정원으로 돌아갔다.
“크흠……. 어쨌건 첫 차원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등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마음먹었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주도록 할게.”
민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약간 추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다른 이도 아닌 무려 지배자의 보상이라니. 예상은커녕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엇이든 가능한 겁니까?”
질문을 던진 민성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의 위치를 경시한 질문이었다.
“당연하지. 말해보렴.”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지배자는 자신 있게 답했다.
‘뭐가 좋을까. 6성 스킬을 달라고 할까? 아니야. 당장 마력이 부족한데 무슨 스킬이야. 마력을 뻥튀기 할 수 있는 아이템을 달라고 할까?’
“아참, 미안하지만 타워와 관련된 부분은 빼고. 스킬이나 아이템 같은 건 줄 수 없어. 그렇게 하면 내가 엄연히 전쟁에 개입하는 꼴이 되니까.”
“…….”
무엇이든 가능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자, 얼른 말해보렴. 억만금을 요구해도 좋고, 명예를 요구해도 좋고.”
지배자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민성의 선택을 기다렸다. 한참 고민을 거듭하던 민성은 마침내 결정을 내리곤 지배자를 바라봤다.
“그럼, 혹시……. 제 눈을 고쳐주실 수 있습니까?”
민성은 그의 왼쪽 눈을 가리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단의 효과를 보며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언젠가 상자에서 그의 눈을 고쳐줄 아이템이 나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막말로 재수 없으면 죽을 때까지 안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긴 돈도 좋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지.”
민성의 정보를 떠올린 지배자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민성의 움직임 없는 왼쪽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왼쪽 눈의 복구. 그게 네가 원하는 보상 맞지?”
지배자의 물음에 민성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묘한 열망과 설렘, 그리고 흥분이라는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